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게으른 나는 시작이 두렵다. 끝을 잘 맺지 못할까봐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어쩌다 보니 결국 오게 됐다. 싱가포르에서 4년, 잘 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족들을 두고 먼저 이 땅에 왔다.
도착했다, 싱가포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더운 공기가 훅 몰려왔다. 우리나라 한여름 날씨다. 창이공항은 깔끔하고 친절했다. 와이파이를 쓰려면 휴대폰 인증번호를 받아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며 핸드폰을 해지하고 왔다. 세상과 단절됐다. 마중나온 선배와 연락이 닿지 않아 벨트에서 짐부터 찾은 뒤 서둘러 출구로 향했다. 이 길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문구가 왠지 생경했다. 한눈에 기다리던 분을 만났다. 주차장으로 이동해 차에 짐을 싣고 숙소로 향했다. 더운 공기에 숨을 쉴 때마다 목 아래가 뜨거웠다. 선글라스를 꺼내 들었다.
2018년 12월
첫 출근
모든 것이 낯설었다. Napier Road 버스 정류장에서는 인터폴 건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무성한 나무들 사이에 모습이 드러났다. 파란색과 회색 비스듬한 건물이 우주선 같다. 육교를 건너려는 순간 비가 왔다. 말로만 듣던 열대성 스콜이다. 비로소 낯선 남국에 도착했음이 실감난다. 갑자기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연했다. 손우산을 만들어 달렸다. 초소에 도착해 대략 저는 앞으로 여기에서 근무할 사람인데 문을 열어줄 수 있는가요, 라고 했던 것 같다. 대략 3~4개 정도 관문을 거쳐 비로소 건물 안에 들어섰다. 로비에 있으면 인사과에서 동료가 올거라고 한다. 웅장한 아뜨리움 사이로 이어지는 복도 한 가운데쯤, Stock 사무총장님과 김종양 총재님 액자 앞 소파에서 나는 아이처럼 기다렸다.
이메일이 몇번 오갔던 Valentine이 왔다. 3층 인사과로 데려갔다. 작성해야할 서류들을 주고 신분증에 쓸 사진을 찍었다. 이게 앞으로 4년 동안 쓰게 될 프로필인 줄 알았더라면 더 잘 찍었을텐데. 한참 서류들에 서명을 하고 4층으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유리문을 여니 길다란 복도가 나왔다. 휘어진 복도에는 커다란 창이 나 있어 건물 안과 밖이 모두 보였다. 저 끝이 사이버범죄국 사무실이다. 이곳이 내가 지낼 곳이라고 한다.
동료들을 만났다. 나이지리아, UAE, 싱가포르, 일본, 스웨덴, 중국 등등 대략 20여 개국에서 온 친구들이 개방감있는 커다란 사무실에 함께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받았고, 새로운 환경을 오감으로 받아들였다. 유리창이 난 복도의 환한 냄새, 어느 새 비가 그쳐 신록보다 더 짙은 푸르른 나무들, 그리고 한 명 한 명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는 동료들. 내가 인터폴에 왔다니, 나는 참 행복한 인간이다.
- 2019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