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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Sep 01. 2022

이성계와 이방원이 죽은 곳

짧은 옛 이야기

용의눈물도 그렇고 최근에 종료된 태종이방원 드라마에서도 이방원이 기우제를 지내다가 죽은것처럼 나와서 많은 사람들은 이방원이 무슨 사당 근처에서 죽은걸로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이방원이 죽은 곳은 창경궁 인근이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방원은 1422년 5월에 연화방 신궁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후 변계량이 지은 제문에서 이방원은 수강궁 별전에서 죽었다고 되어있다. 조선시대 연화방은 지금의 종로5가에서 창경궁 까지로 볼수 있다. 수강궁이 지금의 창경궁이니까 사실 이방원은 창경궁 권역에서 죽은 셈이다.

 태조 이성계가 어디서 죽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기록은 묘한 기시감을 갖게 한다. 이성계는 1408년에 죽었는데 실록 기록에 의하면 창덕궁 광연루 별전이다.  이 창덕궁 광연루는 오늘날에는 없는 곳이다. 이방원이 지었던 곳인데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연회도 하고 가끔 잔치같은 것도 했다고 한다. 비슷한 곳을 따지면 경복궁 경회루 정도 된다. 광연루 주변에는 화초와 나무를 심고, 연못도 팠다고 한다. 이성계가 죽었던때가 음력 5월, 오늘날로 따지면 6월경이라 초여름이다. 나이 일흔 넘은 고령의 노인을 모시기에는 나무그늘이 우거진 별전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성계의 최후가 누각에 따린 조그만한 공간이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오늘날에는 이 광연루가 어디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기록은 광연루가 창덕궁의 남동쪽에 있었다고 소략하게만 적어놓았을뿐이다. 그런데 창덕궁의 남동쪽이라고 하면 오늘날의 낙선재 권역이다. 그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종묘가 나온다. 춤추고 술마시는 공간이 종묘에 있었을리는 만무하다. 결국 낙선재가 옛날의 광연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낙선재는 옛날 조선 초기에는 창경궁 권역이었다. 조선 후기 헌종이 자기가 사랑하던 부인(경빈 김씨)를 위해 낙선재를 지으면서 창덕궁으로 편입된다. 그 전까지는 창경궁 권역이었다.

 그런데 이방원이 죽은 때도 음력 5월로 초여름때였다.

  이방원이 죽기 전까지는 광연루가 있었던 기록이 있었으니까. 이방원이 죽은 연화방 신궁(수강궁 별전)이 광연루 별전은 아니었을 확률이 상당하다. 다만,  광연루 별전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볼수는 있다.

 따라서 이방원은 자신의 아버지인 이성계가 죽었던 공간 근처에서 죽었을 거라고 추정해보는건 너무 나간걸까?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이런 자유로운 상상을 계속 해보곤 하는데. 문득 최근에는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이성계가 죽은 1408년 5월, 실록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가 위독해지자 이방원이 달려왔다. 이방원이 청심환을 개어 올렸지만 이성계는 이것을 다 삼키지 못하고 두어번 이방원을 쳐다본 뒤 마침내 승하했다고 한다. 한 때 정적이었던 아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순간. 죽음의 문턱에 있던 이성계는 아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성계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이방원이었다.

 자신을 '두어번' 바라본 아버지가 죽은 지 14년 뒤. 같은 초여름날에 이방원도 자리에 눕는다. 공식적으로 그의 병이 뭐였는지 실록은 기록하지 않는다. 이방원 역시 아들인 세종대왕과 양녕대군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가 죽음의 순간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자면 아버지가 죽음을 맞던 공간 근처에서 14년 뒤 아들도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의 그 문턱에서 14년전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들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같은 초여름의 한켠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이방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는 아버지의 심경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해하지 않은 채 그저 평생 그랬던 것처럼 현실주의자적인 태도로 이러저러한 유언을 남겼을까. 궁금한 대목이다.


ps)낙선재에 수강재라는 건물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곳이 옛날 수강궁 권역이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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