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영화 연말결산 (2025)
'사적인 영화 연말결산' 2편은 내맘대로 어워드입니다. 250101~251231 사이 국내 개봉한 영화를 대상으로 각 부문별 상을 수여합니다. (24년 12월 개봉작 일부 포함, 25년 12월 개봉작 일부 제외)
신작 영화가 다소 주춤했던 대신 좋은 재개봉, 늦깎이 개봉 영화가 많이 나왔던 한 해였습니다. 특히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도착한 <이사>, <비정성시>, <벌집의 정령> 등을 극장에서 처음 마주하는 건 실로 엄청난 체험이었네요. 하마구치 류스케의 초기작 특별전, 와이즈먼 전작 순회 회고전 등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작품을 기획 상영하는 프로그램도 일 년 내내 끊이지 않았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네오 소라, 미야케 쇼, 이가라시 고헤이 등 일본 감독들의 신작 개봉과 내한이 잦았고 이들에 대한 국내 관객의 호응도 또한 높았습니다. 연이은 일본 영화의 흥행은 소마이 신지의 재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했죠.
배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뇌리에 강렬히 남는 연기나 캐릭터가 다소 드물었습니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록조 대령을 연기한 숀 펜의 존재감을 극찬하곤 하던데, 글쎄요. 물론 아카데미를 두 번 수상한 숀 펜의 연기력은 존중받을 만하죠. 다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결점 중 하나가 록조 캐릭터의 평면성이고, 이러한 전형적인 극우 백인 남성을 연기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주요 시상식에서 무관이 딱히 이변은 아닌 것이죠. 같은 작품에서도 '센세' 캐릭터만의 독특함을 살린 베니시오 델 토로의 연기가 더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각 시상부문은 제 마음대로 선정했습니다. 내용을 더 짧게 압축하고 싶었는데 하다 보니 이 상도 필요할 것 같고 저 상도 줘야 할 것 같고 점점 늘어났달까. 작품상부터 바로 공개합니다.
2025년 개봉영화 TOP10 1위를 차지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그대로 올해의 해외 영화를 수상했습니다. <그랜드 투어>나 <미세리코르디아>도 훌륭했지만, 작년은 명실상부 이 영화의 해였습니다.
<바얌섬>, <굿뉴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어쩔수가없다> 등과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세계의 주인>이 불씨를 진화하고 상처를 보듬는 영화가 아니라 불씨를 지피는 문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민감한 화두를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감안했고, 작년 개봉한 다른 한국 영화가 이 문제작보다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윤가은 감독의 차기작이 몹시 기다려집니다.
24년 말에 재개봉한 <더 폴: 디렉터스 컷>을 시작으로 <자전거 탄 소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퍼펙트 블루>, <하나 그리고 둘>까지 명작들의 재개봉 행진이 신작의 부진을 채웠습니다. 저는 여기에 더해 <멜랑꼴리아>, <빅 피쉬>, <걸어도 걸어도>, <린다 린다 린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남색대문>, <델마와 루이스>, <아마데우스>, <클리프행어> 등 작년 극장에서 본 재개봉 영화만 못해도 20편이 넘는 것 같네요. 수많은 재개봉 작품 중 저에게 있어 가장 새로운 발견은 <행복한 라짜로>였습니다. 어떤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 영화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사>는 작년 한 해 동안 저를 지배한 영화였습니다. 이전까지 <태풍 클럽>, <세일러복과 기관총> 외에 소마이 신지의 다른 작품은 볼 기회가 없었는데요. 약 32년 만에 국내 최초 개봉한 <이사>는 소마이 감독 영화 세계의 집약과도 같은, 그를 대표하는 최고작입니다. <벌집의 정령>, <비정성시>, <그림자 군단>, <친밀함> 등 잊을 수 없는 늦깎이 개봉 영화가 참 많았는데요. 그중에서도 단연 묵직한 존재감으로 소마이 신지라는 감독의 재발견까지 이끌어 냈습니다. <이사>에 이어 그의 또 다른 국내 미개봉 영화인 <여름정원>도 만나볼 수 있었죠.
<주토피아 2>, <엘리오>보다 뛰어났음은 물론, 화제성과 임팩트 측면에서 이와 견줄 만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실상 없었습니다. 귀주톱 트로이카의 동시다발적 극장판 개봉 행진에도 홀로 영화적 가치를 입증했네요. 올해의 캐릭터 상이 있다면 레제를 위한 것이겠죠. 체인소맨 IP의 컬트적인 인기가 원작 만화의 폼 회복으로 이어지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요...
하마구치 류스케 기획전에서 <친밀함>과 더불어 저를 매료한 영화입니다. 38분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이렇게 관객 마음 깊숙이 파고들 수 있다니, 하마구치의 재능에 탄복하면서도 이 영화 자체가 가진 기이한 매력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고작 18세의 나이로 주인공 사츠키를 완벽히 연기한 오가와 안은 이 영화 이후 근 10년 동안 작품 활동이 드문데요. 검색해 보니 배우 겸 영화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더군요. 2023년에는 오타 타츠나리 감독의 <돌을 찾아서>로 전주영화제를 찾았네요. 스기타 교시 감독의 <소리를 따라가다>도 같은 해 부국제 초청작이었고요. 비교적 최근에 내한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저 사고였을 뿐>과 함께 작년 그린나래미디어의 주요 수입작이었던 '우빛상모'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수입사 입장에서 수익적으로 만족할 만한 성적인지는 모르지만, 인도 여성 감독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 12,000명 넘게 관객을 동원했다는 건 제가 볼 때 기대 이상의 성취입니다. 그가 칸 영화제에 방문해 "다음에 인도 영화인을 초청하는 것이 또 수십 년 이후가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처럼, 인도 영화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이어지면 좋겠네요. 다음 작품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랜드 투어> 미겔 고메스 감독과 2파전 양상이었습니다. 그래도 작품상 감독이 감독상까지 받는 게 맞지 않나 해서 선정했습니다. PTA의 신작이 봉준호의 <미키 17>과 함께 작년 워너 재정에 막심한 타격을 준 양대산맥이라는 가십 기사가 쏟아져 나왔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관객 10만 명도 넘겨본 적 없던 PTA의 영화가 50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기록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죠. 결국 12월에 워너가 넷플릭스에 인수되었으니 이후의 일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운동성과 리듬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배우에게 몸을 쓰는 연기의 자연스러움이 얼마나 요구되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요. 체이스 인피니티가 보여준 연기는 신인 배우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퍼포먼스가 아닐까 합니다. 최근 서울에 방문해 경복궁과 인사동 일대를 놀러 다니는 모습을 SNS에서 실시간으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는 꽤 근처에 있었는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관람하느라 실물을 보지는 못했네요.
<여행과 나날>에서 카와이 유미의 존재감은 츠게 요시하루의 원작 만화 속 미지의 소녀를 뛰어넘었습니다. 미야케 쇼에게 아쉬운 건 만화 두 편을 엮어 만든 영화가 각각의 단편이 가지는 고유한 분위기와 특색을 100% 구현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1부 <해변의 서경>은 본래 훨씬 더 오싹하고 우울한 색채가 짙은 작품인데, 영화에서는 그 맛이 제대로 살지 않더라고요. 그걸 카와이 유미의 연기가 보완하지 않았나 합니다. <나미비아의 사막>,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 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나는> 등 그의 연기를 극장에서 만나볼 기회가 많았는데요. 한국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최근 아트나인을 통해 내한하기도 했죠. 점점 더 주연 출연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는 그가 어떤 작품과 연기로 돌아올지 궁금합니다.
제 눈에는 베니시오 델 토로의 사부가 숀 펜의 록조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는 이 인물 연기를 통해 영화 내외를 고루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는데요. 록조는 다른 사람이 맡았어도 그런 방식으로 연기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닌자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가라데 사범이자 박탄 크로스 불법 체류자들의 은신 및 탈출을 돕는 활동가인 세르히오는 델 토로가 아닌 다른 인물이 도대체 어떻게 소화할지 예상조차 가지 않아요. 경찰에게 붙잡힌 뒤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춤을 추는 등 몸을 쓰는 연기가 잦았던 만큼 조형적 요소를 구성하는 데에도 굉장히 어려웠을 겁니다. 그는 촬영 과정에서 '지하 이민'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등 시나리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단한 창의력입니다.
페르난다 토히스의 연기는 골든글로브 수상으로 수확을 거뒀지만 제겐 그조차 부족해 보입니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건 <아노라>의 마이키 매디슨입니다. 사람들은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가 수상하지 못한 게 이변이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제겐 <내 말 좀 들어줘>의 마리애나 장바티스트가 페르난다 토히스와 후보 한 자리를 두고 경쟁해 후보 지명에 탈락했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거든요. 어떻게 된 게 페르난다 토히스와 마리애나 장바티스트가 경쟁하는 게 아니라 마이키 매디슨과 데미 무어가 경쟁하는 게 정배일 수 있는지? 아, 마이키 매디슨의 연기는 물론 훌륭했습니다. 경쟁자를 모두 제치고 오스카를 수상할 정도가 아니어서 그렇지. 이러니까 로컬 시상식~ 로컬 시상식하는 거지.
마땅한 경쟁자가 없었습니다. 주연으로 더 나은 연기를 보여준 남자 배우가 누가 있었을까? <씨너스: 죄인들>의 마이클 B. 조던, <부고니아>의 제시 플레먼스도 에이드리언 브로디를 제치기에는 임팩트가 살짝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연기는 그에게 두 번째 오스카를 안겨 주었습니다. 한편 다가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티모시 샬라메가 <마티 슈프림>으로 수상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피아니스트>로 수상 당시 29세였던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아카데미 최연소 남우주연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요. 만약 티모시 샬라메가 이변 없이 수상한다면 30세로 해당 기록에서 2번째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만약 작년에 <컴플리트 언노운>으로 수상했다면 같은 29세여도 생일이 12월인 티모시 샬라메가 기록을 경신했을 겁니다.
브래디 코베와 꾸준히 협업해 온 대니얼 블룸버그가 <브루탈리스트>의 사운드트랙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즐로의 삶에 더 이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해피엔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씨너스: 죄인들> 등 사운드트랙이 훌륭한 영화가 많았는데, 완성도가 높은 건 이게 아닐까 합니다.
케이팝데몬헌터스가 유례없는 열풍을 불러 모으는 지금 매국노로 불리고 싶지는 않지만,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Golden은 저도 매일 흥얼거릴 정도로 중독성 있는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K-POP의 문법에 익숙한 한국인이 보고 듣기에는 그 클라이맥스가 좀 뻔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딱딱 먹기 좋게 서빙되는 기승전결이 직관적일지는 모르지만, 영화와 결부되어 서사를 더 잘 뒷받침하는 주제가는 이 노래가 아니었나 합니다. 그리고 굳이 따지면 Golden보다 Takedown, Free가 더 좋았거든요.
2025년의 엠엔엠은 타율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한 영화들만 골라 수입했습니다. 관객수만 놓고 보면 <미세리코르디아>가 유일하게 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흥행 면에서는 그리 성공한 해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당연하게도 엠엔엠은 흥행 수익을 우선으로 작품을 고르지 않습니다. 그런 뚝심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영화를 보는 안목이 대단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랜드 투어>와 <벌집의 정령>을 수입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