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일 같다
성묘날에 길게 집을 비워야 해서 혼자 있을 비누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다행히 시간이 맞아 큰아이가 집으로 왔다가 돌아갔다.
아이는 미리 왔다 가니 설날에 못 올 수도 있다며 돈봉투를 내놓는다.
돈봉투를 받는 일이 언제나 그렇듯 무안하고 어색하다. 그런데 이번엔 아주 대놓고 돈봉투라고 쓰여있다. 하하..
아이는 안에 담는 마음과 함께 봉투와 포장지, 편지에 신경을 쓴다. 이 점은 나를 보고 배운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부모의 무안함을 완화시키려는 예쁜 생각일 수도 있다.
자식의 금전적인 부담이 의무와 당연시되던 시대를 지나왔다.
부모의 생활을 얼마만큼 책임져 주느냐에 따라 자랑거리가 되었던 반면 의무를 못하는 자식은 불효자가 되었고, 남 앞에 숨기는 자식이 되기도 했다. 그런 일들은 그런대로 그 시대의 환경과 상황에 맞게 모두에게 일어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의례적이고도 평범한 일이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으므로 논쟁거리나 흉볼일이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2년 전 큰 아이는 고된 취업준비 끝에 첫 목표와는 달랐지만 엄마가 좋아할 만한 회사에 입사를 했다. 꼭 돈을 많이 주는 회사란 뜻이 아니다.
‘취직하면 금전과 세대분리의 독립을 시키겠다’는 나의 자식 키우기 플랜이 있었다.
회사가 먼 탓에 그 시간이 빨리 닥쳐왔고, 우린 여덟 평짜리 방의 보증금을 해주는 것으로 공식적인 경제적 원조를 마감했다. 세대주가 된 아이는 지금까지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 스스로 제 한 몸을 책임을 지며 살고 있다.
손가락으로 꼽는 대기업을 제외하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회 초년생 월급쟁이의 월급 액수가 별로 변하지 않았음이 놀라운 사실이고, 오른 물가를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성장곡선이었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이도 간혹 있지만 나는 아이가 노동을 통해 받는 대가에 대해 궁금하지만 알려고 할 필요가 없는 자식이 아닌 한 성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확한 액수를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식의 월급에 대해서 무관심하려는 것이 내가 불필요해서였다면 아마 아이는 봉투를 가져오지도 않았을 테니 풍족함이 이유는 아니다.
수능 시험을 보고 난 후 여유시간이 많아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우리 집 사정은 어때? 나도 이제 알 때가 됐잖아” 아이가 그런 말을 했더랬다.
‘ 혹시 어떤 순간에 내가 맏이의 책임감을 느끼게 했을까?‘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안 한 아이의 질문에 나는 바로 답을 못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질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결국 솔직히 말하진 못했다.
“아이고! 집 걱정하지 말고, 너나 열심히 네 한 몸 간수하면서 잘 살아”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이는 성인이 되고, 경제활동을 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몰래 검색을 통해 대충의 월급을 짐작해 보면 이 애가 이런 금액을 빼서 가져오는 것이 가능한가 싶고, 보태주진 못할망정 넙죽 받고 아이가 그만큼 쪼들릴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모님께 드리는 마음만 생각하던 내 입장이 바뀌고 나니 받는 마음이 세상 불편하단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첫 월급을 타고, 빨간 내복 대신 빨간 가죽봉투에 두툼하게 실수령액의 반쯤으로 추측되는 액수를 넣어 꽃과 길게 쓴 땡큐카드를 함께 가져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다고 거절해도 막무가내였다.
“평생 한번 있는 일이야. 첫 월급! 첫 월급은 내가 쓰고 싶은 곳에다 쓸 거야 “
이후 매달 주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봤고, 특별한 날에 봉투 세 개를 가져온다.
엄마, 아빠에게 따로 본인에게만 쓰라며 각각의 봉투와 그 시간 동안의 자신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었다면서 취준생인 동생의 봉투까지 챙긴다.
“먹는 건 맛있는 거 먹고 다녀라. 먹는데 너무 아끼면 슬퍼”
그런 마음씀을 할 줄 모르고 좁쌀만 한 마음을 갖었었던 그 나이 때의 내 생각이 들어 내심 부끄러웠고, 이 아이의 통 큰 배포에 놀란다.
한편, ‘얘가 돈 무서운 걸 모르네’ 속으로 걱정도 되었다.
돈이란 뭔가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한다.
부모님께 얼마를 드려야 적당할지,
아이들 용돈은 얼마를 줘야 할지,
집안 대소사에 얼마를 부담해야 하는지,
친구의 결혼식 부조금을 얼마를 해야 할지,
부고장을 받고서 먼저 조의금은 얼마를 해야 할지 관계에 따른 액수를 정하는 기준을 따져보게 된다.
마치 돈의 액수에 따라 사람의 관계를 명확하게 줄 긋고, 증명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씁쓸했다.
그로 인해 ‘물질적인 인간이 참 싫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만사 물질에 초연해진 성인군자여서가 아니고, 오히려 나의 발랑 까진 꺼먼 속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서 싫었던 거겠지.
그러나 주고받는 것이 돈이란 형태일 뿐이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정당하게 사용되는 돈의 용도까지 왜곡된 프레임을 씌울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자식에게 돈봉투를 받는 일이 나는 무안하고 불편하다.
편해질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돈이란 것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의 거리가 멀어지고 애증의 관계가 되진 않고 싶다.
적당히 부담스럽게 주고, 적당히 부담스럽게 받는 돈봉투의 부담감은 서로에 대한 예의이고, 서로를 생각하는 곱고 순수한 마음이기도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