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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니뇨 Apr 09. 2016

가장자리에서 가운데로 나아가는 사랑

영화 '캐롤' 이야기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그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하여. 여자와 여자, 혹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겠지.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이 만나 같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동일한 종점으로 향한다는 걸 생각이나 해봤을까. 

 혹자는 레즈비언 영화라 칭했으나, 그렇다고 동성애적 퀴어 영화라고 단정지을 순 없었다. 퀴어영화 류의 감성이 결여됐다고 느꼈기에 동의할 수 없었던 거다. 또한 생경한 이야기라고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보기 드문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말하겠다. 여기서 언급하는 '보기 드문 사랑'엔 어떠한 사랑에도 담겨있는 보편성이 함유되어 있다고 생각하기에.

 


- 화면에 위치한 두 인물에 담긴 함의

 두 인물은 이전까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도생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한 명은 남자친구와 연인관계를 유지하며 사진을 찍었고, 다른 한 명은 부부라는 법적 효력을 지닌 관계를 명목상으로나마 유지하며 외동딸을 키우는 어머니이자 아내였다. 보편적인 일상을 유지하는 두 인물은 아직 사랑에 몰두하기 이전의 상태였다. 감독은 그런 안온함을 가장한 안일함에서 빠져나오도록 유도했고, 둘만의 감정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조금 다른 방향으로 앵글을 틀었다.

 카메라는 두 인물이 함께하기 전까지 일정한 앵글을 유지하는데, 그것은 사회적, 개인적으로 잠재되어있는 두 인물의 개별적인 의식을 변방에 위치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두 사람이 이전까지 감정의 변방에 수동적으로 머물러 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인물을 앵글에 담을 때 화면의 가장자리에 두거나 중앙에서 살짝 비껴낸 것이 그 증거다. 카메라는 두 주인공이 여행을 가기 전까지 한 인물을 잡을 때 결코 중앙으로 내비치지 않았다. 

 두 인물을 상수와 하수를 나누듯 화면의 양끝에 놓고 둘 사이의 거리를 강조한 것 또한 감독의 의도라 보인다. 곧이어 카메라는 인물을 주변부에 위치시킨 컷과 씬들을 쌓아가며 대척점에 위치한 둘의 화면상의 거리와 함께 정서상의 거리도 슬며시 좁혀가며 두 주인공을 중앙으로 함께 이끌어낸다. 여행을 떠나는 시점부터 카메라는 서서히 인물의 클로즈업을 제대로 잡아내며 감정의 터럭들을 한 숟갈씩 보여줬고, 앞으로 일어날 클라이막스를 넌지시 속삭여줬다. 


 - 그들은 성급하게 자신을 내비치지 않았다.

 캐롤은 초반부터 테레즈에게 적극적이다. 이전에도 그러한 관계를 유지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남편과 불화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자신과 테레즈에 대한 온전한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자꾸만 테레즈를 향해 나아간다. 테레즈는 캐롤과 반대로 처음에 느낀 감정을 조금은 지나치지만 호의 이상이 아닌 것으로 여겼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캐롤의 행위로 인해 둘의 관계가 특수한 상황과 느낌을 자아낸다고 인식하고, 망설이다가 자신 또한 캐롤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캐롤에 대한 마음을 키워간다. 여행으로 인해 둘의 마음은 함께라는 것에 익숙해지고, 결합된 감정은 빠른 속도로 커진다. 

 그러나 역시나 위기가 찾아오고, 오해와 불화와 결별로 인해 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으며, 주변 인물들과 관련된 부정적 상황에도 초조해하거나 서로의 결정을 재촉하지 않는다. 둘은 각자의 일상에 충실한 채로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며 열망할 뿐이다. 이같은 두 인물의 양상은 사랑에 대한 인내를 통해 보편적인 연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읽혔다. 또한 이것은 보편적인 사랑의 한 요소로(앞에서 언급한 '보기 드문 사랑'에 해당하는) 기능했다. 소수자적 스노비즘을 걸러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 화면에 집중하여

 안정적인 픽스숏이나 고정된 패닝이 있었지만, 때론 불안정한 핸드헬드 숏으로 가기도 했고, 인물과 차량의 동선을 달리나 크레인으로 따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숏들은 굉장히 깔끔하면서도 오버하거나 오글거리지 않아서 서사적으로 절제된 감정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격정적인 정사씬에서 굉장히 감각적인 촬영을 볼 수 있었다. 정사씬을 부감숏에서 아웃 포커싱을 통한 블러처리와 음향 앰비언스적 잔상을 결합하여 끝맺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감각적이지만 넘치지 않게, 담백하면서도 격정적인 감정처리가 돋보인 씬이었다. 토드 헤인즈는 감정의 치솟음을 경계했지만 그렇다고 건조함을 나타내지는 않았고, 상황을 좀더 관망하는 시점에서 화면을 깔끔하게 다듬어 처리했다. 그랬기에 숏과 그것을 쌓아 만들어가는 이미지 스토리텔링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 특별한 배우들

 두 배우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역시나 케이트 블란챗은 속물스럽지 않은 고급스러움을 유지하며 참으로 고혹적으로 화면에 나타났다. 테레즈에게 접근하는 캐롤로 분한 그녀는 보채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다가가는 연기를 너무나 잘 해줬다. 또한 어머니와 아내를 연기할 땐 그 틀에 맞게 다채로운 감정의 흐름을 잘 소화했다. 루니 마라는 순수하면서 어리숙한 느낌을 자아내면서도 심지가 굳은 캐릭터를 잘 이해했다고 느꼈는데, 절제를 통해 정제된 감정으로 과잉된 액팅을 최대한 배제했다는 것을 느끼게끔 연기했다. 예상보다 루니 마라는 담담하면서 무던하게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두 배우의 연기는 성숙하고 담백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토드 헤인즈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스토리텔링이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감독 자신과 다른 성별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잘 구성해낸 것이다. 곳곳에 대사적 장치들과 카메라 워킹을 밀도있게 꾸밈으로써 의도한 바를 상세히 묘사해냈다. 내러티브도 내러티브지만 이미지 전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작들과 다른 성질의 콘티를 꾸몄고, 보다 섬세한 화면과 내러티브 전개로 작품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그런 요소들을 통해 관객과의 영화적 소통에 대해 한 발 더 나아갔다고 느꼈다. '캐롤'은 딱히 군더더기 없는 따뜻하고도 예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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