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수납장에 버려진 것들
어썸은 한낮의 오후에 책을 읽다 말고 볼펜을 찾았다. 어썸은 책을 좀 지저분하게 읽는 습관이 있다. 읽으며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문장은 연필이든 볼펜이든 필기구를 찾아 거침없이 그어댔다. 중간중간 불현듯 떠오르는 단상이랄지, 관련 이미지랄지, 전혀 상관없는 삼천포 이야기랄지 떠오르는 소재가 있으면 책 여백에 깨알 같은, 가끔 본인도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로 빼곡하게 적었다. 그러다 다음에 또 읽고 싶은 느낌이 강렬하게 드는 책장은 비행기를 접듯 과감하게 접기도 했다.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이 있는 페이지는 귀퉁이를 소심하게 접었다. 그리하여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전혀 다른 장르의 기괴한 책으로 변형되곤 했다. 어썸의 작은 서점에는 허리높이 정도의 움직이는 책장이 있는데 그곳이 ‘읽기’가 진행 중인 책을 보관하는 공간이었다. 가끔 손님이 무심결에 그 책을 집어들라치면 어썸은 개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을 들킨 것처럼 당황하며 황급히 책을 뺏어 제자리에 돌려놓곤 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집은 이렇게 버려진 것들을 모아 둔 박물관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상하게 모나미 볼펜 하나 뵈질 않았다. 가방을 뒤적여 파우치 지퍼를 열어 몸통 안을 샅샅이 뒤졌다. 눈썹을 그리는 펜과 립스틱 정도가 밑줄을 그을 수 있는 대체품이 되려나. 갈색 브로우 펜슬을 들어 밑줄을 그었다. 유분감이 섞인 펜슬은 부드럽게 발리며 책장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오래도록 다시 펼쳐질 일이 없다면 반대쪽에도 밑줄은 선명하게 찍 힐 거다. 반대쪽 같은 위치에 밑줄이 새겨질 문장이 뭘까 궁금해졌다.
남겨두고 가는 물건 때문에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흠, 뭔가 묘하군.
어썸은 왠지 자신의 처지 같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결혼이라는 수납장에 방치된 물건 중 하나가 자신 같다. 그리고 그 남겨진 물건 때문에 낭패인 것은 남편일까, 그녀 자신일까.
책을 덮고 주방 수납장을 열어보는 상상을 했다.
첫 번째 서랍엔 도자기로 만든 수저 받침대가 자그마치 여덟 세트가 있다. 결혼 후 딱 한번 친지를 초대한 적이 있는데 그때 격식을 갖추겠다며 구입한 물건이었다. 물론 격식을 갖추고 싶다는 의도와는 다르게 한식으로 상차림한 그녀의 촌스러움은 꽤 오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가벼운 브런치 모임인 줄 알았는데 음식이 좀 무거운 거 같다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놋수저는 수저 받침대 위에서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했었다.
라면 수프도 종류별로 몇 개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다. 망한 찌개요리엔 수프만 한 게 없지. 그런데 도통 먹을 일 없는 라면 수프는 왜 나타난 걸까. 호텔 객실에서 챙겨 온 홍차와 제주 녹차 티백에 시선이 닿으니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런 점이 남편의 마음을 식게 한 걸지도 모른다고. 그녀에게 서비스는 공짜라는 매력으로 다가왔지만 남편에겐 없어도 그만인 물건, 챙기기엔 번거로운 쓰레기였다. 수영장에서 쓰기 좋다며 호텔 어메니티를 챙길 때면 공짜라서가 아니라 편의성 때문이었는데도 남편의 눈치를 보았다. 이런 성향은 유리병뚜껑이 예쁘다며 세척해 물기를 제거해 둔 잼통에서도, 빵입구를 봉하는 트위스트 타이에서도, 남편이 기념일마다 의무적으로 보낸 꽃다발을 묶은 실크소재의 리본에서도, 아이스크림 핑크 스푼과 요구르트용 빨대에서도 나타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아두지만 이내 잊히는 물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나은 물건들. 남편에게 어썸은 ‘혹시나’의 대상이 된 적은 있었나. ‘잊히는 대상’은? 아닐 거다. 잊힌다는 건 한 때 기억했다는 의미이니 잊히는 대상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남편에게 감정은, 선택의 자유가 아닌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였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있었지만 마침 딱 끌리는 여지친구도 들일 수 있는 것.
너도 좋고 그 어린 여자애도 좋아.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없어도 될 것이 많을수록 부유한 사람이다.”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어썸의 남편은 부유한 사람인 게 확실했다. 실제로도 부유하다는 게 약오를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