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폴리 아 되> (2024) 리뷰
흔히 예술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은 반비례하는 관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두 단어는 반대어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대중 영화에도 예술성이 있고, 예술 영화에도 대중성이 있다. 대중은 보통 두 요소가 적당히 공존하는 작품을 선호한다. <조커: 폴리 아 되>를 ‘예술성에 심취하여 대중적으로 실패한 영화’로 보는 세간의 평가가 내게 그다지 와닿지 않는 이유다.
이번 속편은 전편 <조커>가 대중성과 예술성의 공존에 성공하며 사회에 불러일으킨 나비 효과를 엄중히 의식한다. 오프닝의 그림자 애니메이션을 통해 조커와 아서 플렉이 ‘아치 에너미’ 관계라는 것을 보여줬듯, 두 영화는 서로를 부정하며 공존한다. <조커: 폴리 아 되>가 암시하는 온갖 두 존재의 공존 가능성은 대중성-예술성 관계의 반복이다. 공존이 어렵지만 물과 기름처럼 딱 분리할 수도 없는, 이 영화처럼 난잡한 불가분의 관계.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라라랜드>를 보며 노래 좀 그만하라는 사람은 없다. 뮤지컬은 형식이다. 작품의 완성도나 대중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아니다. 이 영화도 뮤지컬을 수단으로 선택했을 뿐,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아서와 리에게 뮤지컬은 소통 수단이며, 관객에겐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는 연출로 기능한다. 뮤지컬이 부여받은 역할은 명확하다.
“제발 노래 좀 그만해”라는 대사로 영화가 직접 인정하듯, 노래가 많은 건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노래가 많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뮤지컬은 아서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등장한다. 하지만 사회취약계층인 그는 관련 교양을 쌓지 못했다. 대신 각종 올드 팝송이 뮤지컬 넘버를 대체한다. 뮤지컬은 이 영화가 대중성과 예술성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두 요소 간의 불협화음은 아서의 뮤지컬처럼 불완전하고 기괴하다. 그에게 뮤지컬은 도망친 곳에 불과하며, 거기에 낙원은 없다. 뮤지컬을 보고 있기 불편하다면 창작자의 의도가 잘 전달됐다는 뜻이다.
1999년 한스 티스 레만의 저서 <포스트 드라마 연극>의 출간 후 전통적 드라마 형식을 거부하는 새로운 형태의 연극이 부상했다. 관객을 연극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극, 무용과 연극을 결합한 탄츠 테아터 등을 넓게 잡아 모두 포스트 드라마 연극이라 한다. 레만은 연극이 ‘공동체적인 수용 형식을 가진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연극과 영화는 실존하는 공간에 가상의 세계를 꾸미고 이를 감상하는 관객이 수용하며 완성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에리카 피셔 리히테는 연극의 수행성을 강조했다. 관객과 배우가 같은 시공간을 체험하며 상호 교류하는 소통 과정을 중시했다. 이 영화는 레만의 정의와 리히테의 수행성을 착실히 따랐다.
오직 아서와 리만 뮤지컬의 주체인 것이 아니다. 뮤지컬은 아서와 리의 소통 수단일 뿐만 아니라, 연극 구성의 모든 주체가 서로 교류하며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삽입된 전위적 장치로 작동한다. 그 과정에서 아서의 조커 연극은 고담시를 매료했다. 다만 현실의 대중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다.
자신이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가 되면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영화 속 트래비스가 정치인을 노렸듯 레이건 대통령 암살을 실행했고, 백악관 대변인에게 부상을 입힌 후 정신병원에 수감됐다. 만약 <조커: 폴리 아 되>가 고담을 마구잡이로 정복하는 통쾌한 다크 히어로 영화였다면, 이미 사회적 논의가 되어버린 문제아가 과연 열렬히 환영받았을까? 모방 범죄의 책임을 오롯이 영화에 전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조커>는 악이 탄생하는 근원을 살펴보자고 했지, 스스로 악이 되어보자고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속편에서 책임을 졌다.
토드 필립스는 소외 계층 남성, 이른바 ‘인셀’이 자신을 조커에 투영하는 사회 현상과 모방 범죄에 반기를 들기로 결심했다. 망상 속으로 줄행랑친 트래비스가 히어로가 아니듯, 아서와 조커도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조커가 ‘아무도 아서를 지지해 주지 않아 생긴 사회 불행’이자 가짜 히어로임을 연거푸 강조하며 두 편을 끝으로 시리즈를 마쳤다.
전편이 약자를 향한 사회의 모멸과 무관심, 이로 인한 악의 탄생 배경을 선보였다면, 속편은 악의 서사화로 지적받았던 전편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시종일관 아서에게 재판을 내린다. 어떤 의미로는 인민재판이기도 하다. 작중 아서가 받는 재판에는 살인이라는 합당한 과오가 있으나, 현실에서 벌어진 여러 논란과 사고에 대한 책임마저 아서가 감당해야 하는가?
조커 시리즈는 코미디 연작으로서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다. 조커가 무대(법정, court)에서 열린 코미디(재판)를 망치면서 영화의 평가도 바닥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조커에게 사회적 사망 선고를 내리다니, 인민재판보다 더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전부 감독의 의도였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렴 영화의 실패를 의도하고 만드는 감독은 없다. 본인이 창작한 캐릭터를 인민재판에 회부하고 시리즈를 폐기하듯 종결한 상황이 빌어먹을 코미디처럼 보이기는 한다. 피의자가 사망하면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이다. 그러나 아서가 죽어도 조커의 재판은 끝나지 않는다.
한편, 리가 본 영화는 영화 속 미지의 영화 또는 조커 전편의 은유다. 리는 실제 영화의 관객과 영화 내외에 존재하는 조커 추종자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위선적인 정의를 심판하는 히어로, 고담의 분노와 광기의 상징을 동경한다. 리는 아서가 아닌 조커를 숭배하며 그마저도 뮤지컬로만 소통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아서와 조커 추종자는 화합할 수 없다. 전편과 속편의 관계도 그렇다. 영화는 전편의 흥행이 낳은 조커 현상과 모방 범죄, 공유된 망상을 해체할 도덕적 의무를 수행한다. 자신의 배에 칼을 꽂으며.
토드 필립스는 여론을 보고 이번 속편을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발언을 믿는다. 비록 아서를 더욱 가혹하고 비참한 환경에 빠뜨렸지만, 전편부터 조커를 대하는 태도는 일관적이다. 조커의 탄생을 지극히 악한 개인의 일탈로 표현하지 않았다. 조커를 만든 건 모순된 사회 구조, 자본 계급의 부당한 착취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다. 작중 제2의 조커가 탄생했듯, 조커 현상은 유사한 형태로 세상에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이런 조커는 내가 원한 조커가 아니다, 히스 레저 같은 조커를 원했다. 아서가 이 평가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나다운 게 뭔데?” 조커가 대중과 미디어에 의해 재해석되고 상징으로서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되려 그 정체성은 특정할 수 없이 모호한 상태가 된다. 조커는 원작 코믹스부터 원래 그런 캐릭터였다. <다크 나이트>에서 입이 찢어진 이야기를 다르게 말했던 것처럼, 조커는 베일에 싸인 캐릭터다. 조커가 된 아서가 공허함에 시달리는 것은 필연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체성과 대중의 기대 사이에서 어떤 주체적인 선택도 하지 못한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이다.
아서는 그림자에 예속된 신세로 숨을 거뒀지만, 상징이 되어버린 조커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대중이 열광했던 전편의 조커가 진정한 조커였을까? 아니면 히스 레저의 조커인가? 언젠가 또 다른 조커가 미디어에 등장하면, 지금처럼 이 피카레스크 신드롬을 두고 다들 옥신각신 다투게 될 광경이 눈에 훤하다. 부디 ‘조커다운 조커’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 이후 발생한 모방 범죄와 정신 질환자를 향한 오해에 책임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증거다. 엄마와의 비정상적 관계, 우울증, 트라우마 등 보와 아서는 무척 닮았다.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특징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둘 다 환자다. 조커는 어머니의 학대로 탄생했다. 아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고쳐야 할 병이다. 그러나 고담 시민들은 병을 영웅으로 등극시켰고, 대중은 영웅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속편을 원했으며, 속편의 제목이 곧 병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신 질환자의 삶과 고통에 관심이 없다. 조커가 그를 괴롭힌 금융사 직원과 동료를 죽일 때, 관객은 스크린 밖에서 은밀한 희열을 만끽했을 뿐 아서의 개인적인 아픔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폴리 아 되는 조커의 가면 뒤에 숨어 집단적 망상 세계를 향유하고자 하는 불특정 다수의 병명이다. 그러니 조커 시리즈는 사회 고발 다큐멘터리일 수밖에 없다.
아서는 처음 법정에 섰을 때 추종자들을 바라보며 양손을 들고 V 사인을 한다. 리처드 닉슨 특유의 제스쳐를 오마주한 장면이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을 발표할 때조차 환히 웃으며 V자를 내보였다. 탄핵당하는 대신 그는 자진 사임하며 물러났고, 후임 제럴드 포드로부터 재직기간 5년 동안 저지른 모든 형사 범죄를 조건 없이 사면받았다. V가 나올 만하다.
토드 필립스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조커를 용서해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파이트 클럽>처럼 제작 의도와 달리 이상한 지지자 집단이 생겨 감독 입장이 퍽 곤란했을 터다. 그는 조커 현상에 영화 창작자로서 일말의 책임을 졌다. 그것만으로 속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어떤 평론가는 전편에 의미 없는 찬양이 난무했다면 속편은 존재 의의를 증명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조커라는 증상의 본질을 해결해야 할 의무는 대중문화가 아닌 사회와 시대에 있으며, 영화는 지금도 세상과 소통하며 공동체적 수용 형식을 따르는 중이다. 영화는 현실사회의 반영이란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전작 <조커>의 예고편 홍보 문구는 '누가 그를 웃게 만들었는가'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 아서를 조커로 만들었는가'가 되겠네요.
반면 <조커: 폴리 아 되>는 삽입곡 That's Entertainment의 가사인 '온 세상이 바로 무대(The World is a Stage)'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속편에서 아서에게 허락된 무대는 오직 법정 뿐이었고, '온 세상'은 조커를 엔터테인먼트로 대했죠. 고작 "결국 조커를 만든 건 세상이야!"에 불과한 우화 아니냐고요? 일부 동의합니다. 그런데 팩트잖아요.
닉슨 대통령의 무조건 사면은 권력자 개인의 죄를 사하고 처벌을 피하고자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대통령을 뽑은 대다수 국민의 잘못된 선택 또한 용서하고 사회를 통합하자는 의미였죠.
영화가 "조커를 만든 사회여, 반성하라!"라고 외칠 때, 너무 자연스럽게 자신은 그 사회에 속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속편이 과도하게 비난받는 이유도 이런 사회적 맥락이나 반발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조커: 폴리 아 되>를 윤리 의무나 사회 현상학적 관점에서 쉴드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영화 자체가 이렇게 심하게 욕먹을 영화가 못돼요. 의견이 다르다고 죽일 놈 취급하며 조커를 호평한 평론가를 찾아가 인신공격하는 세태가 이 영화보다 몇백 배는 더 끔찍합니다. "내 얘길 듣지 않는군요."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4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