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 백> (2024) 리뷰
나보다 뛰어난 재능의 벽에 부딪히는 경험.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마냥 좌절할 필요는 없다! 분야를 막론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압도적인 누군가에게 무력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객관화는 학습 능력과 학습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타인의 강함을 인지했다는 건 당신이 다음 단계로 도약할 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롤을 안 하면 페이커가 얼마나 잘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단계를 벗어나야만 범의 진가를 알 수 있다. 4학년 때 쿄모토의 그림을 처음 접하고 자극을 받은 후지노는 2년간 드로잉에 매진했다. 그렇게 비로소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하더라도 영영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확신했으니까. 외부 세계에 관한 주관적 판단은 객관적 메타인지에 근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후지노는 하룻강아지를 막 벗어난 중급자, 쿄모토는 자신을 하룻강아지로 여긴 호랑이 같다.
<룩 백>은 쿄애니 방화 사건을 추모하는 헌정작이다. 비극을 추모하는 차원을 넘어, 세상 모든 창작자가 느끼게 될 필연적 고통에 진솔한 위로를 건넨다. 원작자 후지모토 타츠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기에 더욱 진정성이 느껴진다. 남들이 오타쿠라고 싫어할 거라며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라던 친구의 대사는 후지모토가 어릴 적 실제로 겪은 일을 반영했다. 그는 일본의 카연갤쯤 되는 '니트샤'에 작품을 업로드하던 아마추어였다. 후지모토란 이름을 만화계에 알린 작품은 <파이어 펀치>와 <체인소 맨>이지만, 아마추어 시절부터 데뷔 초창기 무렵까지의 그는 단편만 투고하던 단편 전문 만화가였다. 이때 <룩 백>은 <안녕, 에리>와 함께 <체인소 맨> 2부 연재 전의 공백기 동안 발표한 단편이다. 두 작품 모두 그가 만화가로 데뷔하여 겪은 일과 감정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후지모토가 지난 커리어를 돌아보며 자성하는 작품으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다.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작가의 분신과 같은 두 인물이 창작하며 느끼는 열등감과 고뇌 등의 감정이 극의 중심이 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점차 변화하며 생기는 묘한 긴장감이 재미를 더한다. 두 인물의 구도는 상호의존성을 띈 역학 관계로 묘사된다. 만화가에게 꼭 필요한 창의력을 지녔지만 작화가 약점인 후지노와, 뛰어난 작화력을 지녔지만 주도적으로 '창작'할 용기가 없는 쿄모토는 서로를 의존적으로 제약하며 동시에 공생한다. 서로의 등을 의식하며 조금씩 전진한다.
그림 실력이 압도적인 쿄모토에게 후지노가 일방적인 열등감을 느끼며 분투하는 관계로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쿄모토는 후지노의 양보가 없었다면 학급 신문에 만화를 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히키코모리다. 그런 쿄모토 입장에선 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매주 만화를 연재한 후지노가 엄청난 프로페셔널로 보였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룩 백'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백'의 사전적 정의는 등, 과거, 그리고 '배경'이다. 배경 그리기는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실제 만화계에서 배경은 어시스턴트의 몫이 된다. 단조로운 반복 작업임에도 컷마다 다르게 그려야만 하는 괴로운 노동이다. <룩 백>은 배경 그리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 까닭에 대사 없이 등이나 배경만 있는 컷을 50장 넘게 넣었다.
두 사람 중 유독 후지노의 등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쿄모토처럼 자신감이 부족해 망설이는 누군가가 후지노의 등을 보고 따라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기 위함이다. 모든 창작자를 응원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모든 창작자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다. 만화가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 낮은 자세로 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입시 미술 교본과 <주간 소년 점프>만 가득했던 책장이 <샤크 킥> 단행본으로 채워진 장면에서, <체인소 맨> 성공의 공로를 독자에게 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을 요구하는 예술 전반에서 거론되는 난제가 있다. 우리는 타고난 '재능충'을 이길 수 없을까? 또는 부단한 노력이 재능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 난제에 관해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이 있다.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없지만, 재능은 결국 식기 마련이다. 재능만으로는 롱런할 수 없다. 이 논쟁이 서글픈 이유는 끝내 살아남는 상위 0.1%는 타고난 재능과 함께 노력도 쏟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노력은 재능에 앞설 수 없다.
<룩 백>에서 과연 재능을 상징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도 꽤 논쟁거리다. 나는 어떻게 보더라도 후지노가 재능의 화신이라 생각한다. 초등 4학년의 나이로 매주 다른 소재의 4컷 만화를 연재하는 성실함과 창의력, 중학생이 되자마자 쿄모토와 팀을 꾸려 작품을 구상해 1년 만에 준입선하는 추진력,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7편의 단편을 마치는 작업량까지. 진정한 재능은 '끝까지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가 의자에 앉아 시종일관 작업하는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이 이를 잘 보여준다. 노력도 재능이다.
현대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창의력이지 원본의 재현이 아니다. 물론 사실주의 사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서민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민중미술로서 큰 의의가 있다. 대중이 사실주의 용어를 오남용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다.
작중 후지노는 한 번도 쿄모토의 작화 실력을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쿄모토 또한 끝까지 후지노의 초등학생 시절 4컷 만화만큼의 창의력도 보여준 적이 없다. 이처럼 <룩 백>은 창작 전반에서 어떤 능력이 제일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아야 하는지 관객에 묻고 있다. 양극단의 두 주인공을 내세워 관객 각자가 더 가치 있는 재능이 무엇인지 저울질해 보도록 유도한다. 적어도 초반에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룩 백> 역시 후지노의 창의력에 손을 들어줬다는 생각이다.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예술을 하기 위해 떠난 쿄모토가 결국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끝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앞서 말했듯 <룩 백>과 이듬해 발표된 단편 <안녕, 에리>는 상호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때 <안녕, 에리>의 주요 테마가 되는 '판타지'를 언급해야 하는데, 요약하면 모든 창작물에는 조금의 판타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환상의 정도, 표현 방식, 전달 과정, 그리고 이를 판단하는 개인의 도덕적 기준과 사회적 관점의 차이는 전 세계 창작물의 개수만큼 존재할 것이다.
<안녕, 에리>의 판타지는 폭발이다. <다크 나이트>의 병원 폭파 씬을 오마주했다고는 하나, 주제 의식 측면에서는 오카모토 타로가 남긴 희대의 명언, “예술은 폭발이다”를 참고했다는 데에 500원 건다. <룩백>의 판타지는 문틈으로 흘러 들어간 4컷 만화다. <안녕, 에리>에 비해 현실과 판타지의 구분이 명확한 편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타지의 농도가 아니라, 판타지를 수용하는 각 등장인물의 태도다. 폭발을 등 뒤로 의연하게 걸어 나오는 유우타와 관객을 등진 채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는 아주 닮았다.
<체인소 맨>의 성공 이후 1부를 마치고 휴식기에 연재한 두 단편 만화가 독자에게 시사하는 점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작가 별명인 단편의 악마, 1화 한정 만신의 이미지가 더 공고해졌다. <체인소 맨> 2부가 호평을 받지 못했기에 더욱 그렇다. 아마 후지모토는 재연재를 하기 위해 그간 만화를 그리며 걸어온 여정을 되돌아보고, '그림 그리는 행위’의 가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룩 백>은 그 의미를 비극에 대한 위로와 창작자 간의 느슨한 연대, 그리고 팬을 향한 감사함으로 규정했다. <안녕, 에리>는 한발 더 나아가 자신만의 특징인 영화와 만화 세계의 결합을 더 과감히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한편, 매체적 특성을 거부하고 만화를 영화처럼 연출하는 그의 작품이 마침내 영화가 되어 극장에 상영됐다는 점은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이번 작품이 <안녕, 에리>의 폭발 엔딩을 다시금 오마주한 걸 보니, 다음 영화 개봉도 조만간이지 싶다. 기대하고 있겠다.
후지모토는 <룩 백>을 통해 자신이 창작자로서 슬럼프에 빠졌음을 고백했다. 위로와 연대에 집중한 나머지 슬럼프는 <안녕, 에리>까지 이어지고 만다.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고민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터다. 그 해답은 에리의 대사에서 어렴풋이 찾아볼 수 있다. 영화가 재밌었다고 말해주는 관객.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만화를 재미있게 봐주는 독자와 동의어다. 흔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한다. 쿄모토가 세상에 나가려 한 이유도 후지노를 통해 소통 없는 예술은 무의미하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등을, 내 만화를 봐줘서 감사합니다. 이제 2부 그리러 가 볼게요.”
사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장편 만화를 제대로 본 건 <파이어 펀치> 하나 뿐입니다. <체인소 맨>은 초반부부터 몰입이 되지 않아 별 재미를 못 느끼겠더라고요. 그의 작품 세계 전반과 공백기에 그가 느꼈을 감정을 더 잘 이해하려면 물론 만화를 보는 게 더 좋겠죠. 대신 저는 거의 모든 단편 만화를 봤으니까요. 후지모토 타츠키 단편집은 교보문고에도 있습니다.
영화와 만화를 모두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만화가가 얼마나 영화에 미쳐있는지 잘 아실 테죠. 그런 마니악한 감성이 때로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인데요. <룩 백>은 원작이나 애니메이션이나 그 영화광적인 면모가 좋은 방향으로 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곳곳에 숨은 오마주를 찾는 재미도 쏠쏠해요.
지금은 극장 상영이 모두 끝났습니다. OTT에 올라온 <룩 백>을 보고 "어, 뭐야. 러닝타임 57분?"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가는 후유증이 꽤 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창작자라면, 무언가에 몰두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슴 뭉클해질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