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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믿음이 불가능해진 삶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해피엔드> (2024) 리뷰 - (2)

by 테리

지난 <해피엔드> 리뷰 1편에서 다루지 않았던 내용 해석에 관련한 몇 가지 지점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평론보다는 가볍고 감상보다는 무겁게, 어쨌든 평소에 업로드하던 글보다는 캐주얼하게, 비약에 가까운 의견을 개진해 보겠습니다.


조금 생뚱맞은 소리지만 브런치는 네이버 블로그나 티스토리와 달리 SEO를 위해 사용자가 들일 수 있는 노력에 한계가 명확한데요. 자체 통계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그 통계를 보고 어떤 가설을 세우더라도 그리 논리적이진 않아 보입니다. 그냥 어쩌다 터져서 조회수가 5,000 이상 찍히는 때도 간혹 있는가 하면, 평균 조회수의 1/10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지난 해피엔드 리뷰가 그랬습니다. 글을 올린 지 2주가 지났는데 조회수는 고작 23이네요. 이례적으로 한 영화에 두 번째 리뷰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봤습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면, 지난 리뷰는 사회파를 자청하는 한 감독의 발칙한 극영화 데뷔작에 대한 호평, 영화가 뿜어내는 산만한 에너지의 근원에 공감하고 찬동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해피엔드>의 단점이 무엇인지 곱씹어 보는 과정에서 평가를 번복했는데요. 작품의 구조적이고 태생적인 문제를 인지하고 나니, '그렇게까지' 훌륭한 영화는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이 바뀌었죠. 크게 4가지 키워드로 나눠 이야기하겠습니다.


1. 작품에 녹여낸 3번의 지진

<해피엔드>라는 제목이 정해지기 전 가제는 <지진>이었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 지진이 발생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지만,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주요 소재임은 틀림없죠. 실제로 소라 네오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예술적 자의식을 흔든 세 번의 지진을 언급했습니다. 저는 이 세 번의 지진이 작품 내외적으로 깊게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1-1. 1923년 관동대지진

첫 번째로, 1923년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관동대지진입니다. 소라 네오는 "조선인 학살을 반성하지 않은 상태로 다시 대지진을 맞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라는 사고적 실험을 하며 각본을 썼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해피엔드>가 그리는 세상의 어른들은 분명 반성 없는 자들이 대다수일 텐데요.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기성세대는 현대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어떤 토대 위에 서있는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존재들이죠. 책임감이 부재한 어른입니다. 교장처럼 높은 지위에 오른 자는 자신의 안위 보전에 신경 쓸 뿐이고, 경찰들은 공권력으로서의 사명감 없이 극우 정부의 개가 되어 시민을 무력진압합니다.


주인공 일행의 나이대가 졸업반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우가 창밖으로 후미와 경찰의 대치를 바라보았듯, 유타가 악기점 문밖으로 경찰의 무력행사를 지켜보았듯, 그들은 조만간 그 경계를 넘어 세상 밖으로 방출될 예정입니다. 그러나 곧 법적으로 성인이 될 뿐, 여전히 미숙한 청춘이기도 하죠.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어른들과 부대끼며 갈등하고, 이따금씩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단, 무대가 학교에서 사회로 확장된 만큼 상처도 더 커질 예정이고요. 소라 네오는 관동대지진을 자국의 근현대 역사를 성찰하기 위한 상징적인 사건이자, 허황된 단일민족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일본의 현대 파시즘이 파생된 근원지쯤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1-2. 2011년 동일본대지진

두 번째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입니다. 이전 리뷰에서 '현대 일본을 잠식한 보편적인 불안은 동일본대지진이 선사한 정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 세 편을 추천하자면,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너의 이름은>을 꼽고 싶은데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두 편이나 되는군요.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상을 덮쳤고, 그것이 다시금 발생할 수 있다는 불안이 증식되었다. 이건 단지 경위를 나열하는 수준의 수사법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동일본대지진이 일본에 남긴 상흔의 핵심은 '회피와 외면'이 아닐까 합니다.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주인공 아사코/가후쿠가 상처를 외면한 대가를 치르고 뒤늦게나마 성장하는 플롯 구조가 유사합니다. 아사코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바쿠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와 똑같은 외모의 료헤이를 만납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한 선택이죠. 가후쿠의 경우 아내 오토가 외도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랜 시간 동안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회피해 왔습니다. 두 주인공 모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아픔을 직면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반성하며 마침내 성장합니다. 이 두 작품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우리의 현실은 달라졌다, 이 불가항력을 인정하지 않거나 아예 못 본 체하는 사람들은 들으라"라고 말하는 것이죠. 사건은 언젠가 다시 반복될 것이니(뭐든지 2번 반복한 아사코처럼), 그전에 용기 내어 상처를 돌아보라고(미사키와 상처를 공유하며 과거를 극복한 가후쿠처럼).


2016년경 <너의 이름은>이 국내에서 크게 공감받았던 까닭은 2014년에 우리가 겪었던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타키와 미츠하의 시간차도 3년, 동일본대지진과 세월호 참사도 3년 차이죠. 그런데 신카이 마코토는 아예 과거를 바꿔버립니다. 개인적으로 이 판타지는 애니메이션이라 설득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현실의 참사를 두 가지나 끌어온 영화가 "응, 과거를 바꾸면 돼"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기분은 어떨까요? "우리 엄마랑 아빠가 위험해!", "응. 드래곤볼로 살리면 돼!" 이런 느낌 아닐런지요. 저는 이런 관점을 떠나 신카이 마코토가 여성상을 그리는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설픈 자기복제였던 <스즈메의 문단속>은 기대 이하였으니 평가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네요. 그럼에도 <너의 이름은>은 단점을 상회하는 감동으로 제 마음 깊숙이 들어온 영화였습니다. 그의 위로에서 진심을 느꼈거든요.


언급한 세 가지 영화가 넘어진 자들의 재기를 독려하고 피해자들의 상흔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해피엔드>는 청춘의 불안을 지진의 진동으로 연결하고 이를 그들의 현실과 재차 연결합니다. 여기서 느낀 영화의 단점을 잠깐 언급하자면, 지진이 중심 소재로서 작품 주제 의식과 내용, 형식 전반에 걸쳐 두터운 층위를 형성하고 있는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와 달리 <해피엔드> 속 지진은 육교 이미지로 대표되는 선택의 갈림길, 인물 간의 관계 변화 등을 예고하는 기능적 연출 정도로만 쓰이죠.


게다가 지진은 청춘에게만 호환마마입니다. 유타와 코우는 진동이 발생하자 무서워하며 책상 밑으로 숨는데, 선생님들은 지진 경보가 울려도 뚜벅뚜벅 교무실 밖으로 걸어 나갈 뿐이죠. 어른들은 지진에 체념했거나, 앞에서 언급한 회피와 외면의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상태입니다. 건설사에 입사하라는 대사 등으로 추정컨대 지진이 청춘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점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동일본대지진이 남긴 범국민적인 불안의 억제는 결국 사회의 중심인 기성세대 몫이겠죠. 그들이 이모양 이꼴인데, 아래 세대는 누굴 믿고 어디에 의지하며 성장해야 하느냐는 소라 네오의 반성 의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1-3. 미래에 일어날 가상의 지진

세 번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지진입니다. 난카이 해곡 부근에서 대략 100년 주기로 발생한다고 알려진 규모 8∼9급 지진인데요. 현재 일본은 난카이 대지진 100년 주기설의 불안에 휩싸인 상태입니다. 관동대지진 이후로 100년 하고도 2년이 더 지났거든요. 소라 네오는 두렵습니다. 관동대지진이 조선인학살로 이어졌다면 100년 후의 대지진은 어떤 참사로 이어질까요?


앞서 서술한 두 지진(과거의 지진, 현재의 지진)을 작품에 녹인 방향성과 의도는 비교적 쉽게 캐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지진을 깊게 해석하기에는 작품이 제공하는 단서가 매우 모호합니다. 영화가 묘사하는 세상은 이미 우리의 현실과 다름없고, "미래에 이렇게 되면 어쩔래?"라는 새로운 화두도 딱히 던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시제는 과거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작중 삽입된 두 종류의 음악인 테크노와 포크를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2. 테크노와 포크의 과거성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그 비트만큼이나 매우 강렬합니다. DJ 유스케 유키마츠가 출연하며 인상적인 디제잉을 선보이죠. 유타는 주인공 일행 중 유독 테크노에 심취한 인물입니다. 작은 크기의 헤드폰을 착용한 코우와 달리 귀가 다 덮이는 큰 헤드폰을 착용한 모습으로 그의 특성이 암시됩니다. 지난 리뷰에서 테크노의 기원과 영화가 이를 함의로 활용한 배경에 대해 설명했는데요. 요컨대 유타는 테크노 특유의 저항 정신이 투영된 인물, 투쟁하는 인물로 예고되고 있습니다.


저항 정신을 가진 인물로 후미를 빼놓을 수 없죠. 그녀는 정부와 공권력에 대항하며 직접 시위에 나서고, 학교의 감시체제와 교장의 언행 또한 강력히 비판합니다. 코우는 그런 후미에 이끌려 시위 모임 술자리에 참석하고, 어떤 노래를 익히게 됩니다. 바로 일본의 상징적인 포크 가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가 1968년에 발표한 곡 '쿠소쿠라에(직역: 똥이나 처먹어) 타령'입니다. 실제로 그의 노래들은 6-70년대 시위에서 쓰이는 대표적인 민중가요였고, 방송가에서 금지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양희은의 상록수쯤 되는 민중가요를 차용해 일본의 특정 시대상과 민중운동의 역사를 작품의 맥락 속으로 포섭한 것이죠. 해당 곡이 발표된 60년대는 일본 시민들이 안보 투쟁, 전공투 등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고 거리에 나가 변화를 외치던 사실상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70년대가 되면 일본 내 좌파세력이 분열을 맞고, 경제성장과 함께 개인주의가 대두되며 시민운동은 급격히 침체하기 때문입니다. 80년대는 버블경제 시기니 말할 것도 없고요.


다소 급진적인 견해로 보일 수 있으나, 저는 후미가 60년대 학생으로 보입니다. 물론 후미가 60년대 운동권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영화적으로 비약하면 정말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온 인물로 생각할 수 있거든요. 현시대에 어떤 일본 고등학생이 "경찰은 국가와 부유층을 위해 무장한 관료"라는 말을 하겠어요. 보는 관객이 다 낯간지러워질 정도로 평면적인 후미의 캐릭터성은, 인물 개인을 묘사했다기보다 60년대 시대정신과 그 시절 운동권의 분노를 총체적으로 재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타와 코우가 각각 문밖/창밖의 시위 현장과 격리된듯한 연출을 한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현실과 이어질 수 없는 유리된 시공간의 표현으로 보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후미가 60년대에 학생운동을 하다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학생의 망령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유독 화장기 없는 얼굴이나 레트로 느낌이 나는 교복 디자인도 의도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더 나아가, 어쩌면 후미는 코우의 상상 속 존재일지 모릅니다. 코우 눈에만 보이는 망령일 수도 있고요. 제 기억이 맞다면 후미는 주인공 일행 중 오직 코우하고만 대화합니다. 유타, 아타, 톰, 밍이 후미와 대화하는 장면은 한 컷도 없습니다. 즉, 변화를 원하지만 행동할 용기는 없는 소극적인 고등학생 코우가 자신을 이끌어줄 가상의 누군가를 끄집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죠.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져 혼나는 장면은 있어도 코우와 후미가 시위를 하는 장면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코우가 후미에게 김밥을 가져다주는 장면도 약간 다르게 봤는데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나쁜 어른으로부터 구한다는, 자기위로적인 스토리의 판타지로 보였습니다. 10대 소년이 충분히 할 법한 상상이기도 하고요. 코우가 교장실에 들어와서 헬멧을 벗는 행위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에 진입한 것'으로 해석한 어떤 리뷰를 봤습니다. 저의 관점으로 보면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 헬멧은 얼굴이 보이지 않아 자신을 익명화한다는 속성이 있습니다. 얼굴 밑으로는 모든 학생이 교복을 입고 있으니 신원을 특정할 수 없죠. 바깥세상에서 '여러 평범한 학생 중 하나'에 불과했던 코우는 교장실 안 가상의 세계에 들어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자신'으로 분하는 것이죠. 여자 동급생에 대한 환상과 변화에 대한 열망이 결합된 순수한 망상으로 보였습니다. 꼭 상상이 아니더라도 교장실 점거씬은 영화적으로 부자연스러운 지점이 있습니다. 너무나, 평화롭죠.


이처럼 유타와 후미는 과거의 이미지를 가진 두 인물입니다. SF의 장르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층위를 쌓는 방식은 미래의 무언가가 아닌 대개 과거의 향수를 끌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해피엔드>에 대한 평가를 재고한 이유도 이것이 치명적인 단점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근미래 SF를 표방함에도 몇몇 AI 요소를 제외하면 미래적 소재도 없고, 그 AI 기술조차 지극히 현실적이죠. 사실상 현재를 말하는 영화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표면적으로는 미래를 그리되 심층적으로는 현재를 비판하는 작품을 기대했으나, <해피엔드>는 과거로 가버립니다. 영화의 레퍼런스 대부분이 수십 년 전 쇼와 시대 말기, 헤이세이 시대 초기 작품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3. 투쟁의 부재

<해피엔드>가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레퍼런스는 얼핏 떠올려도 아주 많습니다. 허우샤오셴의 작품, 대만 뉴웨이브를 길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우선적으로 같은 국적의 영화인 <태풍 클럽>과 <키즈 리턴>을 연상해야만 합니다. 시대적 화두 측면에서 그러하고, 학생이 주인공이며 학교를 무대로 하고 어른들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구성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 두 작품과 <해피엔드>는 아예 다른 종류의 영화로 여겨집니다. 각 영화가 청춘이 현실을 타개할 활로로써 제시하는 방법론의 극명한 차이랄까요?


먼저, 쇼와 시대 말기에 개봉한 <태풍 클럽>의 주인공 미카미는 "개체는 종을 초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문자답하며 몸소 저항합니다. 그는 자살을 통해 종의 한계를 극복하고 능동적인 개체로 거듭나려고 합니다. 이 시도는 실패하죠. 초반부에 미카미가 고민한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난제를 떠올리면 더 섬뜩합니다. 미카미의 형은 "닭이 날 수 없게 된 것은 종인 달걀일 때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개체인 닭이 된 이후다"라고 답하죠. 닭은 엄밀히 말하면 날개의 기능을 잃은 퇴화에 해당합니다. 즉, <태풍 클럽>이 말하는 어른이 된다는 건 일종의 퇴화에 가까운 것이죠. 그래서 미카미는 예정된 미래인 퇴화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멍청한 닭이 될 운명을 거부하기로 합니다. 대신 그 대가로 죽음을 지불합니다. 형편없는 어른이 되거나, 싫으면 죽거나. 소마이 신지의 현실 인식은 충공깽입니다.


헤이세이 시대 초기에 개봉한 <키즈 리턴>의 주인공은 폭력에 잠식된 두 남학생입니다. 한 명은 권투 선수가 되어, 한 명은 조폭이 되어 폭력의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죠. 세상에 나가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해야만 할 정도로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것이 기타노 타케시의 현실 인식이라고 봅니다. 실패를 맛본 두 인물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 운동장을 배회하며 “바보야, 우린 아직 시작도 안 했어!”라고 외칩니다. 이 엔딩을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보기도 하던데, 저는 온몸이 박살난 청춘에게 남은 희망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보는 편이 감독의 의도와 들어맞고 더 완성도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요약하면, 좋은 어른은 없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청춘이 시작하기도 전에 부서지는 이야기랄까요.


두 감독의 현실 인식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청춘이 어른이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청춘에게 상처를 주는 잔학한 세상을 만드는 건 어른이죠. 청춘은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바로 그 존재로 전락할 운명입니다. 모순을 극복할 뾰족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애초에 둘 다 정답을 제시하는 영화도 아니고요. 무자비한 세상에 제 발로 뛰어나가 투쟁하고 부딪히는 수밖에.


반면 <해피엔드>는 이러한 투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투쟁의 역사는 피와 함께 하는 법인데요. 일본의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처럼 피땀 흘려 일궈낸 성과가 아닙니다. 눈떠보니 하루아침에 민주주의가 보급됐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무조건항복 민주주의'죠. 60년대의 시대정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일본 시민 스스로 일궈낸 투쟁의 성취는 사실상 전무합니다.


일본의 현대 역사에 투쟁과 뚜렷한 시대정신이 부재했다는 인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영화들과는 다르게, <해피엔드>는 작은 진동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 직접적인 충돌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코우와 유타가 차를 세우는 장면도 보여주지 않고, 코우와 후미가 시위하는 장면도 없죠. 마음 같아서는 유타와 코우가 주먹질이라도 한 번 주고받았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관객 눈에 보이는 물리적 충돌은 코우가 카페 안에서 경찰과 맞서는 후미와 시위 현장을 창밖으로 바라보는 장면, 유타가 악기점 면접을 볼 때 시위 참여자가 경찰에게 잡혀 끌려가는 장면 정도입니다. 그 묘사도 상당히 간접적이고요. 이 충돌을 목격한 두 주인공은 실내에서 이를 지켜볼 뿐이고, 카메라는 바깥세상 속에 전혀 참여하지 않습니다. 마치 남의 일처럼 관망하는 태도로 보인달까요.


문제는 이러한 의도적인 배제가 과도하게 소극적인 태도로 비친다는 것입니다. '현실 도처에 깔린 폭력과 억압을 마주하면서도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를 풍자했다고 봐주기에도 영 지나칩니다. 세태를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영화가 이렇게까지 충돌을 회피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겠죠. <덩케르크>를 보고 그 완성도에 감탄하면서도 놀란 감독이 전쟁 역사를 플롯의 도구로 사유화한 영악함, 보수적 엘리트주의에 기인한 고고함에 본능적인 반감이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물론 소라 네오는 놀란에 비하면 훨씬 서민적이고, 발을 땅에 붙여 놓으려는 의도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사코>와 비슷한 방식으로 회피의 무책임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말을 하는 자신이 중요한 무언가를 회피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키즈 리턴>과 <태풍 클럽>의 청춘은 훨씬 잔혹하게 세상을 마주합니다. 과연 <해피엔드>가 위 사진 속 한줄평처럼 '미래'에서 과거를 '설득력 있게'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해피엔드>에는 미래적 특성이 실종되어 있고, 과거를 지나치게 끌어오고 있음에도 과거의 작품들이 보편타당하게 밀어붙였던 시대정신의 강조와 청춘이 맞이할 현실에 대한 묘사가 부재합니다. 청춘들이 서로 총을 쏘고(실수였다지만) 칼로 베어 죽이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마스터피스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니 비교 자체가 민망하고, 불후의 명작인 소설 <1984>와 견주어도 그 부족함을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우와 유타가 맞이하게 될 세상은 그런 세상들에 비하면 꽤 살만해 보입니다. 코우는 꼭 연인이 되지 않더라도 유대감을 바탕으로 후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대학생이 될 것이고, 유타는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인생이 망가졌어야 하지만 우연히 좋은 어른을 만난 덕에 악기점을 제2의 집으로, 악기점 주인을 제2의 어머니로 삼아 살아갈 테지요. 확실히 편의적입니다. 세계의 폭력성을 소거한 만큼, 그 세계에 대응하는 후미의 캐릭터성도 더 과장되어 보입니다. 그래서 후미가 교장실을 점거하고 시위하는 장면 또한 더욱 판타지로 다가오고요.


코우와 후미의 관계를 말하니 생각난 건데, <해피엔드>는 유타와 연인 관계이던 코우가 관계를 정리하고 후미와 연인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합니다. 제게는 <아사코>처럼 두 번 사랑하는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는 것이죠. 남-남 커플의 성애적 사랑이라는 게 아니고, 관계역학적으로, 또 비유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스터>의 프레디 퀠-랭커스터의 관계처럼요. 작중 초반 유타가 코우에게 장난스럽게 "아이시떼루요"라고 말하며 똑같이 대답해 달라고 보채는 장면이 있죠. 뭐, 이건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 정도로...


4. 비약에 기반한 판타지

<해피엔드>의 가장 아쉬운 지점은 이 세상이 어떻게 망가져 있는지 소명하는 방식이 굉장히 피상적이라는 것입니다. <미키 17>의 나샤가 "크리퍼 입장에서는 우리가 외계인이죠!"라며 호통치던 장면을 기억하실 텐데요. 후미의 대사도 결이 비슷합니다. "경찰은 국가와 부유층을 위해 무장한 관료"라뇨. 직설적이다 못해 엉성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후미가 판타지라는 가설이 갈수록 제 머릿속에서 힘을 얻고 있는데요. AI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시대에 <해피엔드> 속 어떤 SF 요소도 그다지 비현실적이지 않은데, 사실 가장 큰 판타지는 후미가 아닐까, 하는 것이죠. 한 발 더 나아가, 교장의 차를 세운 것 또한 코우의 환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타와 함께 창문 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코우의 머리 위에 뜬 화살표는 그 사건의 범인이 코우라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의 상상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테죠. 상식적으로 남학생 둘이서 단숨에 무거운 차를 직각으로 세울 방법이 있을까요? 아마 현실에서는 타이어에 구멍을 내거나 차를 긁어서 손상시키는 수준이었을 것이고, 현실적으로 <키즈 리턴>처럼 불태우는 정도가 실현 가능한 최선이었을 겁니다. 그 광경을 본 후미가 "예술적이고 급진적으로 차를 세워놨다"라며 칭찬하는 대사도 저에게는 너무나도 한가한 남고생의 망상처럼 느껴집니다.


이왕 시작한 거, 한껏 더 비약해 보겠습니다. 유타와 코우는 두 인물이 아니라 한 명의 분열된 두 자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귀를 닫고 현재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투영된 유타 자아와 용기는 부족해도 변화를 꿈꾸는 코우 자아로 나뉜 것이죠. 한 명의 인물에게 단일 자아 하나만 존재하란 법은 없습니다. <미키 17>이 복제 인간을 통해 현대인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비유했듯 <해피엔드>도 그렇게 읽을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뒤늦게나마 내재되어 있던 저항 정신을 깨달은 유타가 희생하는 방식으로 자아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대학에서 쓰일 가면으로는 코우가 선택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파이트 클럽>을 떠올리면 되겠네요. 이러한 견해에는 후미 상상설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유타와 코우를 한 몸으로 보면 다소 이야기 전개의 오류가 생기니까요. 하지만 후미고 유타고 전부 코우의 상상이라면? 소라 네오가 <퍼머넌트 노바라>를 감명 깊게 봤다면?


저는 코우의 미래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키즈 리턴>과 <태풍 클럽>에서 성장을 위해 발버둥 친 주인공들이 실패했듯, 코우의 성장기 또한 실패에 가까워 보이거든요. <해피엔드>의 두 자아 중 성장한 쪽은 오히려 친구를 위해 희생한 유타입니다. 유타는 정말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납부한 합의금 빚을 갚기 위해 악기점에서 꾸준히 일할 텐데, 임금 노동은 어른이 됐음을 뜻하는 실질적인 증거죠. 톰과의 이별, 코우와의 이별을 통해 관계를 정리하는 방법도 배웠고요. 유타와 코우가 육교에서 헤어질 때 잠시 멈췄던 세상이 금세 다시 움직였듯 <해피엔드> 속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고 그대로 굴러갈 것입니다. 냉정하게도 세상은 청춘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때를 마냥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청춘은 멸시받고 상처입겠죠. 그래도 유타의 희생 덕에 학교는 잠시나마 AI 감시 없이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동급생 일부는 감시에 동화되어 철폐를 반대했지만, 학교에 남은 후배들은 부디 그 자유의 대가를 알고 있길 바랄 뿐입니다.



글 제목에는 송경원 평론가의 <아사코> 한줄평, "시선과 시점의 화술. 믿음이 불가능해진 삶(혹은 일본의 현재)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를 인용했습니다. 특히 믿음이 불가능해진 삶이라는 표현은 글에서 언급한 일본 영화들을 한 번에 관통하는 것 같네요.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을 4개 반에서 4개로 하향 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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