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의 사회생활

회사후소(繪事後素) 4. 고대 그리스의 도덕 정서, 휴브리스

by 생강도넛


아테나가 지혜와 공예의 신답게 아울로스라는 겹피리를 발명했다. 악기의 소리가 가히 아름다웠지만, 연주를 하려면 입 안에 공기를 머금어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게 해야 했다. 그런 외관이란, 신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았기에 아테나는 악기를 숲에 아무렇게나 버렸고, 마르시아스가 주웠다. 마르시아스의 음악적 역량이 출중했나 보다. 그는 음악 선생도 없이 홀로 아울로스 연주를 터득하고 연마하여 듣는 이의 영혼을 홀리고 시름을 잊고 춤을 추게 만들었다. 숲의 모든 존재들, 님프와 사티로스와 동물과 식물과 강물과 바람이 마르시아스의 연주에 매료되었다. 님프들이 "네 아울로스가 아폴론님의 리라보다 낫다."라고 추켜 세우자, 한껏 경도된 마르시아스는 제 발로 아폴론을 찾아가서 대결을 신청했다. 아폴론은 이긴 자의 뜻대로 하기라는 조건을 내걸고 대결에 응했다. 음악의 신 무사이⁵가 심사위원을 맡았다. 대결이 시작되었는데, 누가 들어도 마르시아스의 연주가 탁월했다. 체통이 완전히 구겨지게 생긴 아폴론이 2라운드를 요구했는데,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하면서 동시에 노래도 하자고 제안했다. 아울로스는 피리라서 그런 연주가 불가능했다. 마르시아스는 그제야 자신이 신의 분노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패배를 자청하며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시작은 마르시아의 마음대로 했어도 마무리는 아폴론의 소관이었다. 아폴론은 그를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고 그 가죽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죽에서 피리 소리와 흡사한 소리가 났는데, 듣노라면 슬픔이 묻어났다고도 한다. 무사이와 숲의 모든 존재들이 마르시아스가 형벌을 받을 때 안타까워하며 흘린 눈물과 마르시아스의 피가 모여 강이 되었고 그 강이 지금도 흐르는 마르시아스강 ¹이라고 한다.


아티스는 대지의 신 키벨레에게 헌신해 왔다. 그러던 중 청년은 사랑하는 여성(인간)과 결혼식을 올렸다. 키벨레는 결혼식에 광기를 풀었고, 아티스는 광기에 사로잡혀 스스로 거세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메두사의 직업은 아테나 신전의 사제였다. 넘실대는 밤색 머릿결에 몹시도 아름다워서 구혼자도 많았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아테나의 신전에서 메두사에게 성폭행을 범했고, 아테나는 자기 신전이 더럽혀졌다며 매우 분노했다. 그런데, 이 분노는 엉뚱하게도 메두사를 향했다. 지혜의 신은 메두사의 고운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을 전부 독사로 만들고도 분이 안 풀려,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인간이든 신이든 동물이든 누구나 돌로 변하는 저주를 내렸다. 그 저주를 내린 아테나 역시 메두사와 눈이 마주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재미있게 읽고 보았던 그리스 신화의 에피소드들입니다. 나는 이 에피소드들을 인간에 대한 신의 태도와 처우에 관심을 두고 간단하게 다시 써보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참으로 매정하고 이기적입니다. 메두사는 분명 피해자인데 인간 사회에서 살 수 없는 괴물이 되었습니다.² 그것도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참아낼 수 없는 자아로 말이지요. 아티스의 파국도 터무니없고 파괴적이기만 합니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마르시아스 역시 자비와 용서를 얻지 못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신들이 인간에게 가한 처분이 엉뚱하고 사리에 맞지 않고 난폭해 보입니다. 마르시아스, 메두사, 아티스만 겪은 일이 아닙니다. 악타이온, 에코, 카산드라, 시시포스, 이오, 세멜레, 히폴리투스, 다내, 칼리스토, 오이디푸스 등 그리스 신화의 70퍼센트 이상이 신들의 변덕과 질투에 인간의 운명이 흔들리고 삶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에피소드로 차있습니다.³


그러나 우리의 의문과 거부감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신들을 경외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일단 시대적 거리를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삼천 년 전 에게해 인근에서 살던 그들의 세계관은 21세기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것과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아르고 원정대(그리스 신화의 일부)만 하더라도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부터 회자되기 시작했고, 글로 처음 기록된 것도 기원전 8세기 경⁴으로 추정됩니다. 그 옛적 사람들의 통념과 관습과 일상을 서기 21세기 사람의 입장에서 해석하기보다는 원래의 쓰임에 먼저 집중해야 사태 파악이 될 것 같습니다. 현대의 안경을 벗고 다정한 눈길로 고대인들이 세상을 이해했던 방식을 한 번 보자구요.


현재 우리는 크리스트교적 신관과 현대적 인권 개념이라는 두 가지 거대한 틀 안에서 세상을 봅니다. 우리가 무신론자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졌더라도, 중세와 근대 유럽의 가치관을 평정한 뒤 현대에 와서 인류에게 보편적 가치관로 자리 잡은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신은 완전하고 선하며 온전한 사랑'이라는 크리스트교적 전제가 현대 인류의 보편적 양심과 민주적 가치,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기저가 된 사실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오욕칠정을 고루 누리는 고대 그리스 신들을 보며 우리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요.


고대 그리스 신들은 크리스트교의 신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절대선과 도덕적 모범이 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박애와 용서보다는 우주의 질서와 힘과 불멸과 권능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탁월함은 사랑과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고 살면서 사람이 컨트롤할 수 없는 세계, 그러니까 번개와 죽음과 파도와 폭풍우와 전쟁과 전염병과 운명과 공동체와 감정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힘에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들의 분노와 질투와 변덕과 편애는 신의 결점과 단점이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현실⁵이었습니다. 신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도덕 감정에 맞춰 일관되게 처신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신들 앞에서 선 인간은 그들로부터 보호받기보다는 신들의 힘이 교차하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한계가 있는 존재일 나름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통스럽고 불공평한 인생과 세상을 신들의 개입과 치정과 욕망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했으므로, 신들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혹한 형벌과 변덕스러운 애정 행각 등을 비난하고 이상하게 여기기보다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인간이 갖춰야 할 예우와 경외심에 주목했습니다. 신의 처신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질서이자 생존을 위해 달래야 하는 거친 힘인 신들에게 저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사람들에게 선량함과 도덕성보다는 인간 한계를 인식하고 신들 앞에서 인간의 분수에 맞는 선택을 요구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 중국에서 살던 사마천은 마음에 스며든 고민을 '사기'의 앞부분에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짧게 줄였습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고 말하지만,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들인데 의를 지키다 굶어 죽었고, 공자의 제자 중 유일하게 학문을 좋아했던 안연은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가 젊어 죽었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 도척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쳐 먹을 정도로 악랄했지만 천수를 누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과 운명을 이해하기가 이다지도 어렵고, 양심과 선량함이 복의 근원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식과 처신이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메두사와 마르시아스 등이 겪은 비극을 신의 탓이 아닌 질서를 따르지 못한 사람의 잘못으로 봤어요. 인간은 신들의 결정 앞에서 제 한계를 알고 선을 넘지 않으며 조화를 지켜내는 도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중용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고, 비겁과 무모함 사이에서 용기를 내고, 인색과 낭비 사이에서 절제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중용이었습니다.


중용의 덕이 지고의 가치였던 만큼,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과신하고 감히 신이 정한 한계와 운명을 넘어서려는 것을 휴브리스- 오만이라고 하여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휴브리스는 천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고대 그리스 문화권에서 종교적, 사회적, 법적 금기였어요. 중용의 덕은 매 순간 휴브리스라는 금기의 선을 넘지 않도록 제 자신을 검열하는 일이었습니다. 중용의 선을 넘어 휴브리스를 저지르는 것은 신의 우주적 질서를 파괴하려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자부했는데, 휴브리스는 야만인과 짐승의 행위로 여겼습니다. 휴브리스는 막연히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법적 처벌 대상인 범죄이기도 했습니다. 아테네의 솔론의 법에는 타인을 모욕하거나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휴브리스의 잘못을 묻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휴브리스는 강력한 금기로 작동했지만,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폴리스 시대 막바지(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정복과 원정 직전)까지 중용은 공동체 속에서 조화와 실천에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시민으로서 도덕정 완성과 정치적 역할을 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중용을 갖춘 시민들이 폴리스를 지탱해야 국가가 안정적이라고 봤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윤리로서의 중용 역시 폴리스에서 시민끼리의 관계에서 이성적 합의와 실천적 지혜를 근거로 한 중용이었습니다. 그런 중용을 아는 시민을 키우는 것은 폴리스의 의무라고 봤습니다. 중용과 휴브리스가 기계적, 산술적으로 계량될 리가 없습니다. 대상과 시간과 장소와 사건과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적절한 지점이었지요. 휴브리스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는 덕목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이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휴브리스를 삼가 중용을 이루는 삶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덕, 아레테(Arete)의 실천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은 그리스 문화권의 폴리스 체제를 붕괴시키고 제국을 등장하게 했습니다. 기원전 4세기 에게해와 지중해 일대에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4-1세기)가 도래했습니다. 제국이라는 정치 시스템은 폴리스와는 달라서 개인의 정치 참여가 무색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부 세계보다 내면의 평화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적, 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던 휴브리스와 중용 역시 개인적 차원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중용과 휴브리스는 혼란한 세상에서 내 마음 하나 다치지 않고 지키는 일에 치중하는 자기 구원적 성격으로도 흔하게 이해, 해석되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시아 (부동심), 에피쿠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평정심)이 이런 배경 가운데 철학의 뼈대를 갖추고 역사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역사 내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휴브리스를 경계하고 인간의 한계를 지키는 중용이 사회의 핵심 가치 기준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코로스(koros, 과도한 번영)와 풍요에 취하면 휴브리스(Hubris, 오만)가 찾아와 아테(ate, 판단력)가 흐려져 메소테스(mesotes, 중용)의 도를 흩트리게 되고 결국 신으로부터 네메시스(nemesis, 복수)를 당하게 되는 이치는 그리스 비극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내용입니다. 대중문화에는 그 공동체의 가치와 정의와 감정이 깊이 배어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즐겨 찾던 연극에서 휴브리스가 압도적으로 다뤄지는 주제와 소재라는 점은 이 도덕 정서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휴브리스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족 1:

고대 근동과 중동에 있던 지역 종교들은 신앙과 종교라고 불리며 역사에 남았지만, 어째서 고대 그리스 종교는 신화라고 불리고 있을까요? 서기 30-40년 정도에 출발한 크리스트교의 가장 큰 라이벌은 고대 그리스의 신들⁶이었습니다. 종교관은 초월적 질서로 사람의 내면에 자리잡고,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장착시켜, 세상의 의미를 재구성하지요. 이 렌즈는 만물에 작동하여 사람의 가치, 삶의 의미, 문화, 도덕 등 고유한 풍습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사유를 구조화하고 문화를 만들어 왔죠. 그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권 안에서 세를 불리기 위해, 그리스의 종교의 힘을 무력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초기 크리스트교 사람들은 그리스 신들을 타락한 악마로 규정했습니다.


서기 392년에 세상이 완전히 뒤집혀서,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그리스 로마신들 신앙을 엄금했어도,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그리스 일대 사람들은 꾸준히 그 신들을 섬겼고, 9세기가 되어서야 고대 그리스 신들은 크리스트교에 완전히 흡수되었습니다.


중세 크리스트교는 에우헤메리즘⁷을 활용해 그리스 신들의 신성을 제거하고 역사나 허구의 이야기로 변형시켰습니다. 그리스 신들의 온갖 부도덕한 이야기는 우화로 활용되어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사람들에게 교화시키는 알레고리가 되어 갔습니다. 한편으로는 헤르메스와 제우스의 이미지를 예수의 초기 예술에 차용하고, 유럽 토속신들의 축제일을 기독교 명절로 바꾸었습니다. 크리스트교의 꾸준한 작업 끝에, 고대 그리스 종교는 살아있는 신앙에서 생명력을 잃은 서구 문화의 지적 자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명칭도 신화로 박제되었습니다. 근현대를 거치며 신화의 에피소드들은 노동과 예술에 대한 비유, 심리학적 통찰, 인간 소외 현상, 남성 (남근) 중심 사상, 자연에 대한 공포와 경외심, 문명의 충돌과 변화 등으로 재해석되고 문학과 공연과 예술의 단골 소재가 되어 재생산되었습니다.


사족 2: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의 세상은 인간 세상의 원형이었습니다. 신들이 결혼하고 권력과 위계를 짓고 있는고로, 인간도 결혼하고 신분제도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현재 우리에게는 재미나고 기상천외한 이야기 묶음이지만, 고대인들에게는 삶의 지침서 구실도 했습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고대인들은 신적인 모델을 모방해야 사물이 실재성을 가지게 된다⁸고 믿었다'고 설명했습니다다. 이런 것이죠. 여자와 남자가 만나고, 아이를 낳고,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만들고, 감정에 소용돌이치는 것이 태초에 신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인간도 그렇게 한다라고, 신적인 근거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성별과 결혼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우주적 근거였습니다. 신화에서 신들과 영웅들을 소개할 때 누구의 손녀, 어느 신의 아들, 무슨 혈통 등 족보와 가족 관계에 공을 기울였던 이유가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현대의 신앙인이 "인간이 외로우니까, 신이 가족을 만들어 주었다!" 라고 한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이 결혼하고 조화롭게 사니까,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오! 하늘에서 이룬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¹ 튀르키에의 아이딘(Aidin) 지역에 있다.

현재 이름은 치네(Çine Çayı). 뷔이크 멘데레스(Büyük Menderes) 강의 지류 중 하나이다.

디나르 수(Dinar Su)지역이 마르시아스강의 원류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² 다양한 버전이 있다. 메두사가 제 아름다움을 과신한 나머지, 자기가 아테나보다 더 아름답다고 떠들다가 괴물이 되었다는 전승도 유명하다.


³ 아르고 원정대는 미케네(기원전 12세기 멸망)에서 시작한 이야기이다. 미케네 시대의 점토판에 새겨진 선형문자 B를 해독한 결과, 포세이돈, 디오니소스, 아르테미스, 제우스, 헤라, 아테나, 헤르메스 등의 이름이 등장했다. 미케네의 신들의 세계는 후대에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가 묘사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세계보다 훨씬 무겁고 어두웠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신들보다 훨씬 원초적이고 강력했고, 인간과의 관계도 매우 엄격했다. 해상무역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던만큼, 포세이돈의 서열이 가장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신들이 못되먹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보편적 신의 역할도 충분히 했다. 사람들에게 기술과 문명을 알려 주고, 비와 해를 허락한 당사자들이었다.


⁴ 미케네가 파괴될 때 그들의 문자도 전승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현재의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에사 해상무역을 하던 페니키아 사람들의 문자를 기원전 8세기 경에 들여와 그리스어와 맞지 않는 일부 자음들을 A, E, I, O, Y 모음으로 변형시켜 알파벳을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기원전 8세기부터 제 손으로 기록이 가능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등 다른 문자권에서 이뤄진 에게해, 지중해 일대에 대한 기록도 있다.


⁵ 로베르토 칼라소 (Roberto Calasso), <Le nozze di Cadmo e Armonia>, Adelphi, 1988


⁶ 크리스트교가 시작된 서기 1세기에는 그리스 문화권은 로마의 지배권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 군사적으로 로마가 그리스를 압도하여 흡수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가 로마를 흡수했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신들과 내러티브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이름만 로마식으로 바뀐 정도였다.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아테나가 로마 신화에서 유피테르, 유노, 넵투누스, 미네르바였다.


⁷ 에우헤메로스의 주장. 그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신화 작가였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원래 뛰어난 인물, 왕 등이었는데, 사후에 신격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저서 <영원한 회귀의 신화>에 등장한 원형적 모델 이론.



커버 이미지: <이카로스의 추락>, 피터 브뤼겔(Pieter Brugel the elder).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휴브리스의 상징. 이카로스는 새의 날개를 달고 태양에 닿으려는 휴브리스를 부리다가 날개의 밀납이 태양에 녹아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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