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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오, 공산품이 된 픽사표 콘택트

<엘리오> (2025) 리뷰

by 테리

뻔하고 진부한 <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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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아주 오랜 주제이죠. 종교, 민속, 미신, 그리고 이제는 과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화에서 어떤 형태로든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외계 생명체를 찾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인데, 사상 처음으로 추측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실제로 해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처 행성에 우주선을 보낼 수 있고, 대형 전파 망원경을 이용해 최근 우리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가장 심오한 관심사를 건드립니다. 우리는 혼자일까요?


칼 세이건의 질문에 답하는 픽사의 29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엘리오>다.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 올가 솔리스와 살아가는 엘리오는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유별난 성격 탓에 제대로 된 친구 한 명 없으며, 외계인과의 통신에 집착하고 온갖 말썽을 부리느라 고모와의 사이도 좋지 않다. 그러던 중 거짓말처럼 우주로 보낸 메시지가 외계인에게 닿아, 우주선이 그를 범은하적 조직 '커뮤니버스'로 데려간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외로운 소년이 미지의 존재와 교류하며 우정을 맺는 과정이다. 기본 골격은 SF지만, 서사에 얽히는 더 핵심적인 장르는 모험극을 빙자한 성장물이라 볼 수 있다. 픽사가 만든 '소년 성장물이자 우주 모험극'이라니, 키워드만 놓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독창적이고 신선한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그 말인즉슨, 픽사의 과거 작품들과 비교하여 별다른 차별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한 것치고는 소박하고 무난한 전개에 그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칼 세이건의 육성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같은 뻔한 훈화를 에둘러 역설하기 위한 문체적 장치 수준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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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 스튜디오가 최근 반복하고 있는 자기복제와 답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토이 스토리 3>까지 최전성기를 보낸 이후 꾸준히 내리막을 타던 픽사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팬데믹의 직격탄까지 맞았다. 그렇게 <소울>, <루카> 등의 영화를 극장 개봉 없이 디즈니 플러스로 공개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경영난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난관을 직면해야만 했다. 그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전체 인력의 14% 해고를 발표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다. 회생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작품의 흥행이다. 오리지널 IP를 끌올하며 기존 팬덤을 이용하거나, 호불호의 영역을 매끈하게 도려내 대중적으로 성공할 만한 영화를 소위 공산품처럼 찍어내는 것이 현재 픽사의 운영 방침이다. 같은 디즈니 산하 'MCU 공산품'과 비슷한 방식이다. 상기한 전략이 성공한 덕분에 후속작으로 돌아온 <인사이드 아웃 2>는 역대 월드와이드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하며 픽사에게 반등의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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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오>의 이야기 전개는 뻔하며 대부분의 설정은 편의주의에 가깝다. 픽사가 자랑하는 시각적 볼거리도 어쩐지 감흥이 덜하다. <엘리멘탈>의 경우 서사는 뭉툭함은 여전했으나 적어도 원소 세계의 독창적인 시각화만은 훌륭한 성취였다. 커뮤니버스의 풍경은 과거 픽사 어느 작품에서 본듯 기시감이 든다. 직관적으로 <소울>의 사전세계가 떠오르기도 한다. 태어나기 전 세상은 영혼들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속성을 배우는 공간으로써 지구와 주제적인 대비감을 이루는 반면, 커뮤니버스는 그저 배경 세트처럼 활용될 뿐이다. 내용과 형식이 조응을 이루지 못할 때, 작품의 완성도와 관객의 감흥은 급격히 떨어진다. <엘리오>의 비주얼이 우주 세계의 화려함을 표방하는 만큼 알멩이 없이 영상미 운운하며 유난 떤다는 생각마저 든다.


PC주의를 다루는 픽사의 부주의함도 여전히 신경 쓰인다. 절친으로 동양인과 흑인을 배치하고 개별 서사와 역할은 철저히 거세하는 불쾌한 인종쿼터제를 실시한 <인사이드 아웃 2>, 불과 물 원소에 치우쳐 다른 원소와의 공생 방법은 전혀 제시하지 못한 <엘리멘탈>에 이어 <엘리오>에서도 이러한 미흡함은 반복된다. 작중 출현한 우주 생명체들은 전부 저마다 모습이 다르다. 적어도 수십 가지 캐릭터 디자인이 존재할 텐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눈과 코가 없는 글로든이다. 나머지는 커뮤니버스의 전경을 빽빽하게 채우는 머릿수의 기능만 한다. 한때는 물고기와 장난감으로도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설파하던 그들인데, 지금의 픽사는 끔찍할 정도로 평범해졌다.


요점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한 픽사의 오랜 팬으로서 그들의 행보에 큰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오>는 점입가경으로 어떤 지점에서도 평균을 웃도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 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월-E>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고려하면 우주 SF가 그다지 독특한 개성도 아니다. 서사는 단순하고 인물은 평면적이며 갈등 해결 방식은 편의적이다. 가족 서사로 스토리텔링의 안정성을 더했지만, 현대인이 느끼는 고질적인 '외로움'이라는 단일 주제에 대한 몰입을 해치는 부작용도 낳았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오마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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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오>를 관람하면서 의외의 요소에 흥미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바로 수많은 SF 영화의 오마주를 찾는 일이었다. 인간이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며 자아내는 서스펜스는 <미지와의 조우>를 연상케 한다. 클론 복제는 <괴물(The Thing)>의 오마주이며, <에이리언> 시리즈의 체스트버스터 닮은 것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주 파편을 피하는 장면은 <그래비티>를, 엘리오의 클론이 녹아내리는 장면은 <터미네이터 2>의 용광로 따봉씬을 재현했다. 이러한 단발성 오마주를 넘어 작품 전반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듯한 영화는 <콘택트>이다. 칼 세이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어머니를 잃은 '엘리' 애로웨이가 우주를 여행하는 플롯이 주인공의 이름만큼이나 유사하다. 픽사 프로듀서가 해당 소설의 모델이 되는 천문학자 질 타터를 만나 자문을 받았을 정도니, <콘택트>를 정신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몇몇 작품과의 유사한 플롯 구조 또한 눈에 띈다. <그래비티>는 <콘택트> 이상으로 <엘리오>와 플롯이 비슷한 영화다. 가족을 잃고 상심한 라이언 박사가 우주에서 모험을 거치고 지구로 귀환하는 여정은 엘리오의 모험 과정과 사실상 동일하다. 딸을 잃은 라이언 박사가 지구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마음은, 근원적인 외로움에 기인한 고통으로써 부모를 잃은 엘리오의 심리 상태와도 겹친다. 한편, 유사 모자 관계의 봉합은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을 떠오르게 한다. 친모가 아닌 여성과 갈등하다가 종반부에 화해하며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구성이 같다. 이에 더해, 한국인으로서 복제 인간과 복제 괴물 두 쌍을 보고 <미키 17>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인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클론이라는 아이디어로 입힌 재치 있는 감각은 두 작품 모두 한 쪽이 죽음에 종착한다는 결말로 이어진다. 괴생명체가 주인공을 한 차례 구해준다는 설정, 괴물처럼 보여도 종족이 다를 뿐 고지능 유기생명체로서 인류와의 공존의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흡사하다.


예상 밖으로 호소다 마모루가 연출한 <우리들의 워 게임!>의 향취를 느끼기도 했다. 엘리오가 글로든을 구하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돌아가며 전세계인의 무선통신을 통해 도움을 받는 장면은, 전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이 태일 일행에게 응원 메일을 보내는 장면과 포개어진다. 이 '아마추어 통신' 키워드는 <그래비티>가 아닌강과의 통신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라이언 박사가 소화기 가스를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장면은 <월-E>가 이미 사랑스럽게 그려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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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자면 <엘리오>는 <월-E>의 성과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 부모를 잃었다는 정보 외에 고모에게 느끼는 감정적 거리감의 묘사나 보충 설명이 전무하다 보니 엘리오는 밑도 끝도 없이 지구 탈출에 천착하는 이상한 아이로 보인다. 월-E는 대사 한마디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껴지는 고독을 고스란히 전달하며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말도 못 하는 로봇에게 훨씬 공감이 갈 노릇이니 <엘리오>는 주인공의 서사마저 부실하다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소통하고 우정을 맺는 과정 역시 월-E와 이브의 황홀한 로맨스가 압승이다.


창의력 고갈! 나태하고도 게으른 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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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2024년 3월 1일에 개봉 예정이었던 <엘리오>는 미국작가조합 파업의 여파로 2025년 6월이 되어서야 개봉하게 되었다. 원안을 쓴 감독은 <코코>의 시나리오와 연출을 담당한 아드리안 몰리나였으나, 중간에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감독 도미 시와 매들린 섀러피언으로 교체되었다. 최종적으로는 3인이 공동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그 과정에서 주요 제작진이 대거 물갈이되었다. 2023년의 예고편과 2025년의 최종본을 비교하면 내용이 아예 달라졌다. 고모 올가는 초기에는 엄마였고, 아버지를 잃은 후 일에 열중하는 어머니와 거리감을 느끼던 엘리오가 우연히 우주로 끌려가는 스토리였다. 또한 해당 예고편에서 그라이곤은 악당이 아닌 우주 연합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다. 모자 관계가 아닌 고모와 조카 간의 화해를 다루며 갈등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한 톤의 개봉 버전과 달리, 초기에는 보다 우울한 톤의 영화가 탄생할 예정이었다.


몰리나는 <엘리오> 제작에서 물러나 <코코 2>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인사이드 아웃 2>로 후속작 장사의 뽕맛에 취했다고는 하나 픽사는 역사적으로 <토이 스토리> 외에 속편을 성공시킨 사례가 드물다. 역대 흥행 1위 기록을 갈아치운 <인사이드 아웃 2>조차 비평적으로는 전편에 비해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코코 2>가 속편으로서 답습이 아닌 발전을 이루길 기대하는 건 턱도 없는 일이다. 차라리 몰리나가 <엘리오>를 끝까지 책임졌다면 작품성 면에서는 한결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 모른다. 픽사의 30번째 장편 타이틀을 차지할 <호퍼스>도 온통 기시감 투성이인 픽사표 공산품쯤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이후에는 <토이 스토리 5>, <코코 2>, <인크레더블 3>가 연달아 개봉할 예정이다. 마치 자신들의 창의력 고갈을 대외 홍보라도 하듯 기존 IP를 재탕삼탕하는 나태하고도 게으른 태도로 일관하며, 그렇게 픽사의 2020년대는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SNS에서 <엘리오>의 바이럴 마케팅 양상을 살펴보면, 각종 인플루언서를 섭외해서 극장 방문 영상을 찍게 하는 식의 협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렸다", "힐링이 됐다", "가족끼리 함께 보며 감동했다"는 공통적인 키워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디즈니 코리아가 어떤 온라인 마케팅 업체에 하청을 맡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기엔 영화의 톤을 잘 표현한 마케팅도, 모객 효과를 높이는 홍보 방식도 아닌 것 같습니다. 주로 20대 여성 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감상 전의 신난 모습/감상 후 감동하여 우는 모습을 대비하는 영상 구성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더라고요. 최소한 시딩 가이드라인이 명확했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네요. 작품 자체가 뾰족한 구석이 없다보니 마케팅 방향성을 잡는 데도 고민을 꽤 했겠습니다만... 솔직히 픽사 전성기 시절 작품을 조금이라도 봤다면 <엘리오>를 보고 눈물을 흘릴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네요.


현재 <엘리오>는 6월 말 기준 관객수 439,131명을 기록 중입니다. 북미 흥행 성적도 픽사 역대 개봉작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이라고 하고요. 전작 <인사이드 아웃 2>가 국내 879만명, 월드와이드 1위 갱신이라는 역대급 흥행을 기록했으니 IP를 되풀이하기로 한 픽사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IP를 재활용하는 건 침체된 콘텐츠 시장에서 리스크를 줄이고 안정성을 높이는 전략으로서 트렌드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한국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범죄도시 시리즈의 제작/배급 독과점 문제, 최근 공개된 <오징어 게임 3>의 퀄리티 문제 등 비슷한 흐름을 겪고 있습니다. 이 글로벌 트렌드를 주도하는 것도 역시 디즈니입니다. 문제는 IP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는 창작자의 기회는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디즈니도, 픽사도 한때는 신생 창작집단이었던 올챙이 시절이 있습니다. 이제는 개구리가 아니라 공룡이 되어 전세계 콘텐츠 시장의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영화만큼은 '테마파크'의 영역으로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게 아닐지. 물론 그런 건 소수의 씨네필들이나 하는 생각이겠죠.


개별 작품으로서 <엘리오>가 가진 장점과 탁월함은 다른 리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독하게 비판해놓고 이제와서 그런 걸 구구절절 언급하며 밸런스 맞추기엔 진심 없는 구색 맞추기가 될 게 뻔합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도 만족하지 못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도 평균 이하로 '크게' 떨어지는 건 없는 작품이거든요. 서사가 뻔하고 편의적인 건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임을 감안하면 아주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요. 아, 언제부터 픽사가 '어린이'만을 위한 창작집단이었더라...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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