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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 어쩌면 봉준호의 커리어 로우

<미키 17> (2025) 리뷰

by 테리

<기생충> 이후 봉준호 필모그래피의 정점이 어떤 작품인지 실로 확실해졌다. 반대로, 그의 커리어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평이한 작품으로 손꼽히던 <설국열차>, <옥자>에게는 희소식이 있다. <미키 17>이 그 자리를 독차지할 예정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처음으로 할리우드 자본을 등에 업고 외국 배우만 캐스팅해 제작한 거장의 신작은 다소 밋밋하다. 주요 평론지의 평점만 보더라도 사실상 커리어 로우다.


“감독은 평생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든다. 그는 그걸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반복할 뿐이다.” 장 르누아르의 문장처럼 봉준호의 영화는 대부분 계급투쟁과 사회풍자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다. 이때 <미키 17>의 특성은 ‘봉준호 영화 세계의 집대성’에 있다고 본다. 문제는 그것이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의 과거 작품들이 지닌 각각의 개성, 미장센, 연출 등을 총망라하려는 의지는 느껴지지만, 각기 다른 지점에서 그 어떤 전작도 능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화려한 이름값에 비해 진부하고 무딘 결과물이 탄생했다.


현실성이라는 오리지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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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러팔로는 지미 팰런 투나잇쇼에 출연해 자신이 연기한 케네스 마샬을 옹졸한 독재자(petty dictator)로 칭했는데, 말 그대로다. 이를 데 없이 옹졸하고 하찮다. 그의 커리어 첫 악역 연기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캐릭터가 극도로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천하의 봉준호가 구상한 캐릭터가 맞나 싶을 정도로 깊이를 찾아볼 수 없는 악역이다. 그것이 되려 현실 세계의 독재자를 떠올리게 한대도, 단지 부차적인 장점일 뿐이다.


크리퍼가 ‘네이티브’고 우리 인간이 ‘에일리언’이라고 나샤의 입을 빌려 미국을 일갈하는 대사는 <미키 17> 전체를 통틀어 제일 처참한 순간이다. 이런 친절한 설명 없이도 날카롭고 짜릿한 주제 의식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던 감독 아닌가. 불과 몇 년 전 <기생충>이 상류층의 오만함과 허례허식을 직접적인 대사 없이도 강력하게 비판하며 전 세계 관객에게 설파한 업적이 기억에 생생하다. 미국인 관객의 평균적인 교양 수준을 고려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말할 속셈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봉준호식 우화는 나름의 현실성 덕분에 관객에게 공감받을 수 있었다. 80년대 군부독재와 폭력에 잠식된 남성상을 그린 <살인의 추억>부터 한국 사회의 이면과 미국 풍자를 담은 <괴물>, 이름하여 ‘처연한 계급 우화’ <기생충>까지.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언제나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 명료했다. <미키 17> 또한 공간이 우주로 확장되고 인종이 바뀌었을 뿐 우리 현실의 반영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현실성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옹졸하고 하찮은 독재자를 반동 인물로 설정하고(오히려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대로 슬프다), 폭력이 자행되는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다 보니 내러티브에 몰입하기 쉽지 않다. 극단적인 설정과 어울리는 격렬한 플롯이 호응하던가, 인물의 감정과 행동이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던가. 아무렴 둘 다 실패다. 다양한 사회 풍자는 할리우드식 질적 팽창엔 성공했을지 모르나, 이전 작품들에 비해 턱없이 레이어가 얇다. 양질 전환의 법칙이 꼭 통하는 건 아니다.


집대성의 실패는 곧 자기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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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봉준호의 과거 작품들을 레퍼런스로 하여 재창조하고 과거 작품 세계를 집대성하는 것이 <미키 17>의 본래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한 지점에서도 과거 개별 작품만큼의 탁월함을 보이지 못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주던 감독 특유의 장점은 온데간데없고, 유독 자기복제와 답습이 난무한다. 이런 한계 탓에 서사 전반의 난잡함은 더욱 부각된다. 플롯은 단순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무질서에 가깝다. 미키가 번호마다 성격이 조금씩 다르고 능력에도 차이가 있던 것처럼, 봉준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미키 17>은 가장 산만하고 일관적이지 않은 상태로 프린트된 복제품으로 보인다.


예컨대 케네스가 니플하임 행성 암석을 자르는 기념식 씬은 롱테이크로 촬영된 <살인의 추억> 논두렁 씬을 연상케 한다. 앵글 안에 위치한 모든 인물은 자기 세계에 몰두하며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존재한다. 케네스를 암살하려는 미키 18, 암석에서 튀어나오는 크리퍼, 케네스를 찬양하다가 언제 그랬냐는듯 도망치는 사람들, 이 영화적 어수선함은 쉽게 말해 개판이다. 이 우주선 개판을 논두렁 개판과 비교하여 기술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후자가 80년대 한국 경찰과 형사의 실태를 2분짜리 쇼트로 한 번에 보여준 반면, 전자는 서사를 보조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두 아기 크리퍼 중 루코는 죽고 조코는 각종 인체실험을 당한다는 점도 미키 18과 17의 명운을 암시하는 뻔한 연결에 그친다. <살인의 추억> 속 두 형사가 강간범과 피해자 오빠로 읽히는 강렬한 은유와 비교하면 역시 전작에 비해 한참 모자라다. 과거 작품에서 보였던 스타일은 빈번히 반복되지만, 어떤 부분도 전작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봉준호의 근원적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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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가 한국을 넘어 월드와이드 감독으로 등극한 이래, 이러한 자기복제와 서사의 단순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특히 커리어의 저점으로 지목한 <설국열차>와 <옥자>, 이번 <미키 17>은 영어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째서 봉준호는 영어 영화를 만들 때, 혹은 외국인 배우를 기용할 때 이러한 일관된 단점을 드러내는 걸까?


비록 캐릭터가 평면적이지만 마크 러팔로는 처음으로 악역을 연기했다. 이때 연상되는 대표적인 캐스팅 사례는 <설국열차>의 틸다 스윈튼이다. 그의 경우 경력 동안 다채로운 인물들을 연기한 편이지만, 작중 너저분한 비주얼은 충격일 만큼 신선했다. 그런 신선함과 달리 전형적인 강약약강 캐릭터로 입체성은 부족했다. 아마 봉준호는 대중에게 특정한 이미지로 인식된 배우를 기용할 때, 기존의 이미지를 180도 뒤집는 역할을 맡기는 것을 일종의 원칙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사실 외국 배우에게만 적용된 원칙도 아니다. 살인용의자 박해일, 꾀죄죄한 원빈도 그렇다.


캐릭터가 전형성을 띄게 된 원인을 ‘유명 배우의 이미지 반전’에 집착한 부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미키 17>에서 전반적인 흐름과 어긋나는 캐릭터는 단 한 명 있다. 토니 콜렛이 맡은 일파 마샬이다. 물론 이 인물도 전형적인 악역이긴 하다. 하지만 에필로그에서 미키 17의 악몽 속 등장한 일파와 해당 씬은 어딘가 이상하다. 일파는 극의 전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이 심오한 에필로그는 더욱 사족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톤이 갑자기 호러로 변모하며, 일파는 러닝타임 내내 전혀 없던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이 아리송하고 불분명한 씬은 왜 필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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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벨만스>를 통해 봉준호를 이해하고자 한다. <지상 최대의 쇼> 기차 충돌 씬을 본 새미가 이를 자기만의 영화로 재현하려 했던 것처럼, 봉준호는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영화적 순간을 자기 세계 안에 소장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새미는 기차의 충돌에 공포를 느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화를 찍었다. 새미의 엄마 미치는 말한다. “자기만의 세상을 통제해 보려는 거야”


영화를 본 전 세계 관객은 대부분 자신이 친숙한 독재자나 부패 정치인을 떠올린다. 한국인인 입장에서 국내 정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 괴물을 몰아내도 똑같은 양상으로 그다음 괴물이 등장한다는 함의로 보였다. 에필로그에서 케네스가 복제되는 모습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괴물은 끝없이 출연한다는, 아주 무서운 진실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이 과연 사회가 형성한 인위적인 악습인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태생적인 악의 때문에 형성된 필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플래시백으로 연출된 악몽 씬은 미키가 나샤의 연설 중 꾼 백일몽이다. 잠깐, 케네스를 축출하고 나샤가 새 리더로 선출되는 결말은 봉준호치고 너무 희망차지 않은가? 만약 영화의 내용이 전부 미키의 망상이고 잠깐의 꿈이 진짜 현실이라면?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잔인하고 토니 콜렛이 출연한 <유전>, <이제 그만 끝낼까 해>보다 더 끔찍하다. 추측건대 봉준호의 공포는 잔혹한 현실, 모순된 사회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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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거대자본을 등에 업었다고 표현한 서두와 달리, <미키 17>은 자본과 작가주의의 경합 끝에 도달한 아슬아슬한 타협안에 가깝다. 절대다수의 보편적인 쾌락을 최고 가치로 삼는 할리우드와 봉준호의 예술 세계는 애초부터 그리 합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늘어놓은 다양한 주제 의식에 비해 깊이가 부족한 영화라는 평단의 비판에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일까? 봉준호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쫓은 가치는 무엇일까? 블록버스터의 성공 규칙을 준수한 것도 아니고, 놀란처럼 거대자본을 작가주의의 기반으로 마음껏 활용하지도 못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악인이 구조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면, 바뀌어야 하는 건 구조일 것이다. 캐릭터가 평면적인 이유, 서사의 설득력이 부족한 이유는 그의 영화 세계가 봉착한 시스템의 문제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전원이 바른 사람임을 전제로 한 구조에 문제가 있다면, 바뀌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구조 쪽인가?"


만화 <진격의 거인>에는 숱한 명대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위 대사를 특히 좋아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 세계관은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꼬집으며 이를 폭력이 성행하는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이런 설정이 관객에게 큰 공감을 불러냈습니다. 그런데 배경이 월드와이드로 넘어가면서 강박에 가깝도록 한결같은 그의 사회 풍자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느낌입니다.


배우의 연기력, 캐릭터의 입체성을 지목할 게 아니라 영화 세계를 구축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진단해야 할 때가 아닐지요. 물론 캐릭터의 입체성도 문제긴 하지만... 그건 순서를 보면 시스템의 문제로 말미암아 파생된 결과로 보이거든요.


<미키 17>은 봉준호의 손에서 탄생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종류의 영화입니다. <옥자>, <설국열차>에서 느낀 불안한 징조는 <기생충>에서 눈 녹듯 사라졌기에 더 그렇습니다.


아무쪼록 이 영화는 봉준호 필모그래피의 변곡점이 될 것입니다. 좋든 싫든 다음 작품에서 무언가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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