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영화 연말결산 (2025)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 저의 사적인 TOP 10을 소개합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한 해 동안 어떤 영화들이 개봉했는지 차근차근 돌아보는 글이 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작년에 비해 극장 경험의 감흥이 덜한 한 해였습니다. 재개봉 영화나 늦깎이 개봉 영화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고, 실사 영화에 비해 애니메이션 영화의 약진이 크게 돋보였습니다. 특히 장기화된 한국 영화의 침체가 최고조에 도달했습니다.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2012년부터 2024년까지 항상 존재했던 천만 영화가 작년에는 한 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5백만 남짓을 기록한 <좀비딸>이 작년 한국 영화 최대 히트작이며, 이마저도 웹툰 원작의 각색 영화입니다. 2025년 박스오피스는 오리지널 각본의 부진 현상이 고착화되었음은 물론, 인기 IP를 영화로 옮기는 행위가 더 이상 믿을 만한 흥행 공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는 지표였습니다. 위치와 위상 측면에서 한국(인이 만든) 영화의 중심이 되어주어야 했을 <미키 17>, <어쩔수가없다>의 흥행 성적과 완성도 또한 기대 이하였습니다. 이번에도 10위 내에 한국 영화는 없습니다.
TOP 10 리스트는 국내 개봉 시기가 2025년인 영화, 재개봉이 아닌 신작을 기준으로 선정했습니다. <이사>, <마작> 등의 늦깎이 개봉 영화는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미처 관람하지 못한 <부고니아>, <사운드 오브 폴링>,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등은 제외합니다. 제가 고른 영화 열 편을 소개하기에 앞서 아쉽게 10위 내 들지 못한 영화 일부를 소개합니다.
-순위 밖 영화
<여행과 나날>, <슈퍼 해피 포에버>, <세계의 주인>, <신성한 나무의 씨앗> (이상 별점 4.0)
<콘클라베>, <페니키안 스킴>, <어쩔수가없다>, <미러 넘버 3>, <체인소 맨: 레제편>, <국보>, <굿뉴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너는 나를 불태워>, <왼손잡이 소녀>, <바늘을 든 소녀>, <누벨바그> 등 (이상 별점 3.5)
"재난 세대의 무기력을 가로지르는 일본 청춘 시네마의 빛나는 긴장"이라는 김소미 기자의 한 줄 평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해피엔드>는 어지간히 뻔한 요소를 조합한 영화입니다. 같은 해 개봉한 <슈퍼 해피 포에버>가 동시대 영화가 주목해야 할 재난을 코로나19로 전환한 것과 비교하면, 지진은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관습적인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보았는데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좋았습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갖가지 의구심이 피어올랐고, 결국 리뷰를 쓰면서 평점을 낮췄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투박하고 세밀하지 못한 영화라는 생각이 굳어지더군요. 사실 같은 일본 영화인 <슈퍼 해피 포에버>와 <여행과 나날>까지 세 작품 중 어떤 걸 10위로 선정할까 무척 고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해피엔드>를 선택한 건 이 영화가 <태풍클럽>이나 <키즈 리턴>, 혹은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같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영화와 동일선상에서 평가받으며 생긴 착오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쇼와를 질투하는 레이와의 잔혹극(이우빈)이라는 표현처럼, 쇼와 시대 영화에서 청춘이 돌파해야 했던 세계의 폭력성과 혼돈은 레이와에 이르러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건 아닐까요. 당대의 젊은 세대가 마주하는 문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영화의 청춘들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남다은)" 영화를 다회차 관람하고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답을 내놓기란 불가능합니다. 13만 명의 이례적인 국내 흥행 기록과 MZ세대의 폭발적인 호응도 그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 20대 관객은 종과 개의 철학적 문제나 남성적인 폭력의 미학을 탐구하기보다, 오리무중에 빠져 '노답'을 외치는 현실진단의 우화에 훨씬 더 격렬하게 반응하고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냥 그런 시대가 온 것이죠.
자세한 리뷰는 아래에 링크 남깁니다.
<비밀과 거짓말>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선정되었던 마리애나 장바티스트가 다시 한번 마이크 리 감독과 만나 열연을 펼쳤습니다. 강박적으로 청소와 소독에 몰두하고 타인에게 지독한 언행을 일삼는 중년 여성 '팬지'를 가히 연기 차력쇼로 소화했는데요.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마이크 리의 능력에 새삼 놀랐습니다. 그의 영화 세계는 현대 영국 리얼리즘이라는 단순한 분류를 넘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왔습니다. 어느덧 82세가 된 마이크 리의 섬세함과 겸손함, 독보적인 인물 탐구 능력은 날이 갈수록 더 빛을 발합니다.
"허우샤오셴이 타이페이에서 해냈던 빛의 맘보 리듬을 파얄 카파디아가 뭄바이에서 속삭이듯 다시 해내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정성일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입니다. All We Imagine as Light, 아주 멋진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선 다수의 주인공이, '빛'을 위해선 어둠이 그리고 '상상'을 위해선 현실이 필요하다는 씨네21 정재현 기자의 표현이 제목의 이유를 잘 설명합니다. 제7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2024년 베스트 10 1위, 필름 코멘트 선정 2024년 베스트 20 1위에 빛나는 이 훌륭한 영화를 다가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볼 수 없을 전망입니다. 파얄 카파디아는 정부비판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무지의 밤>을 연출한 전력 때문에 인도영화협회에게 대놓고 차별받았습니다. 인도영화협회는 "인도 영화 같지 않다"며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에 다른 영화를 출품했고, 당연하게도 최종 후보에서 탈락했습니다. 같은 사례로 프랑스 정부의 미움을 샀던 <추락의 해부>가 떠오르네요. 우리나라에서 쉽게 외면받는 인도 영화인데다 인지도 낮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 등 흥행을 저해하는 악조건만 덕지덕지 붙어 있음에도 12,000명 남짓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아임 스틸 히어>는 작년 개봉작 중 유독 감독의 역량과 영화의 성취가 과소평가받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페르난다 토히스의 연기 또한 마리애나 장바티스트와 다른 결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과소평가하는 이유는 아마 '브라질 역사를 재현한 단순한 전기 영화'쯤으로 오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루벤스 파이바(작중 막내 아들)와 유년 시절부터 친구였던 바우테르 살리스 감독만이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스탤지어가 표면을 감싸고 있는 특수한 영화입니다.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기록이 파이바 가문의 가족사를 관통하며 비가시적인 추억을 가시적으로 그려냅니다. 애틋한 연민이 서려 있는 파이바 집안 곳곳과 리우데자네이루 도심의 풍경은 그 시절을 그대로 재현한 듯 살아 숨쉽니다.
듣도 보도 못한 스타일의 영화. 한국인으로서 미국 시대극은 그다지 와닿지 않고 뱀파이어 영화는 진부한 데다 음악 영화는 따분할 터인데, 한 번에 비벼놓으니 아니 이런 맛이?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어딘가 부족한 창작자라는 선입견을 주었던 <블랙 펜서> 시리즈를 벗어나 뚜렷한 작가주의적 색채로 대중과 평단 모두를 설득해 냈습니다. 흑인 커뮤니티와 블루스에 대한 헌사와도 같은 이 영화에는 정말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2시간 17분의 러닝타임 동안 각 장르가 서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룬다는 점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부터 <크리드>, <블랙 펜서> 시리즈 두 편, 그리고 <씨너스: 죄인들>까지 라이언 쿠글러와 5번이나 호흡을 맞춘 마이클 B. 조던의 1인 2역은 인생 연기라고 봐도 무방.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에서 커스틴 던스트와 충동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인턴 직원을 연기한 브래디 코베가 훗날 이런 영화를 만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원대한 야심의 크기에 걸맞은 세밀한 테크닉과 유려한 때깔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시오니즘을 도구화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AI 관련 구설수와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수상소감 논란까지 이어져 뒷맛이 영 찝찝하군요. 워낙 잘 만들어서 더 괘씸한 영화랄까.
자세한 리뷰는 아래에 링크 남깁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징역 1년과 출국금지 2년을 선고받고도 귀국을 선언한 지 한 달이 지나, 그의 고국 이란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영공은 폐쇄되었고 정부는 시위대를 무차별 학살 중이며 통신은 차단되었습니다. <아임 스틸 히어>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계엄령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의역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나라는 1년 전 겨울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을 보는 한국 관객은 계엄의 기억에 빗대어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인한 상흔을 간직한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바라보게 됩니다. 전작 <노 베어스>가 워낙 뛰어났던 탓에 이 영화의 성취가 간과되는 것 같습니다. 전작이 자기 고백의 영화였다면, <그저 사고였을 뿐>은 시선을 외부로 돌려 화자를 여러 타인에게 맡긴 영화라는 면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노 베어스>는 엔딩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여운을 남기고 끝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이란의 계엄을 통과한 자파르 파나히가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에 느끼는 여러 알러지 중 하나가 바로 유머인데요. 해마다 몇 편씩은 꼭 등장하는 B급 코미디 영화의 전형적 스킬, "자 지금 웃으시면 됩니다~"하는 식의 주입식 유머는 당연히 피로합니다. 저는 봉준호-박찬욱으로 대변되는 S급 감독의 세련된 영화에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나 유머의 작동 원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편견을 지우려 해도 "이만큼 좋은 영화를 만드는 나도 유머에 한해서는 한없이 망가질 수 있고, 대중 관객과 같은 눈높이에서 폭소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라고 부르짖는 것 같달까요? 봉준호의 서민적인 영화 속 유머 장면은 상대적으로 덜 튀는 반면, 사물의 대칭과 컬러 조합을 강박적으로 맞추고 '정돈되지 않은 것', '예쁘지 않은 것'은 화면에 허락하지 않는 탐미주의적인 박찬욱의 영화가 구사하는 유머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아니 진주 목걸이에 돼지 목 같은 기괴한 부조화로 다가옵니다. 마치 서민들을 웃기는 방법을 따로 공부해서 열심히 시연해 보는 재벌 2세 같다고나 할까요. <어쩔수가없다>의 유머는 별로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알랭 기로디를 좋아합니다. 그의 영화는 너무 웃기거든요. <미세리코르디아>는 웃기려는 강박도 전혀 없고 다루는 소재 면에서도 쉽게 웃을 만한 영화가 못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를 비롯한 관객들은 몇 분마다 한 번씩 폭소했습니다. 정규적인 영화 교육을 받지 않고 감독이 된 알랭 기로디는 모든 면에서 예측 불가능한 비범한 화법으로 관객을 매혹합니다. 그래서인지 유머도 전형적이지 않고요. 저에게는 작년 최고의 코미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당혹감으로 가득하다", "흥미진진한 괴작" <에스퍼의 빛>을 호평한 유운성 평론가의 말대로 모종의 불완전함에 열려 있는 것이 훌륭한 영화의 조건이라면, <그랜드 투어>야말로 그러한 수식이 어울리는 최고의 영화입니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타국의 생소한 풍경을 연속적으로 관망하는 쇼트는 내레이션이 서술하는 표면 서사와 어긋나며 괴리를 자아냅니다. 영화 시작부터 쏟아지는 푸티지 또는 다큐멘터리와 흡사한 이미지의 나열은 점점 더 큰 당혹감을 선사하는데, '아, 처음 놀이기구 장면은 에드워드의 꿈이었구나'하는 생각과 달리 꿈과 현실, 컬러와 흑백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영화 제목이 그랑투어인 것은 오리엔탈리즘을 배격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영화라는 점을 밝히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보입니다. 서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허구적인 아시아의 이미지는 영화 내에서 백인 남녀의 추격 로맨스를 꾸미는 미술 재료로 쓰일 뿐입니다. 미겔 고메스 감독은 백인이 촬영한 아카이빙 푸티지를 통해 오리엔탈리즘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Viva la revolución!" 트럼프 2.0 시대의 미국을 자조적으로 비추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세계가 정치적인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일반 대중으로 외연을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첫 번째 영화입니다. 4만 명이 채 되지 않던 <마스터>의 흥행 기록을 뛰어넘어 국내 50만 관객을 동원하며 PTA의 국내 최대 흥행작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예술 영화만 만든다는 그간의 오해를 벗고, 블록버스터로도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죠. 혁명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했다는 점이나 숀 펜이 연기한 전형적인 백인 극우 캐릭터 록조의 평면성 등 비판할 지점도 몇 군데 있지만, 저는 그런 사소한 단점을 신경 쓸 겨를없이 이 영화에 완전히 매혹되었습니다. 추후 작성할 리뷰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화면 안으로 우리의 눈을 빨아들여 이미지 바깥을 의식할 틈을 마련하지 않는 그 솜씨가 너무도 매끄럽고 강력해서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속임수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뒤늦게 안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행여 돋아날 그러한 의심의 가능성에 움츠리거나 거리끼지 않는 운동의 기세로 영화 끝까지 쾌속의 길을 개척하는 세계다. 그 기세에 올라탄 자만이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씨네21 남다은 평론가의 비평을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TOP10으로 선정한 영화 중 브런치에 리뷰를 남긴 건 달랑 두 편이네요. 잘쓰든 못쓰든 더 자주 써야 하는데 말은 쉽지. 올해엔 더 습관적으로 끄적이자고요. 한국 영화도 더 자주 보고.
다른 영화는 몰라도 <사운드 오브 폴링>은 관람만 하면 꽤 높은 순위에 안착하고 <해피엔드>가 순위 밖으로 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