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서쪽으로 흐르는 의지: 애기봉, 두 한터산이

by 박성기


[제4회] 서쪽으로 흐르는 의지: 애기봉, 두 한터산이 마주 보는 조강(祖江)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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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차의 여정은 서울의 심장부이자 현대 자본의 상징인 논현동에서 시작된다. 세련된 거리 위로 몽골의 침략에 쫓기던 고려 고종의 다급한 마차 소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고 강화로 향하던 조선 왕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시공을 초월해 겹쳐 들린다. 그 가혹한 운명의 길목에서 왕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영문도 모른 채 논밭을 갈다 왕이 되기 위해 끌려갔던 강화도령 철종의 당혹스러운 발걸음 또한 이 길 위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을 것이다.




올림픽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달리는 길, 마포와 가양을 잇는 한강의 물줄기를 마주하며 비로소 도심의 소음이 잦아든다. 강바람에 실려 오는 김포의 유빙은 강화가 머지않았음을 차갑게 알려준다. 한강 하구의 물길은 예나 지금이나 묵묵히 흐르지만, 그 물길이 지켜본 역사는 결코 평탄치 않았다. 외세의 함선이 서울의 심장을 겨누며 거슬러 올라오던 침략의 통로이자,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생존을 위해 건너야 했던 절망의 강이었다.




김포 벌판으로 접어들자 풍경은 한층 투박하고 엄숙해진다. 좁은 국도를 따라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해병 제2사단이 철통같이 지키는 애기봉(愛妓峰)이다. 이곳은 단순한 전망대가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 평양감사와 헤어진 기생 '애기'가 이곳 언덕에서 임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슬픈 전설만이 서린 곳도 아니다. 이곳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짓눌린 개인의 아픔과, 끊어진 민족의 허리를 직시해야 하는 통한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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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 금강산 비로봉 아래 단발령에서 몸을 일으킨 북한강은 317km의 험준한 산길을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태백산 검룡소에서 솟구쳐 394km를 굽이쳐 온 남한강과 마침내 양평 두물머리에서 뜨겁게 합수한다. 이 두 거대한 생명력은 비로소 한강이라는 이름의 대동맥이 되어 서울의 심장을 관통한다. 하지만 여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강은 다시 북한 마식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연천을 통과해 내려온 임진강과 파주 오두산 인근에서 몸을 섞으며, 비로소 조강(祖江)이라는 장엄한 '할아버지 강'으로 거듭난다.




애기봉의 본래 이름은 한터산이다. '크고 넓은 터전'이라는 그 이름의 무게를 되새기며 강 건너 북녘을 바라보다 나는 전율한다. 조강 너머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한 개풍군 땅에도 똑같이 '한터산'이라 불리는 산이 나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조강이라는 하나의 물길을 공유하듯, 산의 이름마저 똑같이 '한터'라 지어 서로를 응시하게 한 것은 대체 누구의 배려였을까.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강은 예로부터 '할아버지 강'이라 불릴 만큼 유속이 완만하고 강폭이 넓어, 남북의 선조들이 배를 띄워 서로 소통하고 조업하던 공동의 터전이었다. 분단의 철책이 세워지기 전, 남쪽 한터산 아래의 어부와 북쪽 한터산 아래의 어부는 같은 강물에 그물을 던졌다. 숭어와 웅어가 물길을 따라 오르내릴 때, 양안의 선조들은 서로의 배를 맞대고 담소를 나누며 풍어를 기원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조강은 경계가 아니라 풍요의 보고였으며, 두 한터산은 안개 자욱한 강 위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다정한 이정표였다.




특히 조강은 서해의 거대한 밀물과 썰물이 민물과 만나 힘을 겨루는 자연적인 조석(潮汐)의 지표 그 자체였다. 강화 앞바다의 거친 조류가 염하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와 조강에 이르면, 강물은 일순간 흐름을 멈추고 거꾸로 치솟아 오른다. 양안의 선조들은 이 물때의 변화를 보고 자연의 섭리를 읽었다. 밀물이 조강을 가득 채울 때 비로소 배를 띄워 북쪽 개풍으로, 혹은 남쪽 김포와 서울로 나아갔다. 조강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시간이 아니라, 바다가 정해준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삶을 운용하던 거대한 시계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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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강 너머에는 개풍군 선적리와 관산포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다. 그 뒤로 개성의 송악산이 남쪽을 굽어보고 있으며, 개풍군 대덕산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 바로 이 조강의 시작점, 임진강의 서쪽 끝점에 휴전선 155마일의 첫 번째 말뚝이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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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에서 내려오는 예성강이 벽란도를 지나 한강까지 합류하여 삼강(三江)이 하나로 녹아 서해로 흘러가는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나는 자연의 순리와 인간의 단절이 빚어낸 거대한 역설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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