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방송에 나와주시겠습니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섭외지옥’에 빠지는 날

by 정양갱

“안녕하세요~ 저는 ㅇㅇ방송국 ㅇㅇㅇ작가라고 합니다. ㅇㅇ을 주제로 하는 TV토론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토론자로 모시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아.. 네네... 그러실 수 있죠... 그래도 토론이 같은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서... 아 네. 알겠습니다. 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네 감사합니다! ” (뭐가 감사하다는 것인지.)


“안녕하세요 부녀회장님~ 여기는 ㅇㅇ방송국입니다. 쌀 기부를 통해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을 전하는 TV프로그램 팀입니다... 하루 동안 아파트 공터에서 주민들에게 쌀 기부를 받는데요, 저희 MC들하고 같이 게임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고요, 또 사전에 몇 가구를 소개해주시면 저희 MC들이 찾아가서 쌀 기부받는 모습을 촬영하기도 해요. 사연이 있는 집들이면 더 좋죠!...... 아 그렇죠. 요즘엔 예전처럼 주민들 간에 소통이 많지는 않죠...” (기부를 위한 방송인지, 방송을 위한 기부인지... 이제는 나도 헷갈린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ㅇㅇ방송국 ㅇㅇㅇ작가라고 합니다. 연말을 맞아 성금모금 방송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ㅇ월 ㅇ일 저희 방송국에 오셔서 이웃을 위한 작은 나눔 보여주시면 어떠실까요, 인터뷰도 간단히 해주시면 좋고요...” (앵벌이.)


나는 매주 방송에 나올 토론자나 출연자를 섭외하고 있다. 만약 나에게 이런 전화가 걸려온다면 흔쾌히 방송에 나가겠다고 할까? 21년 방송국에서 원고료로 밥을 먹고 살아온 나이지만 꺼려질 것 같다. 방송작가의 일은 원고보다 섭외가 9할이다. 원고는 내 의지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떡이 되든 어떻게든 써낼 수 있는 영역이지만, 섭외는 의지로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섭외지옥’에 빠진다.


MBTI로 말하자면 극 스몰 ‘i’인 나에게 이 일이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은 지금도 종종 한다. 스물넷, 대학에서 진행한 방송아카데미 수업을 신청한 게 계기가 돼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다. 글쓰기가 좋았고, 방송이 좋았던 나는 처음 2년 정도는 모든 게 설레고 신기하고 재밌었다. 열정페이도 신경 안 썼다. 그렇게 한 3년 정도 밥도 거르고 잠도 못 자고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현실이 보였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게 바로 '섭외지옥'이었다. 방송이란 게 늘 방송되어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섭외가 안 될 때면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다.


언제부터인지, 종교도 없는 나는 하루를 시작할 때 섭외가 잘될 것 같은 컵을 골라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다. 옷가게를 하는 언니가 아침에 기분 나쁜 손님을 만나면 쑥을 태운다던데 나는 언니가 쑥을 태우는 마음으로 컵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꿈에서 자꾸 시간에 쫓겨 시험을 보거나 노트북 작동이 안 돼 동동거린다. 오늘 내가 좋아하는 컵의 손잡이가 뚝 떨어졌다. 오늘도 나는 악몽을 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