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지구는 없다.

알레르기 소년의 첫사랑

by 기틀

주의!

책소개 글이 아닙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상황이나 사건, 혹은 인물에 대한 소소한 훔치기입니다.



★극히 짧은 책 소개

지은이 타일러 라쉬

출판사 RHK


이 책은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FSC인증 라벨 제품


이 세상에서 뭘 바꾸고 싶지? 환경 문제였다.



★인물의 알레르기 경험담 훔치기


P.146.

그 해 알레르기 검사를 받으러 갔다. 바늘로 피부의 표면을 조금 뜯어 그 자리에 알레르기 의심 물질에서 추출한 시약을 조금 발랐다. 바늘로 살갗을 찢는 게 고양이가 살짝 할퀴는 느낌이었다. 살던 지역의 나무와 동물을 종별로 검사하는 동안 엎드린 등 전체와 양쪽 팔, 어깨의 살갗이 뜯겨 온통 격자무늬가 되었다. 검사 결과, 지역의 모든 나무와 꽃, 털과 깃털이 있는 모든 동물과 다수의 음식에 알레르기가 발견되었다. 내게는 복숭아, 배, 사과, 딸기, 체리, 당근 모두 알레르기를 유발했다. (오랜 치료로 나아진 요즘도 이런 과일을 먹으면 목이 가렵고 따갑다.) 여기에 천식까지 겹치면서 매일 약을 먹고 매주 두 번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렇게 꼬박 10년 동안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았다.


=> 알레르기가 심한 소년의 첫사랑 이야기

내가 첫사랑에 빠졌던 시간은 지구의 모든 것들이 나를 거부하던 시간과 맞닿아 있었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흙마당에서 개똥이 묻은 축구공을 차는 행위는, 초등학교 운동장 화단에 핀 사루비아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는 행위는, 돌담에 핀 민들레의 홀씨를 불어 멀리 날려버리는 행위는, 친구네 집 툇마루에 앉아 물이 뚝뚝 흐르는 자두를 한 입 베어 무는 행위는, 지독한 산모기에 물려 부푼 다리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벅벅 긁어대는 행위는, 길 가다 마주치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거나, 교문 앞 상자에 담겨 팔려나가던 노란 병아리를 손바닥 위에 들어 올리는 행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봉지 과자를 입안에 툭툭 털어 넣는 행위는, 적어도 나에겐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이 아니었다. 산과 들에 피어난 열매와 보드라운 털을 가진 짐승들과 고운 깃털을 가진 새들은 모두 날아드는 총알과 진배없었다. 다가오면 아팠다. 눈물이 흘렀고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무렵의 나는 죽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다정했으나 걱정이 많았던 엄마는 나의 바깥출입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어도 마당을 향한 창문은 새가 날아와 부딪힐 정도로 맑고 투명하게 닦아주었다. 그때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냄새나 촉감은 느낄 수 없을지 몰라도 눈과 귀로는 담고 기록했다.

그날의 봄볕은 유독 바스락거렸다. 잠자리 날개처럼 한없이 얇고 가벼운 공기가 둥둥 떠다녔다. 내 눈에만 보이는 미립자의 꽃가루들이 둥그런 손톱 모양으로 춤을 추며 떠다녔다. 마당 수돗가 세숫대야에 한 방울의 물기도 남아 있지 않던 오후였다. 모든 것이 바싹 말라 있었다. 창문을 열면 누룽지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조금쯤은 괜찮지 않을까.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열면 되지 않을까. 수 초만 바깥공기를 마셔야겠다. 그런데 손가락 반 마디만큼도 열지 못했는데도 좁고 깊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듯 봄의 공기가 눈과 코로 훅 달려들었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순식간에 부었고 몸에 저장된 모든 수분이 눈과 코로 몰려들며 쏟아졌다.

나는 지독한 알레르기 환자였다. 다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천장의 익숙한 문양이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쉴 새 없이 쏟아낸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려 말라붙어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 그렇지만 운 좋게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탁, 탁. 마룻바닥이 울렸다. 누군가 거실 한복판을 신발을 신고 걷는 것 같았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리한 거실을 징검다리를 뛰어넘듯 누군가 겅중거리며 다가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운동화를 신은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엎드린 채 눈동자만 움직이는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이에게선 슴슴한 자연의 냄새가 났다.

“아파?”

손톱 밑이 까맸는데 그 더러운 손으로 내 눈꺼풀을 집어 올리며 관찰하듯 물었다. 나는 여자애의 손톱 어딘가 과일의 씨앗 조각이나 민들레 홀씨 따위가 박혀 나를 또 졸도 직전으로 몰아갈까 봐 두려웠다.

“가까이 오면 안 돼. 나는 알레르기 환자란 말이야.”

“알레르기?”

“응, 공기, 흙, 깃털, 씨앗 모두 나에겐 위험한 것들이야. 그것들이 닿으면 간지럽고 붓고 결국 숨을 쉬지 못하고 그러면 죽게 되는 거야.”

“공기랑 흙이랑 깃털이랑 씨앗이? 너를 미워해?”

“그것까지는 몰라. 하지만 나는 왜 이렇지 하며 불평하면 엄마가 많이 슬퍼하셔.”

“공기랑 흙이랑 깃털이랑 씨앗이 너를 반기지 않는다는 건, 네게서 다른 별의 냄새가 나서 그럴지도 몰라. 나처럼.”

“무슨 뜻이야?”

“나에겐 나를 낳아준 존재가 없대. 그렇다면 내가 태어난 방법은 나무처럼 땅을 뚫고 나와야 하는데 그러기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잖아? 뿌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다른 별에서 태어난 게 분명해. 그리고 너도 어쩌면 나처럼 다른 별에서 태어났을지도 몰라. 생각해 봐. 네 말대로라면 공기랑 흙이랑 깃털이랑 씨앗이 너를 미워할 리가 없잖아? 오히려 그것들과 마주치면 엉엉 울어대는 건 너잖아. 넌 그리운 거야. 네가 태어난 별의 공기와 바람과 씨앗이 말이야. 어쩌면 네가 밥을 주던 누렁이는 하염없이 너를 기다리며 쫄쫄 굶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심하게도 너는 바닥에 누워만 있구나. 흥, 약골이야.”

오기가 생겼다. 내가 엄살을 부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눈물 콧물로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무거운 머리를 일으킨 뒤 가까스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손가락 한 마디 너비로 열었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도 바깥에서 밀려 들어온 뭔지 모를 한없이 가벼운 것들이 거실 한복판을 날아다녔다. 아니 헤엄치는 것도 같았다. 넘실넘실.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공기가 교차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위를 미세한 씨앗들이 넘실넘실 타 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더러운 운동화를 벗지 않았다. 비 온 뒤 질어진 흙길 위에서 뒹굴었던 모양인지 여자아이가 지나가는 길마다 발자국은 짙은 자국을 남겼다.

댕댕. 거실 벽면에 걸어둔 괘종시계에서 오후 4시를 가리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아이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시계 방향으로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네발로 기다시피 하며 시계 앞에 선 뒤 정확한 간격을 두고 움직이는 초침을 때가 낀 손톱으로 부러뜨렸다. 그러곤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어 보였는데 더러운 운동화와 대비되는, 눈부시게 하얗고 고른 치아가 반짝 빛났다. 나는 그때 분명 왼쪽 가슴 끄트머리에 날카로운 파편이 박히는 기분을 느꼈다. 여자아이가 부러뜨린 초침의 끄트머리로 콕콕 찌르기라도 하듯이.

“엄마가 오실 시간이야. 바닥은 진흙으로 엉망진창인 데다 시계까지 망가뜨렸으니 이제 너 우리 엄마에게 엄청 엄청 혼날 거야.”

여자아이는 용감했다. 엄마가 곧 올 거라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발자국을 만들며 거실을 쏘다녔다.

“기억해, 기억하라고.”

마치 후렴구가 반복되듯 여자아이는 흥얼거렸고 박음질하듯 발자국을 남겼다.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무릎에 턱을 괴고 여자아이의 동작을 눈으로 좇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여자아이가 부러뜨린 시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래서 시간마저 멈춘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실에 드리운 그림자가 키를 자꾸만 늘려댔다. 해가 저 너머로, 어쩌면 여자아이와 누렁이가 사는 별을 비출 시간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삐거덕. 철문이 요란스레 울렸다.

“엄마가 왔어! 엄마가 왔다고! 어서 숨어!”

나는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지도 못하고 잔뜩 낮춘 목소리로, 그러나 다급함을 드러낸 채로 말했다. 엄마는 창문 앞에 서서 자신을 관찰하듯 보는 나를 발견하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허리춤까지 들어 올리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웃었다면 그 웃음은 웃음이라기보단 울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거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난장판이 된 거실이며 초침이 부러진 시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아니, 그보다 더러운 운동화를 신고 거실을 어지럽힌 여자아이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현관 밖에서 먼지가 묻은 신발을 털고 정리한 후 고개를 든 엄마와 작은 몸으로라도 더럽혀진 거실을 가릴 궁리를 하는 내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비겁해도 어쩔 수 없어.

“세상에, 아가! 괜찮은 거야? 가렵지 않은 거야? 이게 무슨 난리야!”

엄마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나를 지나 내 등 뒤를 향해 있었고 나 역시 엄마의 시선을 따라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아이가 찍어놓은 발자국과 부러뜨린 초침에 관하여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아이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 순간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리된 거실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시계는 제 역할을 다하며 째깍거렸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거실을 가득 채운 온갖 꽃씨들이었다. 날개를 단 꽃씨는 파도를 넘듯이 너울거렸고 나는 그것들에 둘러싸인 채로도 더는 울지 않았다. 눈물도 기침도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도 졸도 직전의 아득한 쇼크도 없었다. 엄마는 “이를 어째!”를 반복하며 현관문과 거실 창문을 허겁지겁 열며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나는 느릿하게 헤엄치며 둥둥 떠 있는 꽃씨 하나를 집어 손바닥 위에 올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안녕, 나의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