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2024) 리뷰
시시포스는 신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 올리는 형벌을 저승에서 무한히 반복해야 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신화를 인간의 덧없는 인생에 빗대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썼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먹고, 일하고, 씻고, 자는 루틴을 되풀이해야 한다.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차피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우리는 왜 조금씩 죽어가는 와중에도 의미를 찾으려 하는가. 카뮈는 삶을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그토록 특별한 가치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살하지 않을 이유 한 가지를 간직하라고 역설한다. 신을 농간한 시시포스는 무의미한 노동을 묵묵히 수행함으로써 죽어서도 신을 희롱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반복되는 일상을 향한 헌사처럼 보이지만, 이면으론 삶의 권태에 빠진 관객에게 ‘왜 자살하지 않는지’ 도발적으로 물어온다.
2020년 개최 예정이었던 도쿄 올림픽을 위해, 일본은 시부야구 화장실 17곳을 새로 단장하는 ‘The Tokyo Toilet’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도 타다오, 이토 도요 등과 함께 여러 분야의 디자이너, 비주얼 디렉터, 광고 기획자 등이 한데 참여함으로써, 실용을 넘어 예술과 문화로서의 가치를 제시했다. (라고 일본은 말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본디 이 프로젝트를 위한 짧은 단편영화나 사진집이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올림픽이 1년 연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빔 벤더스 감독이 합류하며 지금의 장편 극영화가 되었다.
유니클로의 모 기업 패스트리테일링의 이사이자 프로젝트의 기획자였던 야나이 코지가 영화의 제작을 맡았고, 주연인 야쿠쇼 코지가 직접 제작을 지휘했을 만큼 큰 프로젝트 아래 탄생한 작품이다. 일본이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며 품었던 야욕의 크기를 간접적으로 가늠할 만하다.
빔 벤더스가 오즈 야스지로의 엄청난 팬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퍼펙트 데이즈>는 주인공의 이름이 ‘히라야마’로 동일하다는 점 외에도 <꽁치의 맛>을 다방면에서 직간접적으로 참조했다. 문제는 해당 영화가 일반적인 대중 관객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작품이란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히라야마의 조카 니코가 읽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1>은 국내 출간도 안 된 책이다. 영화 하나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일본 고전 영화와 미출간 도서, 삽입된 여러 음악까지 섭렵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다.
영화 내 레퍼런스는 양날의 검이다. 과거 엄청난 흥행을 거둔 시리즈의 속편에서 전편과 관련한 오마주가 등장한다면 팬들은 환호성을 지를 거다. 그런데 마블처럼 IP 확장을 위한 자기참조를 연거푸 반복한다면 어떨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그저 피로할 뿐이다. <퍼펙트 데이즈>는 모르면 100% 즐길 수 없다는 한계를 온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여러 레퍼런스를 모른 채 감상해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야쿠쇼 코지의 연기는 언제나 놀랍다. <큐어>에서도 <우나기>에서도 그 눈빛에 담긴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작품엔 대사조차 거의 없다.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어쩌면 서사랄게 따로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문법은 과묵하지만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하는 캐릭터 히라야마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 영화가 일상을 향한 찬미로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까닭은 주인공의 일상이 그리 비슷하게 반복되지 않는 데 있다. 오히려 히라야마의 루틴은 이후 서사 전개의 방아쇠로서, 처음부터 균열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매일 아침 그를 깨우던 할머니의 빗자루질 소리는 홀연히 사라지고, 동료 직원은 근무 중에 일탈을 일삼다 갑작스레 결근한다. 가출한 조카가 불쑥 찾아오는가 하면 단골 선술집 여주인의 전남편이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영화는 히라야마의 일상을 보존하는 데 관심이 없다. 일상은 되려 철저히 부서지며, 끊임없이 변화가 틈입한다.
히라야마의 과거사를 추측하려는 시도는 해석의 여지를 좁히는 과정에 불과하기에 큰 의미가 없다. 길 잃은 아이를 돕는 장면, 여동생과 조우하는 장면 등에서 그가 과거에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히라야마는 부유한 특권층에 깊이 타락했던 과거가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감독과 배우 모두 이와 관련해 불필요한 인터뷰가 너무 잦지 않았나 싶다. 이 인물의 과거를 상상할 자유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 되어야 비로소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만, 니코가 읽던 책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1>의 주인공 소년은 집에 갇혀 학대당하며 산다. 어느 날 어머니가 사 온 자라와 친구가 되는데, 알고 보니 식용 자라였다. 자라가 끓는 물 속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본 소년은 어머니를 살해한다. 히라야마가 여동생을 만난 날 밤, 첨벙이는 물소리가 들리는 꿈을 꾼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과거 아버지에게 학대받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히라야마는 그런 과거의 트라우마도 잊지 않겠다는 듯 카메라로 순간을 기억하고 저장한다. 그가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일련의 행위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닌다. 영화의 가제는 ‘코모레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었다고 한다. 특정 순간에만 존재하는 단 하나의 코모레비를 포착하고 촬영하는 행위는, 표면적으로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안분지족의 삶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영화적 세계와 현실을 교묘히 연결하여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담겨있다.
이 영화는 히라야마의 시점 쇼트로 바라본 이미지를 나열하며 시작한다. 그가 필름 카메라로 촬영할 때는 그의 카메라 시점으로 전환된다. 니코가 청소하는 그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고, 또 그는 공원에서 니코를 찍는다. 이때 그가 마음에 드는 사진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은 영락없이 영화 편집의 은유다. 무의미한 일상물의 나열, 시점 쇼트와 카메라는 모두 일상이라는 평범한 소재를 ‘영화화’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다.
빔 벤더스는 “찍는 쪽은 픽션 캐릭터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찍히는 쪽은 픽션이라는 점을 잊은 것 같았다”고 언급했다. 즉, 영화는 촬영 단계부터 현실과 영화를 뒤섞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히라야마는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흑백 몽타주의 꿈을 꾼다. 이때 꿈의 흐릿한 형상은 이내 디졸브를 통해 그의 현실 세계와 비선형적으로 연결된다.
히라야마와 선술집 주인의 전남편 토모야마는 그림자밟기 놀이를 한다. 그림자는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 이는 영화와 다큐멘터리, 픽션과 현실이 과연 병립할 수 있는가에 관해 빔 벤더스가 커리어 내내 치열하게 몰두한 난제이기도 하다. 영화란 픽션을 현실에 담아낸다는 근원적 모순을 지녔다. 이 모순에 대해 <퍼펙트 데이즈>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 그림자는 곧 흑백 사진, 흑백 꿈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어, 연결된 세상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지.” 이 영화는 그림자를 겹치면 어떻게 되는지 끝내 단정 짓지 않는다.
다시 알베르 카뮈의 제언으로 돌아오면, 히라야마가 자살하지 않고 삶을 ‘퍼펙트 데이즈’로 여기며 긍정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카뮈는 부조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반항’을 내세운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식하여, 설령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매일 바위를 밀어 올리라고 고취한다.
“뭘 그렇게까지 하세요? 어차피 더러워지는데.” 동료의 대사로 영화는 관객에 묻고 있다. 우리는 왜 살까? 어차피 죽는데. 관객은 일상을 성실히 다듬는 청소부에게서 우회적 힌트를 얻을 뿐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인간은 실존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삶의 본질을 만드는 건 각자가 인생을 살아가며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사명이다. 히라야마가 정말 그의 일과 직업을 사랑할까?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일상이 그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듣는 그 표정이, 나에게는 못내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일상이 반복되는 구조는 로드무비의 거장인 빔 벤더스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히라야마의 일상은 매번 틀어지고 슬픔과 기쁨이 혼재한다. 단지 규모가 작고 소박할 뿐 이 영화 또한 일종의 로드무비인 셈이다. 삶이 그 자체로 실존의 이유가 되는 카뮈의 사상은 여정 자체가 장르의 목적인 로드무비와 무척 닮았다.
<퍼펙트 데이즈>를 일상 예찬 힐링 영화로 여기는 관객 분위기가 내겐 다소 어색하다. 히라야마가 극 중 보여준 라이프스타일은, 모종의 이유로 상류사회에서 내쫓긴 이후 죽음을 탐닉하던 그가 ‘죽지 않기 위해’ 선택한 고육지책이 틀림없다. 그의 루틴은 강박적이다.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약물처럼 느껴질 정도다. 눈물이 고인 채 미소 짓는 마지막 장면은, 윌리엄 제임스의 명언을 인용하는 노홍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행복해thㅓ 웃는 게 아니라 웃어thㅓ 행복한 겁니다! 여러분 웃으thㅔ요!
<퍼펙트 데이즈>에서 일상, 반복 등의 키워드가 중요한 테마인 건 사실이지만, 결코 소시민적 삶을 예찬하는 힐링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창시절부터 실존주의 서적을 탐독한 나머지 비관적인 사람이 되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많은 관객이 따스히 일렁이는 코모레비처럼 이 영화를 따뜻하게 받아 들였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죠. 중요한 건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하는 데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히라야마의 일상이 정말 행복해 보이나요?
한편, 저는 이 영화의 탄생 배경 때문에라도 이 영화를 아니꼽게 보게 되곤 합니다. 도쿄 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 프로젝트라는 점, 그 올림픽이 정치사회적으로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강행했다는 점, 토일렛 프로젝트를 후원한 '일본 재단'은 A급 전범인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극우 단체라는 점까지.
오즈 야스지로의 오마주가 빈번히 등장하고, 영화 자체가 일본 손님 접객 문화인 '오모테나시'를 기반으로 시작된 토일렛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전형적인 일본스러움이 철철 풍기는데 그것이 이 영화의 노골적인 무기이자 선전 전략이고, 이를 감출 생각이 전혀 없어 자못 불쾌한 느낌이 들기까지 하더라고요. 제가 예민한 걸수도 있지만.
일본의 7080 팝송에 대한 동경 또한 직접 음악을 삽입하는 것으로 표현했는데요. 내러티브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올드팝으로 퉁치려는 시도는 이게 빔 벤더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설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쿠쇼 코지의 얼굴을 보니 다 납득이 되네요.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4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