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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여진처럼 진동하는 아릿한 청춘

<해피엔드> (2024) 리뷰 - (1)

by 테리

일본 사회에 대한 단평, 체념의 정서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반복해서 겪을수록 내성이 생겨 점점 무뎌지기 마련이다. 우리 현대인은 역경에 순응하고 괴로움을 체화하며 수두룩한 내성을 만들며 살아간다. 이 생존 본능 덕분에 심신이 멍으로 얼룩지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


그런데 세상에는 여러 번 반복해도 내성이 잘 생기지 않는 일도 있다. 특히 죽음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일본 본토를 지배해 온 강력한 재난에 대한 불안과 공포.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재해의 위력 앞에서, 그들은 숙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으로 나름의 내성을 쌓았다. 내성이라 부르기엔 차라리 ‘습성’에 가깝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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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전체주의와 내면화된 체념의 문화를 프로파간다로 사용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미카제 차출을 거부한 조종사의 가족은 마을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일쑤였다. 비이성적인 군중심리가 모여 ‘이 명예로운 자살 공격에 성공하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라는 헛된 망상까지 품게 만드니, 조종사는 정해진 운명 앞에 어쩔 도리가 없어 삶의 의지를 단념하고 만다.


그런 맥락을 파고들수록 죽음의 미학을 예찬하고 다수를 위한 희생을 아름다운 죽음이라 포장하는 뒤틀린 집단정신은 일본 특유의 습성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열도의 지리적 특성상 폐쇄적인 문화가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온 나라다. 공동체가 형성한 질서와 규범에 대한 저항은 금기시된다. 젊은 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건 그만큼 일본이 평화롭다는 방증이라던 재무대신의 말도 일리가 있다. 정작 그 발언을 비판한 일본의 젊은 세대가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성취들을 엮어내는 새로운 사회파 감독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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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는 본능적인 불안마저 체념해 버린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사회 비판 영화이자, 지진에 대응하는 재난 영화이며, 청춘 영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세 종류의 장르가 러닝타임 내내 균형 있게 긴장감을 자아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소라 네오 감독의 장편 데뷔작임을 고려하면 이 작품이 시시각각 뿜어내는 역동적인 에너지와 그에 못지않은 섬세함이 무척 놀랍다.


<기생충>처럼 통렬하게 사회를 비판하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만큼 섬미하게 청춘들의 감정 변화를 담아낸다. 지난 수십 년간 일본 영화계가 배출한 상징적인 이름들,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와이 슌지, 소마이 신지, 기타노 다케시 등의 성취를 조금씩 고루 보여줬달까. 지나친 극찬일지도 모르겠지만 에드워드 양과 허우 샤오시엔으로 대표되는 대만 뉴웨이브의 정취까지 물씬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파시즘이 일상이 된 파놉티콘 일본 사회는 조지 오웰의 <1984> 또한 연상케 한다.


소라 네오는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제국주의 시기에 인위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라 지적한다. 주인공 5인의 다양한 출신 성분으로 그들의 존재 자체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그들이 놓인 환경은 다양성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경찰은 재일한국인 4세 코우에게 비국민이라는 이유로 거주증명서를 요구하고, 교장은 투표권도 없는 주제에 반항한다며 면전에 혐오를 내뱉는다.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정체성을 파시즘의 논리로 휘두르는 극우 정부가 유별난 판타지도 아닌 작금이다. 영화는 만연한 차별을 소리껏 비판하기보다, 개별 서사를 최소화하여 개인이 겪는 차별은 배경으로 둔다. 풀샷을 빈번히 활용하며 인물 뒤로 거대한 건물을 배치하고, 언제든 작은 균열로 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다는 불안을 도처에 심어 놓는다.


감독은 SF 작가 윌리엄 깁슨의 문장을 빌린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을 뿐이다.” <해피엔드>는 이미 현실 곳곳에 예정된 디스토피아를 한데 모아 시현함으로써, <1984>의 AI 감시 사회, <태풍 클럽>과 <키즈 리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청소년의 시선을 빌려 냉소한 세상, <너의 이름은>에서 다뤘던 재난을 대하는 일본 고유의 태도 등을 한 맥락 안으로 포섭한다. 굵직한 명작들의 힘을 빌려, 과거의 일본을 비추고 이미 현재에 도착한 근미래 일본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영리하게도 수많은 레퍼런스에 통일감을 부여하는 소재는 곧 지진이다. 현대 일본을 잠식하고 있는 보편적인 불안은 동일본 대지진이 선사한 정서다. 불현듯 지진이 엄습하는 <해피엔드>의 배경은 근미래지만, 관람하는 관객은 현실과 가까운 공감대를 느끼게 된다. 별다른 SF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불균등하게 배분된 과거의 성취들을 엮어 현대의 관객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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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관동대지진이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이유는 단순히 책임 전가나 분풀이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은 3·1 운동의 물결을 의식하며 자국 내 조선인의 민족운동을 경계하고 있었다. 누적된 정치사회적 불안의 에너지를 분출할 곳이 절실히 필요했던 일본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것만으로 손쉽게 배외주의의 참극을 실현할 수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동일본 대지진이 도호쿠를 휩쓴 후에도 여전히 남해 대지진에 대한 공포가 있다. 바로 100년 주기로 일어난다고 전해지는 대지진이다. 1923년 이후로 100년 하고도 2년이 더 지났다. 당장 내일 난카이 해구에 지진이 발생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장장 한 세기가 지날 동안 불안의 에너지를 건강하게 방류하는 방법을 학습하지 못했다. 체념할 수 없어 분노하고, 배타적인 혐오와 폭력을 발산하는 역사적 비극이 반드시 반복되고 말 터이다. 습성처럼 배겼기에.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코끼리를 미국 공화당에 비유했다. 공화당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전략은 늘 실패한다. 프레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타와 코우는 작은 진동에도 불안해하며 코끼리가 찾아올까 두려움에 떤다. 내진 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청춘의 불안을 완충해 주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그들은 재난민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코끼리의 존재조차 잊고 공포마저 체념했다. 지진의 덕을 보는 건설사에 입사하라고 말할 만큼 당연한 현실로 여긴다. 미숙한 청춘은 성장을 구실로 줄곧 흔들릴 운명에 놓여있다.


작중 지진 발생은 절대적인 횟수로 따지면 그리 많지 않다. 유타와 코우가 경험한 큰 지진 이후에는 여진에 가까운 낮은 진도의 진동만 종종 발생한다. 여진은 본진으로 약해진 지반에 균열을 불러온다. 두 사람의 우정은 그렇게 붕괴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흔들리던 날, 우정이 기울어졌다’란 카피 문구를 더 정확히 쓰면 우정이 ‘갈라졌다’쯤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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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를 사회고발, 재난, 청춘 영화로서 높이 평가한 반면, 성장 영화로 바라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성장 영화가 청춘을 주제로 삼기에 두 장르는 자주 혼용되지만, 청춘은 시기이고 성장은 변화다. 푸를 청에 봄 춘,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이창동 감독은 어린 나이를 그런 아름다운 명사로 부르기엔 그 시기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말했다. 세상은 분명 청춘의 아름다움을 가벼이 용인하지 않는다. 유타와 코우가 졸업을 앞두고 정치적 또는 물리적으로 갈라지게 된 근원도 사회가 청춘의 결핍을 메워주지 못하는 까닭에 있다. 청춘에게 성장은 몹시 어려운 과정이다.


만약 성장 영화라면, 과연 성장이 이루어졌는가? 누가 성장을 했는가? 관객은 코우가 정말 진심으로 변화를 위해 굳게 작심했는지, 그저 풋사랑에 빠져 시위에 나갔을 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자신도 잘 모를 테니. 대학 장학금과 진학을 위해 유타의 자수를 모르는 체한 코우다. 이 선택을 성장으로 본다면, 우리도 그 세계 속 숱한 어른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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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열심히 살더라도 형편없는 세상의 허다한 어른 중 하나가 되어버릴 운명이라면, 청춘은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태풍 클럽>의 미카미는 죽음을 통해 종의 한계를 극복하고 능동적인 개체로서 아름다운 끝을 맺으려 했다. 시도는 명백히 실패했다. 청춘의 죽음은 엄숙하지 않았고, 아름답지도 않았다. <키즈 리턴>처럼 인생이 망가져도 “우린 아직 시작도 안 했어!”라며 낙관적으로 비관하는 일도 저항의 성공으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해피엔드>는 비관에 빠져 체념한 듯 보였던 유타가 코우를 도우며 변화에 이바지한다. 교장이 약속을 지킨다면 그들이 졸업한 학교의 AI 감시는 철폐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결말로 인해 성인으로의 탈피를 앞둔 유타와 코우의 우정이 회복될 미래는 요원해 보인다. 그래도 그들이 떠난 작은 사회의 미래는 잠시나마 변화를 맞지 않겠는가.


테크노와 그의 모체 디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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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새로울 것이 없다면, 청춘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유타는 “예전 음악 밖에 안 듣는다”라며 지난 것에 대한 동경을 내비친다. 테크노에 빠진 그를 보면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이 떠오른다.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68년 혁명이 불러온 신자유주의는 이후 쏟아지는 온갖 전위 음악의 근간이 된다. 주류 장르로서 70년대에 위용을 떨치던 디스코는 이를 향유하던 세대가 사회인이 되면서 몰락하게 된다.


게임의 주인공 해리는 과거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후 외세에 점거된 도시 레바숄에서 살인 사건을 조사한다. 플레이어는 어느 청소년 무리가 클럽을 가장한 마약거래소를 열려고 하는 걸 목격한다. 그 과정에서 해리가 디스코 마니아라는 점을 알게 되는데, 디스코는 메인스트림 백인 남성의 로큰롤로부터 소외된 흑인들이 창시한 비주류 음악이었다. 그런 디스코가 주류 음악의 대안이 되어 시대를 풍미하고 끝내 몰락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일쇼크로 대표되는 70년대의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실패에 대한 향수로 점철된 게임이다. 사회주의의 실패, 혁명의 실패, 해리의 실패, 플레이어의 실패, 그리고 디스코의 실패가 다층적으로 연결되며 과거를 동경하고 위로한다. 디스코는 왕성한 무역으로 부강했던 도시, 혁명의 중심지였던 레바숄처럼 신세대를 상징하는 장르였으나, 시대가 지나며 끝내 실패(몰락)한 음악이 되었다. 디스코는 게임 내 수많은 실패의 이미지를 대변하며 과거의 시대상을 메타적으로 연결한다. 이것이 <디스코 엘리시움>이 실패한 과거를 흠모하는 방식이다.


20200612_Feature_01.jpg BLM 시위에서, "테크노는 검다, 경찰은 개같다, 레이버들은 인종적 정의를 위해 모이자!"

테크노는 디스코의 몰락 이후 등장한 첫 물결로서 <제3의 물결>의 영향을 받아 ‘The First Wave’의 칭호를 얻은 80년대 음악이다. 초기 테크노는 디트로이트 지역을 중심으로 파생되었다. 전쟁 특수를 누렸지만 상대적으로 저임금인 흑인 노동자가 유입된 디트로이트에서 ‘벨빌 쓰리’로 불리는 후안 애킨스, 데릭 메이, 케빈 손더슨이 디트로이트 테크노를 창시했다. 초기 테크노는 가장 진보적인 뮤지션들에 의해 탄생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장르였다. 따라서, 테크노 역시 그 탄생과 변천을 살펴볼 때 정치사회적 맥락과 배경을 떼어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테크노는 디트로이트의 역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흑인 민중가요다.


6-70년대 전위 뮤지션들이 몸부림쳐 만든 여러 장르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퇴장했지만, 다음 세대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음악 산업의 구조를 바꾸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디스코로부터 테크노, 하우스, 뉴 웨이브 등 다음 세대를 책임질 다양한 장르가 파생했다. 지나간 것이 있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다. 유타의 희생으로 코우는 자신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고, 후배들은 당분간 AI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타가 지나간 음악인 테크노에 심취한 사람이란 건 엔딩의 복선으로 보인다. 그는 현재를 비관하며 변화를 추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테크노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변화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한 장르 아닌가. 테크노를 사랑하는 유타가 AI 감시 사회에 순순히 따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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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이 생겼다는 건 특정한 유해균을 제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본의 뒤떨어진 현실 감각과 정치사회적으로 만연한 체념의 정서는 어쩌면 내성 발현의 결과일지 모르겠다. 부디 깨어 있으라 애타는 목소리로 외쳐도 우이독경에 지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마 그들은 현실을 도외시하도록 만드는 병균에 뼛속 깊이 감염됐나 보다.


<해피엔드>가 보여주는 특별한 아름다움은 지진으로 흔들어도 헤드폰으로 귀를 막고 외면하던 유타가 우정으로 깨어났다는 데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톰과 작별할 때 한미일중 4국이 엉켜 눈물로 포옹하는 장면은 꽤 의도적이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해피엔드>를 다회차 관람하며 평가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극영화 데뷔작이라 약간의 가산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좋은 인상을 주는 영화지만 평가를 재고할만한 이유를 찾았네요. 새롭게 느낀 단점과 언급하지 않은 해석을 리뷰 2편에 구구절절 늘어놨습니다. 궁금하시면 읽어보세요.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을 4.5점에서 4점으로 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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