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그저 필수 발급 '민증'일 뿐
"내 밥은 신경 쓰지 마. 알아서 먹을게."
이 대사를 남들이 듣는다면, 일하고 공부하며 육아까지 하는 아내의 가사 노동을 덜어주려는, 요즘 시대에 걸맞은 아주 바람직하고 배려심 넘치는 남편의 멘트라며 박수를 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이 달콤한 말은 아주 기가 막힌 시트콤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남편이 내게 '밥을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정말 철저하고도 순수하게 '본인 밥' 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한창 밥풀을 흘리며 우당탕탕 밥을 먹는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두 아이들의 저녁을 챙기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다.
저녁 시간이 돌아오면, 그는 쿨하게 선언한다.
"난 나중에 먹고 싶을 때 먹을 테니까, 너희들끼리 먼저 먹어."
그러고는 씻지도 않은채 쇼파에 누워 숏폼질을 하다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진다. 아이 둘이 식탁에서 재잘거리며 한바탕 전쟁 같은 식사를 하는 동안, 이 집의 가장은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수면 상태를 유지한다. 병원 원무과 행정 업무가 고단한 것은 알겠지만, 퇴근 후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보고 있자면 이 남자가 가정이 있는 유부남인지, 자유로운 영혼의 독거남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진짜 기가 막힌 건 밤이 깊어질 때다. 애들도 다 재우고 집안이 고요해진 심야 시간, 우리 집에는 어김없이 야행성 맹수 한 마리가 깨어난다. 그는 부스럭부스럭 주방을 배회하며 혼자 밥을 챙겨 먹고, 과자 봉지를 뜯고, 넷플릭스를 켠 채 유유자적한 혼자만의 심야 파티를 즐긴다.
그러다 결국 TV 화면을 자장가 삼아 켜놓은 채 다시 잠이 든다. 이 기괴한 사이클을 볼 때면 가끔 진지한 의문이 든다.
'저럴 거면 도대체 왜 결혼을 한 거지? 그냥 혼자 편하게 살지.'
가만히 그의 행적을 분석해 보다가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남편에게 아내와 아이들이란, 마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갑 속에 품고 다녀야 하는 '주민등록증' 같은 존재가 아닐까?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소지해야 한다니까 일단 발급(결혼과 출산)은 받았는데, 지갑 속에 잘 꽂혀 있는 것만 확인하면 그걸로 끝인 거다. 굳이 매일 꺼내서 대화를 나누고, 밥을 같이 먹고, 일상을 촘촘히 나눌 필요도 없이 그저 "나도 가족 있어! 내 지갑(집)에 잘 있어!" 하고 안심하기 위한 필수 소지품 말이다.
어느 날 밤, 거실에 홀로 앉아 넷플릭스 조명 아래서 과자를 씹으며 잠든 그의 둥근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내가 바로 이 집안의 1급 국가 신분증이구나. 남편의 지갑 속에서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될 아주 소중하고 확실한(?) 필수템.
주민등록증이 어찌 주인을 탓하랴. 그저 묵묵히 지갑 속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오늘도 나는 거실에 널브러진 빈 과자 봉지를 치우며, 분노 대신 어이없는 헛웃음을 선택했다. 그래, 기대를 안 하니까 편하긴 하다. 적어도 밥 차려 달라고 투정 부리는 삼식이는 아니니, 이 '배려심 넘치는 독거남'의 심야 파티를 기꺼이 눈감아 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