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1995) 리뷰
한국에서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는 일본 영화가 또 나올까? <러브레터>의 생명력은 이 세상에 겨울이 존재하는 한평생 유지될 것 같다. 2025년 개봉 30주년을 맞아 9번째 재개봉을 맞이한 지금도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등 애니메이션 영화 기록을 제외하면 국내 개봉 일본 영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남겨두는 행위를 한동안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유예해 왔다. 영화의 디테일과 예술적 성취를 제대로 기술할 자신이 없었고, 스물 무렵 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날 지배하는 서늘한 감동을 솔직하게 터놓을 용기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카야마 미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는 히로코가 홋카이도 설산에 누워 숨을 참다가 헐떡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연인 이츠키가 맞이했을 삶의 최후를 온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언덕을 내려오면 그의 3주기 추도식이 진행된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한 히로코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또는 잊지 않기 위해 죽음에 천착하는 인물이다. 사랑하는 연인 때문에 유사 죽음을 시도한다.
여자 이츠키에게도 죽음의 그림자는 깊게 드리운다. 그는 독감에 걸려 마스크를 쓴 채 콜록대며 처음 등장한다. 여자 이츠키는 독감으로 죽은 아버지에게서 죽음의 이미지를 계승하는 인물이다. 그는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남자 이츠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하며 얼어붙어 박제된 잠자리를 떠올린다. 이 잠자리가 바로 극 전체를 대표하는 죽음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이 얼어붙은 죽음은 동시에 얼어붙은 사랑이기도 하다.
이와이 슌지가 직접 밝히길, 얼어붙은 잠자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잠자리는 변온동물이라 날씨가 추워지면 그 날개가 먼저 부서질 정도로 온도에 예민하다. 여자 이츠키가 본 잠자리는 일종의 환상인 셈이다. 실재하지 않는 잠자리는 아버지의 죽음과도 겹치지만,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가 실제로 보지 못해 상상할 수밖에 없는 남자 이츠키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키리에의 노래> 등 이와이 슌지의 영화 속 죽음은 항상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왔다. 러브레터의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지만, 언젠가 봄을 맞이할 운명이다. 여자 이츠키가 죽음에서 삶으로 귀환했듯 말이다. 이 영화의 생명력이 겨울만 되면 다시 발아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두 명의 이츠키와 히로코가 죽음의 모티브와 강하게 연결되는 인물이라면, 히로코의 현 연인 아키바는 그런 죽음과 싸우는 인물이다. 그는 이츠키보다 먼저 히로코를 좋아하고 있었다. 둘이 보기 쑥스러워 이츠키를 일행으로 불렀더니 대뜸 히로코에게 고백하질 않나, 죽은 지 3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히로코의 마음을 통제하질 않나. 아키바가 이츠키를 원망스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는 히로코의 마음을 온전히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죽은 이츠키와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 운명이다. 오타루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망자가 보낸 편지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이츠키를 산 히로코에게서 떼어내고 그에게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아키바가 영 밉상이었다. 어른이 되어 보니 그가 정말 안타깝고 애석하다. 패배할 걸 알면서도 승부를 반복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무적이다. 히로코의 마음속 이츠키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증식되어 평생 치유되지 않을 상처로 남게 됐다. 오프닝에서 이츠키를 떠올리며 유사 죽음에 빠졌던 히로코는 엔딩에서 기어코 그가 죽음을 맞이한 설원으로 온다. 감동적인 수미상관 연출이다. 그렇게 히로코는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며 이츠키에 대한 미련을 털어냈을까? 나는 그리 희망적으로 보지 않는다. 죽음에 골몰한다고 죽은 사람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히로코가 여자 이츠키에게 보낸 첫 편지의 너무나 건조하고 일상적인 인사말은, 연인을 떠나보낸 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 인사말은 자신을 전혀 치유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뒤돌아봤을 때 깨닫는 감정의 무게는 오롯이 남은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것이 <러브레터>가 말하는 죽음과 사랑이다.
남자 이츠키가 여자 이츠키를 좋아했던 건 확실하다. 그럼, 반대는 어떨까? 남자 이츠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돌려주러 왔다가 우연히 여자 이츠키와 마주친다. 집에 없을 것이라 생각해 가족에게 대신 전해주려 했던 것이다. 여자 이츠키는 책을 받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명하게 미소를 띤다. 상을 다 치르고 학교에 가니 남자 이츠키는 전학을 갔다. 여자 이츠키는 그의 자리에 놓여있던 꽃병을 깨며 말도 없이 떠난 그에게 큰 서운함을 표현한다.
성인이 된 여자 이츠키는 그를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던 동명이인의 남자아이쯤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기 얼굴이 그려진 도서 카드를 보고 10년 만에 진짜 감정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도서 카드에 빼곡히 적힌 이름 이츠키는 과연 어떤 이츠키의 이름이었을까.
남자 이츠키는 설산에서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를 부르며 생을 마감했다. 뉴진스 하니가 불러서 화제가 됐던 그 노래다. “내 사랑은 남쪽의 바람을 타고 저 섬으로 달릴 거예요”라는 가사가 의미심장한데, 해석에 따라 사랑의 대상이 달라진다. 해석을 ‘남쪽의 바람’이 아닌 ‘남풍’으로 한다면, 바람의 방향은 남쪽 고베에서 북쪽 오타루로 향하게 된다. 즉, 첫사랑 여자 이츠키를 향한 사랑 고백으로 들린다.
히로코 쪽의 해석은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푸른 산호초의 대상이 여자 이츠키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키바는 생전 이츠키가 마츠다 세이코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그의 한결같은 성격이 드러난다. 여자 이츠키를 좋아했음에도 끝까지 말하지 못했던 숫기 없는 소년은 끝을 맞이해서야 진심을 전할 수 있던 게 아닐까.
히로코가 아키바와 오타루 여행을 의논하던 다방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일본의 포크송 ‘Afternoon Street 25’다. 마츠다 세이코의 노랫말이 남자 이츠키의 마음을 대변한다면, 이 노래는 히로코의 마음을 대변한다. 바로 “비가 눈으로 변할 무렵 널 데려갈 거야”라는 가사다. 이런 히로코의 진심과는 달리, 남자 이츠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여자 이츠키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히로코는 자신의 외모가 첫사랑과 똑같아서 고백받았다는 걸 직감하고 여자 이츠키에게 과거를 잘 떠올려보라고 부추긴다. 첫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자신의 처지를 당사자에게 증언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럴 리 없다며 무심하게 답장을 보내온다. 이런 상황에서 편지를 쓰는 히로코의 심정은 어땠을까? 산 정상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칠 게 아니라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지, “밥은 먹고 다니냐?”
<러브레터>를 본 개인의 감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성숙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불현듯 몰아치는 새로운 감성은 관객 저마다의 ‘잃어버린 시간’이 지닌 힘일 것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섬세한 첫사랑의 감정과 곳곳에 숨은 디테일보다 더 강력한 매개체가 바로 이 시간의 힘이다. 관객은 이 시간의 힘에 압도당한다.
나는 볼 때마다 늘 다른 신선함이 느껴진다는 핑계로 십 년 동안 이 영화를 열 번 정도 보았다. 언젠가 나카야마 미호의 사인을 받을 거란 망상을 하며 각종 굿즈도 모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몇 줄짜리 감상평조차 쓴 적이 없다. 다른 작품 리뷰는 특별한 지식도 없는 주제에 잘 써놓고도 유독 이 영화에 관한 글은 쓸 용기가 없었다. 언젠가 이와이 슌지가 내한하면, 나카야마 미호의 사인을 받으면 그때 쓰겠다며 미뤄왔다.
그 감정의 근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와이 슌지가 재작년 <키리에의 노래>로 내한했을 때도 바쁜 현실을 핑계 삼아 팬심을 애써 외면해 왔다. 그리고 <러브레터> 개봉 30주년을 한 달 앞둔 작년 12월 6일, 나카야마 미호는 영면에 들었다. 아, 진작 뭐라도 써놓을걸. 영화가 보여준 시간의 힘에 그토록 감동해 놓고 이제야 형편없는 글을 쓰고 있다. 부끄러워도, 별 볼 일 없는 글이 되더라도 진작에 써야 했다. 내가 러브레터를 처음 감상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잃어버린 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이츠키의 집이 현실에서는 20년 전 불타 없어졌듯, 세상의 어떤 것들은 종종 물리적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 그 흔적조차 남지 않곤 한다. 러브레터를 처음 봤던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소년이 느낀 감상은 흐린 기억이 되었을 뿐 어디에도 실존하지 않는다. 맙소사. 누굴 탓하겠는가.
나는 세대가 다르기에 나카야마 미호의 아이돌 시절을 잘 모른다. 그가 출연한 다른 영화나 드라마 하나 보지 못했다. 그나마 유작이 된 이와이 슌지의 <라스트 레터>가 있다는 걸 아는 정도다. 하지만 그가 내게 남긴 여운의 규모는 <러브레터> 하나로 이미 너무 웅대하다. 볼 때마다 우는 영화는 이것밖에 없다. 살면서 나이를 먹을수록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타인에게 약점을 보이는 일과 다를 바 없어졌다. 예전처럼 우는 일도, 웃는 일도 좀처럼 없어져만 간다. 그런 내게 이 영화가 내뿜는 겨울 공기처럼 서늘한 감각은 인간 존재의 이유를 상기시킨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설령 그것이 아플지라도 유예하지 않는 것. 이 영화 속 나카야마 미호의 연기는 내게 그런 가르침을 준다.
이제 그는 평온히 영면한다.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도 아마 대답은 없으리라. 그의 노래 ‘세상 누구보다 분명’ 가사처럼 ‘계절을 넘어 언제라도’ 돌아와 줄 거라 믿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러브레터> 덕분에 매해 겨울이 조금 더 풍요로웠습니다. 시린 겨울을 지나 도착한 그곳에는 봄이 당도했길 바랍니다. 늦어서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