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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틀 Dec 18. 2024

13장 모든 성공의 비법은 사실 별것 없다.

 누구나 ‘꿈’을 현실로 만들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가장 많이 고민한다. 그 꿈이 원대할수록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더 막막하기만 하다. 누구라도 방법만 알려주면 그대로 열심히 따라 해볼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방법을 알려줘도 대부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너무 뻔한 방법이라든가, 너무 얼토당토않은 망상이라거나 하며 비난 일색이다. 너무 가볍다며 혹은 너무 무겁다며 시도를 거부한다. 그러나 모든 성공의 비법은 사실 별것 없다. 그게 무엇이든 해보는 게 중요하다. 가능하면 지금까지 다양한 이유로 시작을 거부했던 것들이면 더욱 좋다.      


 나 역시 ‘책’을 내고 싶다는 열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기존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입히기 위해선 행동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거창한 행동 변화일 필요도 없다. 사소한 행동부터 시작하고 그 시도 만큼의 성취감을 얻으면 된다. 작은 성취가 모여 할 수 있다는 자기 기대가 높아지면 좀 더 높은 목표도 해볼 만한 것으로 변한다.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는 목표의 이마에 적힌 것이 아니라 내 마인드에서 새어 나오는 혼잣말이다.      


 ‘책’을 낸다. 라는 열망을 노트에 적은 후, 어떻게? 라는 문장을 바로 밑에 적었다. 답은 단순했다.      


 읽고 쓰고 고쳐라.      


 그런데 쓰고 싶다는 문장 앞에 무엇을 쓰고 싶은지가 빠진 것이 아닌가. 무엇을 쓰고 싶다기보단 글을 쓰는 삶 자체가 목적이었기에 주제 앞에서 막막해졌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겐 가장 완벽한 한 편이 필요한가. 아니었다. 어설프고 유치하고 투박해서 차마 두 번은 못 읽을지언정 내가 ‘끝까지 쓴 글’이 필요했다. 글쟁이 입문자로서 다작의 길로 발을 들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일단 매일 한 줄이라도 써보자. 기초체력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해보는 게 지금은 제일 중요해.’     

 

 신기한 건, 글을 쓰겠다는 열망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서 추가적인 변화가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는 점이다. 글을 쓰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데도 확신이 들었다. 글을 매일 쓰면서 하루가 통째로 새로 수혈받은 듯이 변했다. 지금은 크고 작은 이 행동의 변화가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유기적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니 당장 내가 목표하고 열망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시도해보자.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내가 닿고 싶은 곳에 가까이 왔다는 신호음이 지척에서 울린다.     


 나의 경우 글쓰기와 같은 수준의 열망으로 달리고 걷기가 새롭게 떠올랐다. 단 한 번도 선택지에 없던 행동 변화였다. 글을 읽은 당신이라면 내가 얼마나 자주 택시를 애용했는지 알 것이다. 그랬던 내가 택시를 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걸어서 한두 시간 이내라면 무조건 걸었다. 걷다 보니 무심결에 스쳐 갔던 생각들이 내 잠재의식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그 후 뛰는 것도 도전했다. 처음엔 1km도 뛰지 못했다. 뛰는 것과 도저히 친해질 수 없었다. 그런데 뛰는 것에 열중하는 시간을 늘릴수록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대한 두려움이 대폭 줄었다. 처음엔 3분을 쉬지 않고 뛰었고 그 후엔 5분을 쉬지 않고 뛰었다. 꾸준하게 한 달을 뛰었더니 달리는 게 좋아졌다. 10km를 한 시간 이내로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면서 택시가 더는 이동 수단이 되지 않았다.

 처음 가보는 장소라면 무조건 택시를 탔던 이유는 걷는 것에 대한 귀찮음과 지도를 보며 장소를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심한 방향치와 길치라는 셀프 한계도 한몫 거들었다. 그런데 10km를 쉬지 않고 뛰고 나니 걷는 건 너무도 쉬웠다. 뛰는 것이 가능해지자 걷는 것은 쉽게 시도했고 걷고 싶어서 지도를 적극적으로 살펴봤다. 요즘엔 길찾기 앱이 친절하게 나의 위치까지 알려주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넣어둬도 된다.      


 책을 내겠다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행동 변화에 왜 달리기가 나오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모습 중 적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소망이나 열망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니 강력한 끌어당김 없이도 어떻게 얻는지 알 수 있는 일차원적인 바람은 여기에선 논외로 하겠다. 반대로 강력하고 원대한 꿈은 어떻게 도달하는지 방법을 모를 때가 종종 있다. 아니 그게 대부분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이번 생은 글렀다며 종이 접듯이 꿈을 접어버리고 다시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일지라도 일상에 틈을 벌리는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좋다. 일상의 작은 변화는 우리가 전부라고 믿었던 것이 작은 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작지만 꾸준하게 그 틈에 균열을 낸다. 그런 후엔 균열에 열망을 이루어줄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무작정 책상에만 앉아 있다고 글이 저절로 써지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책상에 앉아 있어도 틀 안에 스스로 가둔다면 단 한 줄도 완성하지 못한다. 그러니 평소에 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하면서 자기 확신의 과정을 연마해야 했다. 달리기와 걷기를 통해 내가 얻은 건 택시비 절약의 의미를 넘어선 것이었다. 내가 피해왔던 것과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수월하게 해결하고 성장한 나를 인식하는 것은 원대한 열망으로 바르게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나침반 같았다. 내 의지가 ‘달리기’는 ‘글쓰기’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인식했음을 의미했다.      

 이 외에도 글쓰기를 하며 비우고 버리는 습관 만들기에 공들였다. 공부방 책장을 가득 채운 문제집, 시험지부터 다 쓴 프린터 토너, 폐형광등, 쓰고 남은 건전지 등 쏟아져 나오는 묵은 것을 치우고 정리했다. 싱크대 서랍을 여니 풍선껌처럼 몸집을 불리는 비닐봉지에 아연실색하기도 했다. 비닐봉지를 왜 이토록 정성스레 정리하고 모아두었는지 치우면서도 의아할 지경이었다.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배달 책자와 치킨 및 피자 쿠폰을 모아 고무줄로 묶어놓은 걸 보곤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쿠폰 만료일이 2018년도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어쩌면’, ‘만약에’ 같은 이유로 버리지 못한 것들이 가득할수록 정작 필요한 것들이 들어갈 자리를 잃었다. 한 공간에 십 년가량 머물다 보면 낡고 닳아 더는 제 몫을 하지 못하는 것들에 둘러싸인다. 그런데도 이 모든 상황은 부차적인 거라며 외면하곤 했다.


 청소를 시작했을 때 버릴 것이 차고 넘쳐 하루 이틀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수납함이 토해놓은 물건을 다시 욱여넣고 외면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묵은 것을 정리해야 막힌 ‘글길’이 시원하게 뚫릴 것 같았다. 하루에 다 정리하는 게 무리라면 구역별로 정리하자 마음먹었다. 당장 뒤집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한 구역씩 치우며 버릴 것은 최대 세 개로 정했다. 한꺼번에 내다 버리자니 또 ‘혹시나, 어쩌면, 만약에’ 삼 형제가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하수구가 이물질로 막힌 걸 방치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손을 닦을 때 물이 빠져나가는 속도보다 세면대에 차는 속도가 더 빨랐다. 느릿하게나마 물은 넘치지 않고 흘러내려가 그냥 둔 것이 벌써 몇 년이다. 펑크린을 사다 부으면 된다는 지인의 말에 “그렇게 쉽게 돼?” 반신반의하며 세면대에 붓고 한 시간을 기다렸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데도 나는 긴 꼬챙이를 하수구에 넣고 쑤시며 투덜거리곤 했다. 펑크린을 붓고 한 시간을 기다린다. 물을 흘려보낸다. 이걸 두 번 반복하니 몇 년간 골칫거리였던 세면대에서 물이 더는 머물지 않고 빠져나갔다.      


 이것 역시 글쓰기와 무슨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묻는다면 아직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다만 묵은 것을 정리하고 나니 해보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그게 무엇이든 미뤄둔 것이 있다면 그것부터 해결해보면 알게 된다. 내 무의식을 잠식했던 불편함이 즉각 행동하는 것만으로 별거 아닌 것이 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돈에 대한 변덕을 없앤 것도 변한 것 중 하나다. 돈을 벌고 싶다는 열망과는 반대로 돈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성의가 없었다. 힘들여 번 돈에 예의를 갖추기는커녕 ‘잡은 고기에는 먹이 주지 않는’ 바람둥이처럼 굴었다. 힘들게 얻게 된 돈을 헤프게 쓰기 일쑤였는데 그 소비는 보상심리라는 다소 변명 같은 이름이 붙었다. 힘들 게 돈을 벌었으니 나를 위해 써야겠다 했지만 정작 내게 꼭 맞는 물건은 없었다. 물건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돈을 써서 빨리 없애는 것에 관심 있는 거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경제적 자유의 속뜻이 돈을 흥청망청 쓰겠다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돈 뒤에 ‘따위’라는 단어를 붙여 업신여겼다. 힘들게 일하느냐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게 된 이유는 다 저 ‘돈 따위’ 때문이니 써서 눈앞에서 없애버리겠어. 이런 심리랄까.


 처음에 돈을 벌었을 땐 그 금액이 적더라도 나눠 쓰는 데 행복이 있었다. 갓난아기인 첫애를 흔쾌히 봐주겠다 결정하신 엄마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당시 엄마는 내가 네 살 때부터 살았던 늙은 단독주택에 어떻게 하면 예쁘게 새 옷을 입힐까 고민하셨다. 나는 학생 문의가 들어올 때마다 엄마께 화분 하나씩을 선물했다. 좁지만 마당 가꾸기에 빠져 있던 엄마께 꽃과 나무, 예쁜 화분 등을 선물했다. 엄마는 힘들여 번 돈을 쓰지 말라 하셨는데 나는 그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신기한 게 엄마한테 선물 하거나 맛있는 걸 사 주거나 하면 바로 뒤에 좋은 일이 생겨. 학생이 자꾸 들어와. 그러니 엄마한테 내가 선물하는 건 학생이 새로 들어온 것에 대한 ‘선불 감사’라 생각해.”

 매번 미안해하며 받으시는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다. 엄마께 선물하면 그것의 몇 배가 내게로 돌아온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렇게 작동했다. 신기할 정도로 엄마의 마당에 새 화분이 도착하면 여지없이 신입생이 등록했다. 그땐 돈에 ‘따위’를 붙이지 않던 때라 내 곁에 찰싹 붙었고 다른 친구들도 불러왔다.


"이곳 주인이 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하니 여기에 머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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