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2006) 리뷰
"미장센이 극도로 훌륭한 영화는 절대 나쁜 영화가 될 수 없다." 할리우드 거장의 명언 같은 이 문장은 사실 <더 폴>을 본 필자의 감상평이다. 이 조악한 사견에 '진짜 영화계 명언'을 덧붙이겠다. 베르톨루치는 영화를 모든 예술의 종합이라 정의했고, 고다르는 영화를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의 현실로 보았다. 3가지 명언을 합치면 타셈 싱 감독의 최고작인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하나는 방구석 가짜 명언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요지의 실제 명언을 알지 못한다. 만약 존재하더라도 내 표현만큼 적확하다는 보장도 없다. 사실 전문가 명언은 아무래도 좋다. <더 폴>은 나의 이야기기도 하니까.
추락 앞에 붙은 정관사 The가 부여하는 고유성은 추락이 영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모티브임을 주석한다. 스턴트맨 로이가 겪은 오프닝의 추락 장면은 흡사 <열차의 도착>을 연상케 하는데, 마치 영화와 추락의 유구한 관계성은 태초부터 부여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때 추락(하강)은 비상(상승)의 이미지와 늘 함께 한다. 로우 앵글과 틸트 쇼트의 시조새 <시민 케인>부터 상승과 하강 3부작인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 한국인에게 친숙한 봉준호 의 <기생충>과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또 <추락의 해부>까지. 추락을 담아내는 데 있어 상승은 선택이 아닌 필수, 작용-반작용의 병립 관계다. <더 폴>은 라 시오타 역에서 출발한 추락의 역사를 반추하며, 현재의 자양분인 과거에 헌사를 보낸다.
고전 할리우드에 헌사를 보내는 영화는 최근 들어 유독 많았다. 대표적으로 <바빌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떠오 르는데, <더 폴>은 그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와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 앞선 두 영화가 과거의 시공간 전반을 그리워한다면 후자 는 ‘그럼에도’ 영화가 담고 있는 미래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둔다. 언급한 네 작품 모두 영화의 추락을 이미 예정된 미래이자 현재로 규정한다. 길지 않은 영화 역사 속에서 떨어지고 다시 올라오는 운동성은 반복되어 왔다. 무성 영화가 점차 사라지며 유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했듯, 셀룰로이드 시대가 저물고 DCP의 시대가 왔듯 말이다. 영화의 세계에서 한 시대는 곧 종언을 맞이한다는 필연에 빠지며, 역설적으로 다음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인셉션>에 나온 펜로즈의 계단을 기억하는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로저 펜로즈는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마 우리츠 코르넬리스의 작품에 펜로즈의 아이디어가 자주 등장하는 데, 위의 작품 이름이 바로 '상승과 하강(Ascending and Descending)' 이다. 오르락내리락 영원히 되풀이되는 2차원의 역설은 3차원의 인생에 흔히 비유되곤 한다. 이 계단이 출연한 <인셉션>이 꿈과 현실의 구분, 다시 말해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이야기한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지 차원이 다를 뿐, 영화나 인생 모두 상승 과 하강이 반복되는 굴레라는 것이다. <더 폴>은 이런 심벌 하나 없이 상승의 부재로 상승을 현상하는 데 성공한 영화다.
놀란 언급을 이어서 하자면, 그의 배트맨 트릴로지는 하강이든 상승이든 그 이미지가 너무 선명하다. <더 폴>은 하강이 끊임없이 나오는 반면 상승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극중극의 등장 인물을 다 죽여놓고 '로이가 자살을 포기하는 것'으로 상승을 논하 기엔 다소 부족하지 싶다. 상승의 부재는 이 영화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우물에서 기어코 올라온 브루스 웨인이 배트윙에 폭탄을 매달고 날아가는 영웅적 엔딩도 멋은 있지만, 매일 추락하고 다시 날아오를 기회는 거의 없는 스턴트맨이 우리 인생과 더 닮아 있지 않나. 후자가 몰입하기 훨씬 쉽달까.
하반신이 마비된 로이는 병실에 누워 알렉산드리아에게 엉터리 천일야화를 들려준다. 스토리라인이 엉망진창에 중구난방이다. 로이가 스턴트를 하던 그 시절 영화가 그랬고, 사고로 망가진 그의 멘탈이 그러하다. 이 극중극은 '잘못 만든 영화'에 대한 은유이며 고통으로 엉망이 된 관객 개개인의 삶과 조응한다. 로이의 이야기는 비주얼은 훌륭하나 기승전결이 전무한 의식의 흐름에 가깝다. 이는 감독의 다른 영화가 받는 혹평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엉터리 극중극은 결국 로이의 영혼을 구원하며 훌륭한 영화의 위상에 오른다. 나의 가짜 명언이 통하는 순간이다.
<더 폴>은 28개국 로케이션으로 촬영했으며 CG를 최소화했다. 영화의 외적인 화려함은 로이의 시궁창 같은 현실과 대비되며 큰 아이러니를 자아내는데, 이 연출은 극극중극의 관계뿐만 아니라 극-현실의 관계와도 맞닿아 있다. 로이는 극중극의 화자이자 영화 창작자를 상징한다. 잘못 만든 영화도 알렉산드리아 같은 관객이 있어 의미가 생긴다. 이 은유는 반대로도 작용한다. 로이처럼 고통 받는 관객을 알렉산드리아의 영화가 구원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고로 두 인물은 스토리텔러임과 동시에 리스너다. 극중극과 극, 극중극과 현실 사이의 대비감을 주기 위해, 관객 개인의 삶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천일야화의 비주얼은 반드시 화려할 필요가 있었다.
촬영 당시 6살이었던 카틴카 언타루. 루마니아 태생이라 실제로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리 페이스는 촬영 내내 정말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인 척 휠체어를 탔고, 병실에서의 대화도 애드리브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소녀가 로이를 점점 알아갈수록 정말 사랑 에 빠지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르핀을 훔치러 갔다가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보고 소스라치듯 놀라던 반응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물론 영화는 로이의 천일야화 처럼 가짜다. 만신창이인 현실에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가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는 영화 내용과 주제 의식에 딱 알맞은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로이는 끝내 자살을 포기하고 자신을 하반신 마비로 만든 영화 를 다른 환자들과 함께 감상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엔딩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삶을 포기하게 했던 주범을 지긋이 응시한다. 이 극중극은 얼핏 봐도 형편없는 영화로 보인다. 하지만 상관없다. 알렉산드리아가 엉터리 천일야화에 감복했듯 적어도 병원 어린이 들은 영화에 푹 빠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영화의 기적을 믿는가? 훌리오가 눈을 감는 것으로 대답했다면 로이가 삶을 살기로 한 결정이 충분한 대답이 되리라 본다. 삶은 늘 고통스럽다. 추락이 엄습한다. <더 폴>은 추락의 극복이 멋진 비상이 아닌 '회생'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추락에서 구원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기적이 어디 있으랴.
<더 폴>은 극장에서 안 보면 손해인 영화입니다. 현재 전국 CGV 및 독립영화관에서 지금도 상영 중이며, 타셈 싱 감독의 내한 일정까지 확정되었습니다. 내한 기념 GV 티켓은 감독 본인이 요청해 신설한 추가 9회차까지 모두 품절되었네요.
저는 2006년 개봉 당시에는 보지 못했고 작년 말에 씨네큐브에서 처음 봤습니다. 어릴 때 한 번 보고 성인이 되어 다시 봤다면 기분이 더 남달랐겠죠? 아직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꼭 극장에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4.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