[제3회] 광장시장: 왕자의 발길이 닿았던 이현, 민초

by 박성기


[제3회] 광장시장: 왕자의 발길이 닿았던 이현, 민초가 꽃피는 곳



창경궁 명정문을 나와 걷다 보면,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 조선 시대 '배오개(이현)'라 불리던 종로 4가에 닿는다. 연잉군이 어머니 숙빈 최씨를 뵈러 궁궐 담장을 넘나들 때 마주했을 그 흙먼지 날리던 장터였다. 이제 대한민국 최초의 상설시장인 광장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궁궐의 전각들이 죽은 기록의 역사를 품고 있다면, 광장시장은 매일 아침 전등을 밝히는 상인들의 살아있는 의지를 품고 있다.




창경궁의 고즈넉한 담장을 따라 서울대학교병원을 왼편에 두고 길을 내려온다. 현대 의학의 최첨단이 모인 병원 건물을 바라보며,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생각한다. 병마라는 가혹한 환경 앞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환자들의 의지와, 그들을 지켜내려는 의료진의 사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또 다른 의미의 '집복헌'이자 '주합루'가 아닐까.



연남동 사거리에 위치한 성균관대학교 동문회관에 도착해 비로소 긴 휴식을 취한다. 이곳은 과거와 현재, 학문과 세상이 만나는 접점이다. 유림의 선비들이 대의를 논하던 성균관의 정신이 현대의 동문회관으로 이어지듯, 창경궁에서 배오개로 향하던 왕자의 발걸음 또한 이 길목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무늬를 남겼을 것이다.




동문회관의 정적 속에서 추위를 달래고 나니, 이제는 사람 냄새 가득한 광장시장으로 향할 시간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고소한 빈대떡 기름 냄새와 수십 명의 말소리가 뒤섞인 거대한 소음이 나를 반긴다. 이곳은 더 이상 임금과 왕자의 공간이 아니다.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며 삶을 일궈내는 삶의 주역들이 주인인 공간이다. 1905년, 일제의 경제 침탈에 맞서 상권을 지키기 위해 조선 상인들이 스스로 성금을 모아 세운 이 시장의 역사는, 그 자체로 환경에 굴복하지 않은 거대한 의지의 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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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시간, 시장통의 활기 속에 자리에 앉자마자 김기영 교수가 도착한다. 그와의 만남은 늘 사유의 건조함을 씻어주고 학문적 통찰의 깊이를 더해준다. 우리는 인파를 뚫고 광장시장의 상징과도 같은 창신육회 본점에서 만났다. 김성국 선배와 서귀포 대포 삼총사 멤버 고홍숙,임대범 우리 사무실 팀은 붉은 선홍빛 육회와 정갈하게 차려진 술상 앞에 마주 앉는다. 연잉군이 이현궁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던 길목, 혹은 청년 박문수와 주막에서 잔을 부딪쳤을 그 '배오개'의 기운이 육회 한 점, 술 한 잔에 배어 있다.




"서귀포 대포에서 올라왔습니다. 대포 한 잔 합시다" 제주 끝자락 서귀포의 거친 바다 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그들의 손마디는 옹이진 나무처럼 단단했다. 나는 그 손을 보며 이 뜨거운 소고기국물과 파전, 육회냄새가 진동하는 시장통에서 삶이 완성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서귀포 나그네 사투리와 김 교수의 해박한 지식이 육회 접시 위에서 안주가 되어 어우러진다.




육회 본점의 좁은 테이블은 이제 작은 우주가 된다. 숙빈 최씨가 이현궁에서 백성들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보며 위안을 얻었듯, 나 또한 광장시장의 소란함 속에서 고독했던 궁궐 산책의 무게를 털어낸다. 왕자의 효심이 머물던 배오개 길은 이제 민초들의 땀방울이 보석처럼 빛나는 광장이 되었다.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不醉無歸)"던 정조의 호령은 이곳에서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는 평범한 이웃들의 건배사로 치환된다. 우리가 나누는 술잔은 단순히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환경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선 서로의 의지를 격려하기 위한 의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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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장의 전등불이 하나둘 깊어간다. 육회의 고소한 맛과 소주 한 잔의 짜릿함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마음속 깊은 곳에 다시금 나아갈 힘을 채워준다. 1일 차의 여정은 광장시장의 꿀꽤배기로 마침표를 찍는다. 집복헌의 인내가 이현궁의 평온을 거쳐 시장통 상인들의 억척스러운 일상으로 이어지듯, 나의 애기봉과 강화도행 여정도 이 뜨거운 국밥 국물의 온기를 동력 삼아 내일 다시 이어질 것이다. 환경이라는 파도를 타고 넘는 의지의 항해는, 이 시장의 시끌벅적한 응원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 활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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