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영수증의 바이탈 사인을 지키는 사나이

원무과 직원의 선택적 동면과 내과 과장님 빙의 사건

by 환불포기

​결혼 초기, 우리 집의 수면 생태계는 아주 명확하게 양분되어 있었다. 나는 머리만 대면 1초 만에 기절하는 훌륭한 ‘잠만보’였고, 남편은 나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에너자이저’였다. 수면의 양과 질 모두 내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던, 참으로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 첫째 아이가 태어나자 우리 집 수면 생태계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남편의 인체 시계가 신생아로 퇴행해 버린 것이다.

​육아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 누구나 만성 피로에 시달린다지만, 남편의 증상은 학계에 보고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눕기만 하면 ‘레드썬!’ 깊은 숙면에 빠져들었다. 새벽마다 아이가 앙앙 울며 사이렌을 울려대도, 남편의 고막에는 최첨단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라도 탑재된 것인지 미동조차 없었다.


​병원 밥 먹은 지 어언 10년 차, 초음파검사로 숱한 환자들을 만나며 단련된 내 강철 체력도 매일 밤 이어지는 강제 철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밤중 수유와 기저귀 교체는 오롯이 깨어있는 자, 즉 나의 몫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남편이 퇴근해오면 단 30분만이라도 자서 팬더에서 사람으로 환생해야겠다맘먹고 있던 참이었다. 천진난만한 남편이 아주 진지하고도 부러움이 가득 찬 얼굴로 운을 뗐다.

​"현미야. 우리 병원 내과 박과장님댁 말이야. 거기는 애기가 태어나니까, 사모님이 과장님 잠 못 주무실까 봐 아예 다른 방 가서 편하게 자라고 하셨대. 대단하지 않아?"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밤중 수유를 거들어주기는커녕 애 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지금 저런 밑밥을 깐단 말인가? 어이가 가출을 하다 못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나는 침착하게 그의 직무 기술서를 머릿속으로 읊어보았다.

​'아니, 내과 과장님이야 다음 날 환자들 생사를 오가는 진료를 보셔야 하니까 그렇다 치고. 자기는 원무과 행정 직원이잖아! 뭐, 밤새 영수증이 숨 넘어갈까 봐 철야로 바이탈 사인이라도 체크해야 돼? 가계부 붙들고 심폐소생술 하실 일 있냐고!'

​차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고,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어버리기로 했다. 그래, 매일같이 쏟아지는 영수증의 생명을 다루는(?) 고된 업무를 하시느라 저리 피곤하신 게지. 내과 과장님의 청진기와 당신의 엑셀 마우스 클릭이 동급의 무게를 가진다니, 그 투철한 직업의식 하나만큼은 높이 사주마.


​더 기가 막힌 것은 인체의 신비다. 그 극한의 육아 시기를 지나 아이들이 어느덧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이 되고 나니, 남편의 수면 시간이 귀신같이 다시 줄어들었다. 애들 손이 가장 많이 가고 육아가 극한 직업이던 그 시절, 남편의 몸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선택적 동면'에 들어갔던 게 분명하다. 생물학적 본능 앞에 진화해 버린 이 남자의 생존 전략을 어찌 탓하랴.

​이 어이없는 깨달음 앞에서 나는 화내는 것을 포기했다. 기대감을 바닥까지 낮추니 분노할 일도 사라졌다. 얄밉지만 어딘지 모르게 투명한 이 남자의 만행을 관찰하며, 나는 오늘도 혼자 큭큭 웃는 걸 선택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결국, 화내기를 포기하고 웃기를 선택한 자가 승리하는 한 편의 엉뚱한 시트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