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디테일한 결혼계약서 작성하기.
뭐, 첫 단서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달까. 진의 부주의한 자유로움이랄지, 아니면 나의 방임적 방목 때문이랄지.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진은 핸드폰에든 노트북에든 그 흔한 비밀번호 하나 설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궁금해할 정도로 그가 신비롭다거나 베일에 싸인 인물이 아니니 그의 일상을 궁금해하거나 엿보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놉!
변했다. 마음이란 게 늘 그렇듯이.
그런데 활짝 열어둔 공간보단 굳게 닫힌 문에 시선이 오래가듯이 어느 날, 진의 핸드폰이 화면을 바닥에 둔 채 엎어진 모양일 때가 태반이고 그 흔한 광고성 카톡 음마저 들린 지 오래된 걸 깨닫자-카톡 한 줄 오지 않을 정도로 고립형 외톨이는 아니었기에-궁금해졌다. 지루하고 단조롭고 반복적이었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진의 하루가 변하고 있었다. 배신감이라기보단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평범한 일상에 거부감 없이 스며들었을 때 진은 좀 더 깨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앙큼하긴. 어쨌거나 그땐 그런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또 그때와는 다른 감정이 서서히 차오르는 중이다.
맹세컨대 진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감정에 소유권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말이지. 진이는 되려 내 감정에 좀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려 했고 그 결과 종종 삐쳤다. 그러나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닌 데다 그런 내색을 한다는 게 귀엽기도 해서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등의 소음은 일절 없었다. 물론 그가 질투할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즐긴 적도 있지만. 음, 아직 그는 나밖에 모르는군. 확인 차원이었고 매번 진의 반응을 보며 안도했다.
진과의 다툼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발했다. 함께 쓰는 유튜브 계정에 남자 배우의 키스 신을 검색한 날이었을 거다. 그의 매력이라 한다면 도톰하고 붉은 데다 틴트라도 바른 듯 반짝거리기까지 하는 입술이었는데 아랫입술 정 가운데 선명하게 세로로 그어진 선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없었다. 아마 배란기 전조 증상 그 비슷한 거였을 거다. 평소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던 배우의 아랫입술 맛이 어떨지 궁금했으니 말 다 했지, 뭐. 요즘 드라마의 키스 신의 정교한 리얼리즘을 마주한 심정이라고나 할까. 아니, 극단적 판타지를 접했다는 표현이 더 옳은 걸지도. 드라마 속 키스 신의 발전을 여태 몰랐던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검색창에 남자 배우의 이름을 입력했다. 신인인 줄로만 알았던 이 배우는 이미 키스 장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고 수많은 유사 콘텐츠가 끝없이 추천 영상으로 뜨고 또 떴다. 어쩐지 쪽쪽 소리가 범상치 않더라니. 얼굴을 기울이는 각도는 또 어떻고. 키스 후 귓바퀴에 머리카락을 정리해 넘겨주는 모습이랄지,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이 상대의 목덜미를 지나 볼을 쓰다듬은 뒤 눈을 맞추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진행 방향마저 완벽한 내 취향이었다. 생각해 보라. 볼, 목선, 가슴, 허리, 엉덩이의 순서가 아니라는 게 얼마나 프로다운가 이 말이다.
밤을 꼬박 새운 뒤, 세면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목도했을 땐 몇 스푼 남아 있지 않은 이성이 발동하며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온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직접 키스를 한 것도 아니면서 어찌나 아랫입술을 깨물며 감상에 몰입했던지 퉁퉁 부어오른 입술과 붉게 충혈된 눈은 이성적 사고가 마비된 좀비의 형상과 다르지 않았다. 피의 냄새를 좇듯 테스토스테론에 반응하는 마흔을 코앞에 둔 여자의 모습을 묘사하라고 하면 딱 거울 앞에 선 이 여자였다. 진은 세면대 옆 변기에 앉아-서서 소변을 누지 않도록 신혼 내내 훈련시킨 덕분에-영 시원찮은 소리를 내며 소변을 누더니 입을 열었다. “야, 그것도 바람의 일종이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누가 바람이라도 피웠대?” 몇 초간의 침묵 후, 소변 누기를 끝마친 진이 세면대 앞에 서 있는 나를 옆으로 튕겨내며 손을 닦았다. 세면대로 쏟아지는 물줄기의 위엄이 시원찮았던 진의 소변 줄기와 대비되어 우렁차게 느껴졌다. “그것도 바람이라고, 너. 네가 하는 행동이.” “뭐라는 거야? 꿈이라도 꿨어? 꿈에서 내가 바람이라도 피웠나 보지? 이왕이면 잘생긴 연하남으로 부탁해.” “너, 검색 좀 그만해. 그렇게도 그놈이랑 키스가 하고 싶었어?” “지금 연예인 키스 신 검색한 걸 두고 바람이라고 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가능성의 문제라고.
가능성이 적은 대상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것을 그저 상상과 공상에 불과하다는 듯이 감정적 배신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건 자기기만이라나 뭐라나. 누구든 간에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상대와의 직접적인 관계 형성의 성공 여부를 떠나 감정적 배신이 맞다며 힘주어 말했다. 만에 하나 내가 송혜교급의 외모를 가졌다면, 또 만에 하나 밤새 유튜브를 기웃거리지 않아도 그와 일정 부분 동선을 공유할 수 있는 포지션이라면 내가 백 퍼센트, 아니 만 퍼센트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했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신경질적으로 칫솔질을 했다. 저러니 잇몸이 약해지고 피가 나는 거 아니냐며 한마디 하려다 관두었다. 본질을 벗어나는 논쟁은 나 역시 피하고 싶었으니까. “느예느예. 난 어젯밤 바람을 피우고 말았네요. 그거 참으로 문란한 마누라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진은 물기를 털어 낸 칫솔을 신경질적으로 컵에 던지곤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진이 가고 난 후 변기 뚜껑을 내린 후 앉아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런가, 이것도 바람의 일종인가.
나는 진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특히나 그의 외장 하드에 가득한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더욱 관대하다. 야근할 거 같다는 문자를 보낸 뒤, 생각보다 일에 속도가 붙어 이르게 퇴근했던 날이었다. 집은 고요하고 거실은 간접 조명 하나 켜두지 않아 어둡기만 했다. 컴퓨터가 있는 방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집 안에 아무도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아마 진이 저 굳게 닫힌 방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의 의미를 충분히 짐작하며 또 진의 개인적인 욕구 해소의 시간을 방해할 의도가 전혀 없기에 굳게 닫힌 방문 앞을 지날 때 오버다 싶을 정도로 깨금발로 걸으며 발소리를 죽였다. 그 절정의 순간을 직접 경험해 본 바는 없지만 순간의 방해로 인해 공들여 빌드업해 놓은 것이 무너지는 건 충분히 상상이 갔다. 그래서 진짜 조용히, 아주 조용히 거실 식탁에 짐을 내려놓고 정수기 버튼을 누르려다가도 “물이 출수 중입니다.”라는 소리에 진이 화들짝 놀라 진정한 출수 타이밍을 놓치게 될까 싶어 물 한잔도 마음 편히 마시지 못했건만. 나의 관대함을 기반으로 한 존중의 행동을 몰라줘도 너무 몰라주는 진. 그가 생각하는 ‘바람의 기준’에 억울함이 밀려왔다.
금발 웨이브, 사탕처럼 투명하고 푸른 눈, G컵의 풍만한 가슴보단 검은 단발에 앙앙 소리가 소녀처럼 간드러진 동양 여성이 취향일 것이라고, 판타지보단 현실적 가능성에 무게를 두며 구체적인 상상이 가능할 때 몸도 반응할 것으로 예상이 되는 그를 탓할 생각을 전혀 해본 적 없었는데. 혼란스러웠다. 그저 호르몬의 반응은 본능적인 거라고, 몸이 앞설 때가 있는 법이라고. 몇 날 며칠을 굶어 눈이 돌 때, 건강이든 입맛이든 일절 고려하지 않고 위를 채운다는 본능에 집중하듯이 그렇게 제어 불가능하게 찾아올 수 있는 게 성욕이라고, 배설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키스 신 검색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부라면 섹스보단 키스가 더 희귀템이 된다는 것쯤은 다 알지 않던가. 좀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건데 진은 그런 마음마저 정신적 바람이라고 했다. 그게 시작이라고. 시작했으니 나아가는 것만 남았다며. 해치우듯 끝내는 자기 위안과는 다르다며.
어떻게 상황이 마무리되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의 서운함을 귀여운 질투로 해석했을 거고 이번에도 그의 다친 마음은 아직도 여전히 나를 최상위에 두었다는 확인과 안도로 치환했을 뿐. 그뿐이었는데.
현실로 돌아와 거실 테이블에 올려둔 그의 핸드폰을 본다. 엎어진 핸드폰. 내내 울리지 않는 카톡. 비밀로 가득찬 진의 사생활이 궁금해진 것도 그가 지금 육체적 일탈과는 다른 질감의 감정 너머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일 거다. 아, 이건 생각보다 많이 별로인 감정이구나.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흠, 어쩌나. 내로남불, 똥 묻은 개 따위가 떠오르지만 일단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