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석모도 보문사에서 마주했던 호국의 결기와 대포 삼총사, 그리고 사무실 식구와의 뜨거웠던 연대를 뒤로하고 여정은 서울의 관문을 향해 서행한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전설들—정훈희, 송창식, 함춘호를 마주한다. 이번 여정의 예술적 종착지는 바로 이들의 무대였다.
무대 뒤에서 등장하는 송창식의 모습은 완연한 노인의 풍채였다. 거동은 예전 같지 않았고, 정훈희 또한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만 간신히 마이크 앞에 설 수 있었다. 육신이라는 '환경'은 이토록 잔인하게 거장들의 청춘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함춘호의 기타가 공기를 가르고 송창식과 정훈희가 입을 떼는 순간, 객석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노인의 육신을 뚫고 터져 나오는 송창식과 정훈희의 목소리는 수십 년 전과 다름없는 '노래하는 악기' 그 자체였다. 거칠게 몰아치는 성량과 독보적인 가창은 쇠락해가는 육체라는 환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연장을 압도했다. 그것은 노래라기보다, "나의 늙지 않았다"라고 온몸으로 포효하는 영혼의 사효(辭曉)였다. 평생을 무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벼려온 명인의 집념.
나는 그 절창 속에서 내가 강화도 조강에서 보았던 멈추지 않는 물줄기의 생명력을 발견했다. 예술은 결국 노쇠조차 뚫고 지나가는 가장 날카로운 의지의 창임을, 정훈희와 송창식의 목소리가 증명하고 있었다. 이시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신기가 그들을 빛나게, 그들보다 더 값지게 빛나기도 하였다.
감동의 여운을 안고 발길을 옮긴 곳은 가락시장의 밤이다. 광장시장에서 시작된 시장의 서사는 이제 가락시장의 순대국 한 그릇으로 귀결된다. 이곳엔 하루 매출 3천만 원을 훌쩍 넘기는 순대국집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성공의 숫자이겠으나, 내 눈에는 그 숫자가 3,000번의 뚝배기를 불 위에 올리고 고기를 썰어낸 상인의 굽은 손마디로 읽힌다. 하루도 빠짐없이 펄펄 끓는 가마솥 앞을 지켜낸 그 지독한 '성실'이 아니었다면 결코 닿을 수 없는 고지다.
3천만 원 매출은 '땅을 지탱하는 의지'다. 송창식, 정훈희의 노래가 하늘을 향한 예술적 투혼이라면, 순대국 한 그릇은 민초들의 밑바닥 의지의 승리다. 보문사에서 군 생활을 하며 지켰던 서해의 평화가, 이 시장의 억척스러운 활기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마침내 여정의 종착지인 잠실 123층 롯데월드타워 아래에 선다. 밤하늘의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저 거대한 마천루를 올려다보며, 나는 전설적 가수들의 목소리와 가락시장의 순대국 김을 동시에 떠올린다. 123층이라는 압도적인 높이는 대한민국이 가난과 절망이라는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세워 올린 의지의 금자탑이다. 종로의 낮은 지붕에서 시작된 우리의 걸음이, 창덕궁의 비극과 강화의 호국 정신을 지나, 기어이 이 하늘 끝에 닿았다.
잠실에서 나는 이 여정의 모든 조각을 하나로 섞는다.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무대에 섰으나 끝내 포효하던 가수들의 절창이 123층의 높이와 겹쳐지고, 가락시장 순대국집의 끓는 가마솥 열기가 마천루의 화려한 조명과 하나가 된다. 결국 세상의 모든 '높이'는 바닥에서의 '성실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환경은 우리의 육신을 노인으로 만들고 삶을 섬에 가두려 하지만, 노래하는 영혼과 3,000그릇을 말아내는 손길, 그리고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건축물의 의지만큼은 결코 꺾을 수 없다.
나의 "THE BUCK STOPS HERE"의 한 장(章)이 이렇게 마무리된다. 잠실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을 보며 나는 미소 짓는다. 내일의 해는 다시 뜰 것이고, '환경이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신념은 오늘 이 잠실의 마천루 꼭대기를 바라보며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