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쌍팔년도 남편의 3대 면죄부와 기적의 뇌

부제: 연수원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 차 안에서는 호연지기

by 환불포기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빠들의 육아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고, 예능 프로그램만 틀어도 살림 고수 남편들이 넘쳐나는 21세기 최첨단 시대다. 하지만 우리 집 거실에는 여전히 1988년 쌍팔년도에 머물러 있는 '냉동 인간' 한 분이 살고 계신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근무하는 병원에서 비슷한 또래의 사내 커플가족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행정직원들까지 다양한 직군의 가족들이 모인 자리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남편들의 육아와 가사 참여도'로 흘러갔다. 다른 집 남편들은 퇴근 후 애들 목욕은 기본이고 재우는거 , 아침 저녁으로 무슨 요리를 한다느니, 음쓰기계가 있어 행복하다는 남편에, 쓰레기 분리수거는 당연히 본인 담당이라느니 하며 일상적인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평소 같았으면 입으로라도 한몫 단단히 거들었을 우리 집 남편에게 갑자기 원인 모를 '실어증'이 찾아왔다.
​본인도 양심이라는 게 세포 단위로나마 남아있긴 했던 모양이다. ​동급의 다른 집 남편들이 줄줄이 늘어놓는 살림 스펙 앞에서 본인의 처참한 참여도가 내심 찔렸는지, 그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조용히 허공만 응시하며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남편을 통틀어, 육아와 살림 참여도가 가장 바닥을 치는 최하위 포식자가 바로 내 남편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집 남편들의 활약상을 내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고, 그 옆에서 쥐 죽은 듯 앉아있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참담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내가 무거운 적막을 깼다. 분노를 터뜨리거나 엉엉 울며 서러움을 토해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텅 빈 목소리로 체념하듯 툭 내뱉었을 뿐이다.
​"나... 참 등신처럼 살고 있더라."
​그리고는 아주 건조하고 차분하게, 오늘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다른 집 아빠들과 당신의 처참한 비교표를 짚어주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체념 어린 아내의 목소리에 아까 연수원에서의 침묵을 이어가며 "미안해, 내가 더 노력할게"라고 해야 정상일 텐데.


아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고 입을 꾹 닫고 있던 인간이, 단둘이 남은 차 안이 되자 갑자기 숨겨둔 호연지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


​"내가 노름을 했냐, 바람을 피웠냐, 폭력을 썼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지금이 대체 어느 시대인데 저런 소리가 당당하게 나오지? 도박 안 하고, 딴살림 안 차리고, 마누라 안 때리는 건 '좋은 남편의 기준'이 아니라 그냥 '경찰서에 안 갈 범법자가 아닌 기준' 아닌가?
​범죄자만 아니면 본인이 아주 훌륭한 가장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저 기적의 잣대 앞에, 나는 분노를 넘어선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남편은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완벽하고 순수한 쌍팔년도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복장이 터지고 열이 뻗쳐서 침대 위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내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 한 줌의 재가 되어가고 있는데, 거실소파에서는 본인의 억울함(?)을 시원하게 토해내고 이미 기절한 남편의 웅장한 코골이 사운드가 온 집안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드르렁~ 푸우우~ 컥! 드르렁~"
​참으로 평화롭고 뻔뻔한 영혼이다. 그래, 범죄 안 저지르고 무사히 주무셔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화석 같은 양반아. 나는 오늘도 천장을 뚫을 듯한 그의 코골이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 억울함을 낱낱이 활자로 기록해 전 세계에 폭로하리라 다짐하며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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