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연수원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 차 안에서는 호연지기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빠들의 육아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고, 예능 프로그램만 틀어도 살림 고수 남편들이 넘쳐나는 21세기 최첨단 시대다. 하지만 우리 집 거실에는 여전히 1988년 쌍팔년도에 머물러 있는 '냉동 인간' 한 분이 살고 계신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근무하는 병원에서 비슷한 또래의 사내 커플가족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행정직원들까지 다양한 직군의 가족들이 모인 자리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남편들의 육아와 가사 참여도'로 흘러갔다. 다른 집 남편들은 퇴근 후 애들 목욕은 기본이고 재우는거 , 아침 저녁으로 무슨 요리를 한다느니, 음쓰기계가 있어 행복하다는 남편에, 쓰레기 분리수거는 당연히 본인 담당이라느니 하며 일상적인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평소 같았으면 입으로라도 한몫 단단히 거들었을 우리 집 남편에게 갑자기 원인 모를 '실어증'이 찾아왔다.
본인도 양심이라는 게 세포 단위로나마 남아있긴 했던 모양이다. 동급의 다른 집 남편들이 줄줄이 늘어놓는 살림 스펙 앞에서 본인의 처참한 참여도가 내심 찔렸는지, 그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조용히 허공만 응시하며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남편을 통틀어, 육아와 살림 참여도가 가장 바닥을 치는 최하위 포식자가 바로 내 남편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집 남편들의 활약상을 내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고, 그 옆에서 쥐 죽은 듯 앉아있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참담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내가 무거운 적막을 깼다. 분노를 터뜨리거나 엉엉 울며 서러움을 토해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텅 빈 목소리로 체념하듯 툭 내뱉었을 뿐이다.
"나... 참 등신처럼 살고 있더라."
그리고는 아주 건조하고 차분하게, 오늘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다른 집 아빠들과 당신의 처참한 비교표를 짚어주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체념 어린 아내의 목소리에 아까 연수원에서의 침묵을 이어가며 "미안해, 내가 더 노력할게"라고 해야 정상일 텐데.
아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고 입을 꾹 닫고 있던 인간이, 단둘이 남은 차 안이 되자 갑자기 숨겨둔 호연지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
"내가 노름을 했냐, 바람을 피웠냐, 폭력을 썼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지금이 대체 어느 시대인데 저런 소리가 당당하게 나오지? 도박 안 하고, 딴살림 안 차리고, 마누라 안 때리는 건 '좋은 남편의 기준'이 아니라 그냥 '경찰서에 안 갈 범법자가 아닌 기준' 아닌가?
범죄자만 아니면 본인이 아주 훌륭한 가장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저 기적의 잣대 앞에, 나는 분노를 넘어선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남편은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완벽하고 순수한 쌍팔년도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복장이 터지고 열이 뻗쳐서 침대 위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내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 한 줌의 재가 되어가고 있는데, 거실소파에서는 본인의 억울함(?)을 시원하게 토해내고 이미 기절한 남편의 웅장한 코골이 사운드가 온 집안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드르렁~ 푸우우~ 컥! 드르렁~"
참으로 평화롭고 뻔뻔한 영혼이다. 그래, 범죄 안 저지르고 무사히 주무셔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화석 같은 양반아. 나는 오늘도 천장을 뚫을 듯한 그의 코골이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 억울함을 낱낱이 활자로 기록해 전 세계에 폭로하리라 다짐하며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