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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Mar 19. 2024

애프터썬, 그늘진 기억에 드리운 비애

애프터썬 (2022) 리뷰

아직 쌀쌀하던 작년 3월 중순쯤, 별생각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씨네큐브를 찾아가 <애프터썬>을 감상했다. 국내용 포스터에 적힌 ‘선연하게 남아있는 그해 여름’이란 글귀에 이끌렸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선연하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께름칙하다. 작품이 보여주는 그해 여름은 선연하기는커녕 흐릿하다 못해 대부분 주인공의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해 여름이란 1990년대 후반 주인공 소피가 11살이었을 시절 31살의 젊은 아버지 캘럼과 튀르키예 여행을 다녀왔던 시기를 말한다. 영화는 여행 당시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된 어른 소피가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진행된다.


<애프터썬>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성 감독 샬롯 웰스의 데뷔작으로,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추후 인터뷰를 찾아보니 샬롯 웰스는 자전적이라는 단어로 인해 작품이 기계적으로 규정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고, 그 대신 ‘정서적으로 자전적(emotionally autobiographical)’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나는 이러한 비하인드를 모른 채 관람했지만, 영화가 부녀관계를 그리며 뿜는 광대한 페이소스만으로 이것이 창작자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작품임을 확신했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유년 시절 떠난 아버지와의 여행을 어른이 되어 회상한다는 다소 전형적인 소재를 지녔다. 만약 여기서 그쳤다면 이 영화가 감정을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했는가에 관한 칭찬 외에는 딱히 덧붙일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 뻔한 클리셰는 여름 여행의 단편에 불과한 캠코더 영상으로 기억을 필사적으로 짜맞추려는 소피의 발버둥을 통해 ‘희미한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보다 큰 제의로 뻗어 나간다.


캠코더 영상 외에도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다른 다양한 방법이 제시된다. 오히려 비중을 따지면 녹화 영상을 통한 회상보다는 허구적 재현, 상상과 재구성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영화의 전반부가 분명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과연 ‘누구’의 기억인지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아버지 캘럼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내리훑게 된다. 그러다 소피가 캠코더를 들고 아버지를 장난스레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며, 관객은 그제야 오프닝의 성인 여성이 소피이고 그녀가 어릴 적 아버지와의 여행을 회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정보의 시차는 하나의 기억에 관해 소피와 캘럼이 겪는 시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는 과거의 일은 어떻게 기억되며 현재에 이르러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부녀의 튀르키예 여행은 캠코더 영상, 어린 소피의 기억, 성인 소피의 상상과 꿈이 혼재하며 조각조각 나열된다. 누구나 그렇듯 유년 시절의 일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전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특히 가족과의 일이라면, 더군다나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과의 추억이라면 기억이 왜곡되기 마련일 것이다.


또한 캠코더 속 실제 벌어진 사건들조차 어쩌면 ‘소피가 기억하고 싶은 특정 순간’만 기록된 것일지 모른다. 다른 의미로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과 전부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 것을 철저히 구분했다는 측면은 이 영화가 단순히 감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굉장히 훌륭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11살의 어린 소피가 여행에서 발생한 사건의 내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 부녀 사이 일련의 시차를 관객에게 아주 창의적이고 탁월한 방법으로 전달하고 있다.


어른이 된 소피는 악몽을 꾸다 동성 연인에게 생일 축하를 받으며 깨어나는데, 현재 시점의 소피가 여행 당시 아버지 캘럼과 같은 나이가 됐음을 추측할 수 있다. 소피가 31살이 됐어도 캘럼은 11살 소피의 기억에 박제된 31살일 뿐이다. 부녀 사이의 필연성으로 인해 기억의 시차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다. 작품에 등장하지 않은 어떤 사건이 더 있건 간에, 아마 부녀의 화해는 영영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부모-자식 간의 불가항력적 시차라 하니, 곧 <인터스텔라>가 떠오른다. 작중 아버지 쿠퍼는 끝내 딸 머피에게 돌아오는 데 성공하지만 같은 나이이다 못해 머피가 쿠퍼보다 한참 늙어 임종을 앞둔 할머니가 되어 버린다. 고난 끝에 서로를 마주한 쿠퍼와 머피의 부녀관계는 언뜻 화해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화해했어야 할 적정 시기로부터 아득히 지나버렸을 뿐이다. 머피는 쿠퍼가 떠났던 시점과 같은 나이가 될 때까지 평생 재회의 순간을 간절히 바랐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반대로 쿠퍼가 마침내 돌아와 그토록 바랐던 딸의 손을 잡았을 때, 이미 머피에게 있어 와해되었던 먼 옛날의 부녀관계는 이제 그녀의 인생에 있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물리적인, 또 개인적인 시차로 인해 끝까지 화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우울증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작중 캘럼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깊은 우울감을 겪고 있고, 삶을 이어 나갈 의지가 꺾일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캘럼은 여행을 마친 뒤 튀르키예에서 자살했고, 소피는 성소수자이며, 아버지와의 여행을 떠올리며 그 역시 성소수자였던 건 아닐지 고심하는 걸로 보인다. 그리고 대답 없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여름 여행의 편린에 불과한 캠코더 화면을 붙들고 그 기억이 기어코 선연해질 때까지 발버둥 쳤을 것이다.


오프닝의 어른 소피와 후반부의 캘럼이 마치 클럽처럼 점멸하는 어두운 공간에 서 있는 장면은 상징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 ‘어둠 클럽’은 소피의 상상, 꿈, 또는 영적 세계로 보이기도 하지만, 두 장면의 의도적인 대비를 고려하면 소피와 캘럼의 성소수자 정체성이 대변된 비유적인 공간으로 보인다.


31살이 되어 동성 연인과 살아가고 있는 소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현실에 발을 붙여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어둠 클럽에서 남들처럼 춤을 추려한다거나 군중 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뜬 채 어딘가를 응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캘럼은 주변 사람을 따라 덩달아 춤을 추지만, 그것은 춤이라기엔 차라리 질곡에 가까운 몸부림처럼 보인다. 캘럼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현실과 조응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다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캘럼의 자살을 기정사실로 가정하고 영화를 다시 되짚어 보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딸과의 마지막 여행에서,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을까? 캘럼은 호신술을 가르쳐주며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어른들과 당구를 하는 대신 건전하게 물놀이를 하길 바란다. 성인 잡지 대신 지방 자치에 관한 책을 읽게 한다. 소피가 여행지 관광객들을 끌어모아 아버지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캘럼은 기뻐하지 못하고 언덕 위에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어찌할 도리 없이 복잡다단한 표정을 짓는다. 스스로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여겨 딸에게 마지막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부족한 자금을 탈탈 털어 여행을 온 캘럼에게, 소피로부터 탄생을 축하받는다는 건 극도로 심란한 일이었으리라. 유적지 언덕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호텔 발코니 난간 위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올라서 있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 광경마저 소피의 상상에 불과하다는 점은 그야말로 비통하다.


어른이 되어 캘럼의 그늘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소피는 끊임없이 그해 여름의 이야기를 공상한다. 그녀가 어둠 클럽에서 군중을 뚫고 나아가 고통스러운 캘럼의 몸부림을 포옹으로 잠재운 것은 아버지와 화해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로 보인다. 기억을 부검하고 재구성하는 것도 모자라, 어떻게든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다. 소피가 이토록 처절하게 분투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영영 화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겨진 사람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망자를 추억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소피는 미약한 기억에 기대어 이룰 수 없는 화해를 평생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무적이다.


'애프터썬'은 이미 햇볕에 그을린 뒤 피부에 바르는 크림이다. 썬크림과 달리 미래의 일을 예방하는 것이 아닌 이미 지난 과거를 복원하는 용도다. 과거를 되살리는 행위, 어떻게든 기억해 내려는 필사적 마음이 곧 영화의 총체다. 캘럼에게 듀엣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소피가 혼자 부른 R.E.M.의 <Losing My Religion>의 가사가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맴돌게 된다. 그녀의 진심이 아버지에게 닿을 가능성은 요원하기에 더욱 처연하고 애석하다.



죽은 사람은 무적이다. 만화 <메종일각>의 명대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망자와 경쟁하는 구도는 영화 <러브레터>에서 반복되기도 했죠. 애프터썬에서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는데, 남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떠난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만이 증식되고 상상이 반복된다는 특징은 다르지 않죠. 캘럼이 소피의 기억에 무적으로 남아 있는 한, 그녀가 원하는 화해는 필생을 바쳐도 이룰 수 없을 겁니다. 개봉 1주년을 맞아 씨네큐브에서 재개봉했는데, 단 1회 추가상영이라 벌써 다 매진됐네요. 무척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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