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자가주택에 입성한 후, 목돈이 들어갈 일이 없어지자 금세 나태함이 밀려왔다. 절대적인 큰돈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만큼보다 넘치게 벌고 있었기에 잉여 돈이 통장에 쌓였고 자연스레 투자에 눈 돌렸다.
엄마를 따라 속초에 있는 절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그 무렵 공부방 규모를 확장하는 걸 두고 고민이 많았는데 엄마가 아는 스님을 찾아가 보자고 제의한 것이다. 나는 엄마를 따라 속초 깊숙한 산자락에 있는 절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를 본 스님이 멀지 않은 시기에 가족 모두 내가 지은 빌딩에서 안락하게 살 거라 했다. 앞으로 노력하는 만큼 돈이 들어올 테니 하는 일에 매진하고 사업 규모도 확대하라 했다. 뵌 적 없는 부처님께 오백만 원에 달하는 돈도 냈다.
스님의 말씀대로 내가 건물주가 되려면 내 시간과 육체를 갈아 넣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건물주가 된다는 결과에 대한 기쁨보다 육신을 갈아 넣는다는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투덜거렸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엄마를 통해 스님께서 연락해 왔다. 속초 바닷가에 프리미엄 아파트가 들어서는데 분양권 살 생각이 있느냐는 거였다. 사놓기만 하면 몇 배로 불어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했다. 이 기회를 원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지만 ‘돈’은 그것을 담을 그릇이 되는 사람에게만 모인다고 하셨다. 나는 충분히 그릇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이라며 지금 당장 큰 자금이 필요한 게 아니니 지금 기회를 잡으라 하셨다.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릇이 이미 큰 게 아니라 키우라는 전제가 거슬렸다. 또다시 ‘미친 듯이 일만 하라는 거잖아.’ 처음 집 살 때도 주말 반납하고 일만 하며 살았는데 또 아파트를 분양받고 중도금을 갚아나가야 한다니 끔찍하게 싫었다. 누가 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전화를 끊은 후, 울먹였다. 다들 왜 나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냐며 (아무도 그런 적이 없음에도) 이렇게 해서 건물주 되는 거라면 안 하고 싶다고 어린애처럼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 프리미엄 붙은 분양권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됐다.
당시 투자 관련 책에서 자주 비유하는 ‘파이프라인’이 내게도 절실했다. 그런데 나의 무지함은 ‘파이프라인’으로 구축한 돈을 ‘눈먼 돈’이라 여겼다. 애초에 정의부터 잘못된 셈이다. 잘못 정의 내린 투자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여기까지 읽은 당신이라면 내가 ‘파이프라인’으로 선택한 투자가 무엇인지 짐작했으리라. 그랬다. ‘주식’이었다. 주식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어른의 말을 흉내 내고자 함이 아니다. 주식을 어떻게 대하느냐 태도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노력한 만큼 보상이라는 결과가 따른다.’ 매우 합리적인 문장이다. 나는 그 합리성에 의문 품지 않고 달렸다. 달리면서 결과를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때론 달리는 것 자체에 빠져들었다. 공부했고 일했고 이 모든 것을 기회라 여겼고 기회가 주어짐에 감사했다. 그랬던 내가 열심히 일하는 삶을 끔찍한 희생의 삶이었다고 태도를 변경해 버렸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 구매하는 것으로 비유해 보면 더 쉽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물품을 해외배송으로 결제했다고 치자. 이것은 당장 오프라인 매장으로 가서 현물을 확인하고 구매할 수 없는 비싸고 희귀한 물건이다. 그러나 스스로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겠는가. 구매 취소를 해야 한다. 운이 좋으면 아직 배송 전이라 구매 취소에 따른 위약금은 물지 않고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물품이 배송 중이라면 어떨까. 취소에 따른 왕복 배송비는 본인이 물어야 한다. 나는 도착한 물건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꿈의 실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내가 포기한 것이므로 상자 안에 담긴 물건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권리가 없다. 바라던 것을 다 들어주고 싶어 빨리 실행으로 옮긴 우주가 반복된 구매 취소 (이유는 단순 변심)에 넌더리가 난다. 나는 어느새 ‘블랙리스트’ 고객 명단에서 관리되기 시작한다.
어차피 또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 저 사람의 신호는 좀 느리게 반응해도 돼.
나는 성공과 가치, 베풂의 단위였던 귀한 돈에 ‘따위’를 붙였다. 돈 따위나 벌자고 이렇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우주는 반응한다.
“우리 고객님이 돈 따위 때문에 지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고객 만족 차원에서 스트레스의 근원인 ‘돈’ 따위를 당장 회수하세요.”
극도의 투덜쟁이로 변모한 무렵, 결혼 전에 오래 근무했던 학원 원장님과 연락이 닿았다. 안부 인사도 드리고 학원사업의 고충도 털어놓을 겸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다. 그때 연출된 시나리오처럼 원장님이 다짜고짜 ‘주식’에 대해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주식을 어떻게 사고파는지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원장님이 한 주에 몇백 원이던 때부터 사 모았던 바이오 주는 임상 결과에 대한 기대로 몇만 원으로 몸집이 거대해져 있었다. 원장님은 자신을 믿고 꾸준히 투자하라 하셨다. 나는 급하게 주식 계좌를 개설하고 불타기에 들어갔다.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주식을 담고 나서도 끝 모르고 가격은 치솟았다. 하루에도 카니발 자동차 가격만큼 오르락내리락했다. 조기 은퇴, 경제적 자유가 눈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임상 실험은 실패했고 회사 대표마저 주가조작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50%가 넘는 수익을 자랑하던 주식은 길거리 바닥에 밟히는 전단지 가치로 하락했다.
주식으로 쉽게 돈을 벌려던 마음을 반성하고 싶은 건 아니다.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을 갈아 넣지 않아도 스스로 돈이 굴러갈 구조를 만든다는 의미이고 주식을 산다는 것은 소액 주주가 된다는 의미이다. 소액 주주는 회사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내가 직접 회사를 설립할 자금과 능력이 안 되더라도 믿을만한 회사에 자금을 투자함으로써 회사의 발전을 돕고 그 이익을 배분받는 것은 공생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주식이 투자 개념으로 쓰이는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주식은 투자가 아닌 투기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원장님께서 추천하신 바이오 회사가 어떤 임상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지, 몇백 배로 몸집이 커진 데에 투자자의 어떤 심리가 반영된 것이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계좌에 돈 따위를 넣었고 시장가로 기계적으로 체결했다. (매입, 매도가격을 정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더 오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사라는 원장님의 재촉(권유)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원장님을 원망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원장님은 기업에 대한 분석을 빠삭하게 하셨던 분이고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따라 기업의 미래에 투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밤새워 공부하고 보충하고 주말도 반납하며 수업하여 얻은 돈을 길에서 나눠주는 행사용 할인권보다 못한 취급을 했다. 주식을 사는 행동 어디에도 내 소중한 돈을 불리려는 고민과 노력이 없었다. 심지어 주식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을 땐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후에 임상 실패라는 뉴스가 뜬 줄도 몰랐기에 대처할 시간마저 놓쳤다. 뒤늦게 연락을 받은 나는 원장님께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우매한 질문만 했을 뿐이다.
지금도 주식 계좌엔 경이로운 –98%의 손익률이 찍힌 채 잠들어 있다.
주식 투자의 실패는 내 인생 내리막길의 시작일까?
아니면 새로 열린 가능성의 시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