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거대 얼음팩의 저주와 안방의 중력장

턱뼈가 부서져도 깰 수 없는 낮잠의 세계: "얼음팩 큰 것밖에 없는데..

by 환불포기

​우리 집 안방 침대에는 아주 강력한 중력장이 흐른다. 한번 누우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마의 구간. 특히 주말 대낮이 되면 남편은 그 중력장에 완벽하게 포획되어 노곤노곤한 낮잠의 세계를 유영하곤 했다.
​반면, 에버랜드 판다 월드의 푸바오와 눈 밑 다크서클 지분을 놓고 치열하게 종단합을 다투던 나는, 쉴 틈 없이 아이와 육아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첫째 아이가 두세 살쯤 되어 한창 비글처럼 에너지가 폭발하던 평화로운 어느 주말 낮이었다.
​비극은 늘 예고 없이 순식간에 찾아온다. 신나게 방방 뛰며 날아오르던 아이의 단단한 머리통과 내 턱이 공중에서 정면충돌하고 말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다행히 가해자(?)인 아이는 멀쩡해 보였지만, 피해자인 나는 턱이 산산조각 난 것 같은 엄청난 고통에 바닥을 뒹굴었다. 턱이 얼얼하다 못해 감각이 없어졌고, 억울하고 아픈 마음에 입 밖으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끅끅대며 굵은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의 생존 본능은 누워있는 유일한 성인 보호자를 향했다. 병원 초음파실에서 수많은 환자의 케이스를 보며 다져진 내 임상 경험상, 이것은 무조건 1초라도 빨리 냉찜질을 해야만 하는 각이었다. 나는 턱을 부여잡고 남편다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침대와 한 몸이 되어있는 남편을 향해 모기장만 한 목소리로 다급한 구조 요청을 보냈다.
​"오빠.. 나 방금 솔이랑 턱 세게 부딪혔어... 냉동실에서 얼음팩 좀..."
​그런데 내 간절한 구조 신호를 수신한 남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 턱의 통증마저 일순간 잊게 만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남편은 감긴 눈을 반쯤 겨우 뜨더니, 침대 껌딱지 모드를 굳건히 유지한 채 세상 귀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지... 우리 집에 얼음팩 큰 것밖에 없는데..."
​순간 내 뇌로 가는 혈류가 멈추는 기분이었다. 아니, 얼음팩이 크면 턱에 못 대나? 턱에 대기엔 규격 초과라서 불법이라도 된단 말인가? 원무과 행정직원 아니랄까 봐, 집구석에서도 비품 규격이 안 맞으면 불출이 안 되는 시스템인가?


​어떻게든 저 따뜻한 이불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오고 싶지 않다는 그 투명하고도 얄팍한 의지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마누라의 턱뼈에 금이 가는 것보다, 본인의 노곤한 낮잠 리듬이 깨지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더 끔찍한 재난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날, '규격 초과'를 이유로 남편의 승인을 받지 못해 얼음팩을 배급받지 못한 나의 턱에는, 볼을 타고 입술까지 이어지는 아주 웅장하고 시퍼런 멍이 활짝 피어올랐다. 거울을 볼 때마다 멍든 턱이 욱신거렸지만, 한편으로는 안방의 그 강력한 중력장을 이기지 못해 지어낸 변명이 고작 "큰 것밖에 없는데"였다는 사실이 떠올라 자꾸만 픽픽 새는 헛웃음이 났다.


​그래, 내가 졌다. 분노를 터뜨리기엔 남편의 핑계가 너무 하찮고 창의적이라 화낼 기력조차 상실해버렸다. 이토록 엉뚱하고 게으른 남자와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가려면, 내 턱에 얼음팩을 대는 대신 마음에 유머라는 맷집을 두껍게 두르는 수밖에 없다. 오늘도 우리 집 안방의 중력장은 평화롭게 작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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