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의 사회생활

회사후소(繪事後素) 3.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일

by 생강도넛


기원전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를 현대로 치자면 뉴욕과 실리콘 밸리가 합쳐진 공간이었습니다. 이 곳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무역의 요충지였고, 전 세계(그들의 세계관 안에서)의 온갖 상품과 사람과 언어와 정보가 모여드는 다문화 메트로폴리스였지요. 기하학의 유클리드, 부력과 원주율의 아르키메데스,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세 학자 모두 알렉산드리아에서 학문을 배우거나 연구했습니다.


무세이온,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 도시에 자리 잡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Mouseion-라틴 문자 표기, 무세이온, 무사이의 공간) ¹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선별된 석학들이 모여 왕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세계 각국의 글(지식)들을 수집하여 표준 판본을 만들고 텍스트 비평과 편집 작업을 하는 전례 없는 연구 기관이었습니다.


갈레노스는 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주치의로서, 서기 180년 즈음부터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을 집대성하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관된 방대한 두루마리들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진위 파악에 공을 들였습니다. 히포크라테스가 기원전 5세기 인물이었기에 오랫동안 그의 전설적인 명성을 빌린 위작들이 난무했거든요. 갈레노스는 자신의 저작, '히포크라테스'가 시중의 위작과 달리 검증된 정본에 근거했음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알렉산드리아 당국이 항구에 들어오는 배들을 수색해서 글이 적힌 두루마리라면 전부 압수하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사본을 만든 후 주인에게 원본을 돌려주었다'라는 기록을 남겼어요. 국가가 직접 나서서 원본을 사냥하듯 수집해 만든 도서관의 아카이브야말로 가장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자신의 글에 독보적인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죠.


갈레노스의 진술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세이온이 그만큼 세상의 모든 지식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가늠되는 대목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학자들이 식민지에 불과한 유대 촌사람들의 구약성서를 번역한 사례를 보면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 모든 지식에 심취한 나머지 그것마저 그리스어로 번역할 팀을 꾸렸습니다. 기원전 280년 경에 시작된 작업은 100여 년에 걸쳐 완성되어 70인역 구약성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² 나중에 이 70인역 성서는 초기 크리스트교가 변방 유대의 종교에서 전 세계로 확산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어요. 히브리어 성서에는 '구원', '의로움', '자비' 등과 같은 크리스트교의 핵심적인 개념이 내용 전반에 배어 있을 뿐 단어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리스어 번역 작업을 통해 명사 단어로 완성되어 결국 범세계적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어 번역 작업을 통해 유대교 경전이 그리스어로 된 신학 용어로 탈바꿈했고, 히브리 정신이 그리스 언어의 그릇에 담기면서 전 세계인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 언어로 첫걸음을 디뎠습니다.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의 도서관 근무와 성서 번역 작업은 시기적으로 겹칩니다. 이렇듯 전대미문의 풍성한 지적 자원 속에서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가 아르고나우티카(아르고 원정대)를 집필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이집트에 자리 잡은 그리스

아폴로니오스가 학자로 활동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지배하던 알렉산드리아는 지리적으로 이집트에 있었지만, 실제는 그리스의 어느 한 폴리스와 같았어요. ³ 당시 이 도시가 행정상 이집트 안에 있는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이집트 옆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로 불렸던 점이 도시의 정체성을 보여주죠. 알렉산드리아 안에는 그리스에서 이주해 온 시민계급이 버젓이 존재했습니다. 바둑판 모양으로 정교하게 짜인 도시 계획(커버 이미지 참고)하에 그리스식 석조건물과 화려한 궁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 이름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름에서 나온 그리스어였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벗어나 나일강 유역으로 가보면 이집트 토착민들이 길고 긴 시간 이어져 내려온 고유한 풍습과 사고방식과 종교를 지키고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Museon)이 그리스 학문의 정수였지만, 그 지식을 기록한 파피루스는 나일강 유역의 토착민들이 제공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통치 초기부터 이집트의 신들과 그리스의 신들을 병치하고 결합하여 신흥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신 세라피스를 내세워 그리스 출신 지배층과 이집트 토착세력 사이 문화적 융합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지배층을 포섭하기 위한 정치 공학적 수단이었을 뿐, 그리스에 뿌리를 둔 왕실과 지배층은 멸망 직전까지 그리스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300년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어를 배운 왕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유일했고, ⁴ 이 마지막 왕이 로마로부터 '그리스 여자'라고 멸칭을 받은 것은 왕가의 혈통과 정통성이 대외적으로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잘 보여주죠. 이들에게 그리스 정통성을 확립하는 일은 지중해와 에게해 세계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생존 전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르고나우티카는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인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그리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알렉산드리아(프톨레마이오스 왕국)가 아테네를 잇는 그리스 문화의 진정한 적통임을 선포하는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아르고호가 이집트에 도착하는 설정이 서사시에 등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결국 이 저작은 왕조의 통치 명분을 내세우고 그리스 문화권 내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정치 외교적 수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의 눈으로 이 작품을 정부 홍보물 혹은, 어용 문학으로 단정 짓지 맙시다. 이곳은 고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또한, 시인의 문학적 지적 욕구는 물론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들과 영웅들을 향한 경외도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고요.


아르고나우티카, 아르고호, 아르고 원정대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서사시란 이미 호메로스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 지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했습니다. 정교하고 개인적인 시상을 추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렇다고 서사시가 외면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서사시에 담기는 시각과 시상이 변하면서 고대 그리스 서사시가 표현하는 세계가 크게 확장되었지요. 이런 흐름 속에서 탄생한 아르고나우티카는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가 개인의 창작물인 동시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는 방대한 지식 인프라의 산물로 해석될 법합니다.


전 세계(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기준)의 지형, 풍습, 전설, 민속, 지식, 철학, 자연지식 등을 총망라한 이 작품은 '기원전 3세기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같아 보입니다. 도서관장이었던 아폴로니오스는 도서관의 학술적 자원과 필사 인력(서기 노예와 후배 학자)을 활용해 수집된 방대한 데이터들을 손보아 일관성 있는 서사로 통합했습니다. 그는 이 자료들을 서사시의 전통적 운율인 육보격(Hexameter) 격식에 맞춰 다듬고,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며 문학적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문장마다 희귀한 단어와 복잡한 은유로 가득한데, 이건 당시 무세이온 학자들이 쓰던 전문 용어를 호메로스식 운율에 맞춰 기원전 3세기의 최신 학술 트렌드로 벼려낸 것이었습니다.


아르고나우티카가 성취한 독창적인 면은 인물의 내면 심리 묘사였습니다. 이것은 데이터 수집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시가 행동 묘사가 중심이었다면, 아폴로니오스는 인간의 고뇌와 감정을 현실감 있게 불어넣어 인물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해 냈지요.


기원전 13세기 미케네에서 시작된 아르고호 이야기가 기원전 3세의 아르고나우티카에 이르기까지, 무려 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이야기는 시인과 청중의 입을 거치며 계속 바뀌고 덧붙여졌고, 시대와 지역과 사람들의 요구가 반영되면서 디테일이 다양해지고 많은 변형과 이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아르고호 이야기는 정답 같은 하나의 버전이 있는 게 아니라, 늘 새로운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여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는 '모든 이의 관심사인 아르고호'라고 했고, 기원전 5세기에 핀다로스는 퓌티아 찬가⁵에서 이아손을 고결한 영웅으로 그리는데 집중하며 모험의 내용을 거의 생략했습니다. 이에 비해 아르고나우티카는 항해와 전투와 위기와 선택을 영화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강산이 족히 백 번 바뀌었을 시간 동안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권력자와 동네 최고 부자도 계속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의 옷차림과 식사 예법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과 일상과 말도 마찬가지였겠죠. 하지만 많은 변화 속에서도 고대 그리스인들이 끝내 놓지 않았던 단 하나의 기준이 있었는데, 바로 휴브리스-오만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잊고 오만해지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습니다. 휴브리스는 천 년 동안 지켜온 그리스의 도덕이었습니다. 호메로스와 핀다로스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와 이솝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도덕 기준을 지켰습니다. 아르고 원정대 역시 휴브리스에 엄격하게 반응했습니다. 아르고호는 그저 흥미로운 모험담이 아니라, 휴브리스에 기초하여 천년을 관통하는 그리스다운 질문, '인간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인간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으며, 또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물었던 그리스 정신의 기록이었습니다.




¹ 조금 자세히 보자. 사실 무세이온과 도서관은 구분되는 기관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 Museion은 오늘날의 연구 중심의 대학교로 보면 된다. 무세이온은 우리가 곧 만나게 될 무사이 아홉 신들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무세이온은 차차 박물관의 어원이 된다. 왕실에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다. 알렉산드리아의 문학, 종교, 천문학, 자연과학, 철학 등 모든 학문이 여기서 연구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무세이온의 부속 기관으로 무세이온 학자들이 참고할 서적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자료실 역할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서관으로 수집되어 온 두루마리, 지식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면서 나중에 상부기관인 무세이온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름으로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화재로 사라졌다는 소문은 부분적으로만 맞다. 소문처럼 불에 타서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았다. 카이사르와의 전쟁으로 도서관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이후 로마 황제들은 도서관에 지속적으로 지원을 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갈레노스가 서기 180년 전후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관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참고해 글을 쓸 수 있었다. 도서관은 위정자들의 선택에 따라 부침을 겪던 중에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서기 391년 테오도시우스 칙령) 결정타를 입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도서관에 저장된 책들을 이교도의 것=악마의 것이라 여겨 본격적으로 파괴했다.


² 학구적 동기뿐만이 아니라, 정치 외교적 목적도 있어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그리스계 이집트 통치자)가 피정복민의 정신세계를 그리스적 체제 안에 편입시키려 했던 통치전략이었다. 유대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로 가는 길목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했다.


³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고 아테네는 패배하며 그리스 패권을 잃었다. 그러나 실제로 패권은 스파르타가 아닌 변방 마케도니아로 넘어갔다.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와 이집트와 레반트(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와 인더스강까지 차지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그의 부하들은 땅을 나눠 지배했는데, 그중 하나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 지역을 차지했다.


⁴ 이집트 토착민들은 이집트의 고유한 신들을 계속 섬겼다. 그리스와 이집트 혼혈층, 이집트 토착 엘리트 세력, 알렉산드리아 도시 엘리트 등이 새로 만든 신-세라피스를 숭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이집트 토착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왕의 호칭을 파라오로 정하고, 공식적인 기념물에 이집트 복식을 차려입은 왕의 모습을 남기도록 했다. 이집트 왕실의 관습이었던 남매 혼인도 실행했다. 그러나 왕가의 사람들은 그리스 복식, 그리스어 등 그리스 문화를 고수했고, 그리스 문화권에서 우위를 가지고 싶어 했다. 지배층은 현지화에 관심이 없었고, 토착세력 역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제 문화를 버릴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⁵ 핀다로스가 찬가를 많이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4 작품뿐이다.

1. 올림피아 찬가-제우스에게 바침.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 찬양

2. 퓌티아 찬가- 아폴론에게 바침. 퓌티아 경기 우승자 찬양

3. 네메아 찬가 - 제우스에게 바침. 네메아 경기 우승자 찬양

4. 이스트미아 찬가 -포세이돈에게 바침. 이스트미아 경기 우승자 찬양

아르고호 이야기는 이중 퓌티아 찬가에 등장하는데, 총 299행 중 200행이 아르고호에 할애되었다.

찬가는 주로 경기 우승자의 고향에서 오페라와 뮤지컬처럼 공연되었다. 시 구절구절마다 음악적 선율이 붙었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고 정해진 안무에 따라 춤을 췄다. 그러나 연극, 오페라, 뮤지컬과는 다르게 배역이 나눠져 있지 않고 합창으로 찬가를 불렀다.


커버 이미지: www.startour.pe.kr/local/christ/Egypt_alexandria-map-02.jpg (2005 ×1254)



작가의 이전글클래식의 사회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