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재능이 없어서 슬퍼하는 당신에게.
성실함은 시간을 요구한다. 성실의 뜻은 '정성스럽고 참됨'이라는데, 여기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꾸준함을 바탕으로 한 기다림이다. 그래서 성실한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다. 인내를 겸비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그게 내가 성실한 사람을 편애하는 이유다.
어제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읽었던 책 <마음을 비워둘게요>에 나오는 구절이다. 요즘 자주 읽는 자기 계발서들의 다그침에 지쳐있었기에 조금 편한 마음으로, 가볍게 읽고 싶어서 제목만 보고 대충 선택한 책이었다. 잠깐만 읽다 말아야지 했던 것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아이들 재울 시간도 미루고 단박에 한 권을 읽어버렸다. 한 권을 몽땅 다 내 마음에 담아두고 싶을 만큼 잔잔한 여운이 남는 책이었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건 '성실'이라는 한 단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실하다는 칭찬을 듣고 자랐다. 그게 좋아서 맡겨진 일을 더 열심히 했고 그럴수록 더 칭찬받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든 어느 순간부터 그 성실하다는 칭찬의 말이 달갑지가 않았다. 마치 '딱히 특별한 재능은 없지만, 성실은 하다'라는 전제조건이 달려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노래를 잘하고 또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린다. 손재주가 좋거나 운동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누구든 자기만의 재능,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어떤 특별함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어떤 칭찬을 해주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에게 붙이는 수식어가 바로 성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정말 뭔가를 뛰어나게 잘하고 싶고, 그 재능으로 칭찬을 받고 싶은데 도통 그것들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 부모님은 '성실'과 '정직'을 무척 강조하며 나와 동생을 키우셨다. 나에게 성실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그냥 당연스레 갖춰야 하는 기본소양과 같은 것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실함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나 당연히 갖춰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으로 칭찬을 받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조직에서 존재감이 그다지 크지 않은, 개성 없는 아무개에게 '그래, 그 친구가 성실은 하지' 라며 의미 없이 건네는 수준일 텐데. 이런 생각이 젊은 날의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크게 없다. 그저 건강하고 밝게만 자라 주는 것. 살다 보니 꼭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성공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에 공부에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성공한 삶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엄마표 영어로 홈스쿨링을 하고 있지만 딱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그만큼 만이다. 하루 영어동화책 한 권, 영어 동영상 한 편. 그마저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강요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많이 내려놓고 자유롭게 키운다 생각하는 나도 가만 생각해보면 엄격한 구석이 있다. 바로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어른들에게 공손하게 대하고 예의 없이 행동하지 않을 것,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말 것, 정직할 것, 그리고 나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것 등이다. 내가 부모님에게 배웠던 딱 그대로다. 한 번 하기로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은 지켜야만 한다. 내가 놀고 어지른 방은 자기 전에라도 꼭 정리해야 한다. 내가 아이를 가장 많이 혼내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나도 우리 엄마, 아빠처럼 아이에게 '성실함'을 당연스레 요구하며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칭찬받아야 할 것보다는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제 만났던 책은 그것이 아닐 수도 있노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또 내 마음에 와닿은 한 구절은 바로 이 것이다. '열심도 능력이고 재능이야. 열심을 안 내는 게 아니라 못 내는 거야. 열심이라는 재능이 없는 사람도 있어."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살면서 한 번도 열심을 재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성실과 열심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내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고, 성실한 사람은 주어진 일에 열심이다. 나도 이 책의 작가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선을 그었을 뿐이다. 그런데 열심을 안 내는 게 아니라 못 내는 거라니. 이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지.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도 이 말이 내내 내 마음을 울렸다.
성실함도 하나의 능력이고 재능이다. 꾸준함을 바탕으로 한 기다림. 이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제야 되새겨 본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을 수없이 책임지며 살아간다. 그것은 새벽 기상처럼 나 스스로와의 약속일 수도 있고, 우리 가정에 태어난 아이를 책임지고 맡아 양육해야 하는 부모로서의 역할일 수도 있다. 혹은 직장에서 맡은 업무, 더 나아가서는 이 나라의 국민, 이 땅을 살아가는 지구인으로서의 소임일 수도 있다. 나에게 주어진 이 것들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고 참되게, 꾸준히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힘들고 지쳐서 다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의 감정과 마음의 상태에 상관없이 끝까지 해내는 사람들은 드물다. 어떤 환경에서도 올곧은 내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참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성실 혹은 열심도 능력이고 재능이라는 말이 나왔으리라.
성실한 거 말고는 딱히 잘하는 게 없어서 힘들고 속상했을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살아가면서 꾸준히 성실하기란 너무나 어렵노라고. 그것이 너의 재능이고, 능력이고, 자산이라고 말이다. 오늘도 성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더는 그 말이 의미 없는 빈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내가 살아왔던 인생과 내 삶의 태도에 대한 최고의 인정의 말이라는 것을 알겠다. 앞으로도 성실하고 싶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내 곁에 두고 오래오래 보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