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 I quit.

다리에 불 지르기

by 다소니

“I quit.” (나 그만둘 거야.) 나는 연습한 대로 무표정하게 담담하게 내뱉었다.

"What did you just say???" (방금 뭐라고 했어???) 리로이는 눈을 접시만큼 크게 뜨며 숨을 들이쉬었다.

“I quit.” (나 그만둔다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What do you mean???" (그게 무슨 말이야???) 리로이는 정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한 단계 더 높였다.

"Oh, I'm sorry, I resign?" (아, 미안. 사직한다고 해야 하나?) 나는 얘가 왜 못 알아듣나 의아해하며 단어를 바꿨다.

"What? Why? Why are you doing this to me???" (뭐라고?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는 거의 절규하듯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제는 내가 어이없어할 차례였다.

"What do you mean, Why? You were an absolute asshole to me for more than a month!!! How did you not see this coming???" (왜라니, 뭔 소리야? 지난 한 달 넘게 나한테 완전 개같이 굴었잖아! 이런 일이 일어날걸 예상 못했어?) 나는 맞받아 소리를 질렀다. 아, 시원해. 한여름에 살얼음 동동 떠 있는 냉면 국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진작 이렇게 할걸…


지난달 라이언에게 에밀리와 데비의 비행을 고해바치고 난 후 내 일상은 지옥이 되었다. 설마 라이언이 그 얘기를 그들에게 했을 리는 없겠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골탕 먹이고 트집을 잡아 리로이와 나를 들볶았다. 리로이는 점점 그들의 편에 서서 나를 야단치려 들었고, 그게 정당하지 않다는 건 나도, 그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오피스에서 나를 빼고 라이언, 리로이, 에밀리가 자주 회의를 하기 시작했고, 내게 이해하기 어려운 리포트를 요청했다. 그들은 내 리포트가 자기들 각본에 안 맞으면 요구 조건을 조금씩 바꿔가며 목적을 달성할때까지 같은 일을 반복시켰다. 처음부터 목적과 시나리오를 공유했으면 내가 훨씬 쉽게 일했을 텐데, 숨기고 데이터만 마사지하라니 서로 죽을 맛이었다. 특히 리로이는 에밀리와 경쟁해야 하는데 능력이 딸렸으므로 나에게 전적으로 매달려서 일을 시켰다.


결국 어느 날, 내 리포트가 에밀리에게 부결되어 다시 내려왔을 때, 문서 제목이 ‘꿀벌 프로젝트(The Honeybee Project)’인 걸 보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자로 그녀에게 그게 뭔지 물었다. 그녀에게서는 답이 없었고, 한 시간 후 리로이가 내 큐비클을 두드리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를 따라 쫄래쫄래 걸어가는데 에밀리가 곁눈질을 하며 씨익 웃었다. 소름이 끼치면서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리로이는 그의 오피스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인상을 벅벅 쓰면서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Why did you ask Emily what The Honeybee Project was?” (에밀리한테 꿀벌 프로젝트가 뭐냐고 왜 물었어?) 그는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Why shouldn’t I?” (왜 물으면 안 되는데?) 나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You cannot ask those kinds of things. If you need to know, we would have told you. You just need to produce what we ask.”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네가 알아야 했다면 우리가 얘기했겠지. 그냥 우리가 시키는 것만 해.) 우리? 언제부터 내가 그의 "우리"에서 제외되었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은 한낱 매니저인 내가 알아야할 수준이 아니란 뜻이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그를 위해, 회사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아 졌다.


“Got it.”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와 에밀리의 지시에 따라 리포트를 고쳐서 보내고 시간을 봤다. 다섯 시가 넘었다. 나는 랩탑을 닫고 가방을 챙겼다.

“Where are you going??” (어디 가는 거야??) 어느새 내 큐비클에 와 있던 리로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일이 없어도 여섯 시 넘어, 일이 있으면 일곱 시, 여덟 시까지 일하기가 다반사였으므로 그럴 만했다.

“Home.” (집에.) 나는 건조하게 대답하고 걸어 나왔다.

"Oh, ok, today was a long day. But let’s huddle the first thing in the morning. Be ready to present all the pending items.” (그래, 오늘 하루 길었지. 내일 아침 일찍 회의하자. 보류된 항목들 다 준비해 와.) 리로이는 내 기분이 저조한 이유를 알았는지 잡지는 않았지만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퇴근길 트래픽은 거의 주차장이었다. 러시아워에 출퇴근하는 일이 없는 내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세상에, 사람들이 이렇게 오래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니 인내심도 많지... 덕분에 나는 한 시간 넘게 차 안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재운 후, 나는 마이크에게 와인을 따라주고 나를 위한 카모마일 티를 만들었다. 마이크와 이렇게 한자리에 앉는 것도 오랜만인 듯싶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긴장이 되었다.

“I’m going to quit my job.” (나 회사 그만둘 거야.)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That’s a great idea!” (잘 생각했어!) 마이크는 활짝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Aren’t you going to ask me why?” (왜 그러는지 안 물어봐?) 나는 기가 막혀 공중에 걸린 그의 손을 무시하고 물었다.

“I don’t need to ask why. You were unhappy at that place for a long time. However, I'm all ears. Why now?” (그럴 필요 없으니까. 거기 싫어한지 오래 됬쟎아. 하지만 얘기해봐, 왜 지금인지.)

“Well, I asked myself why I worked so hard over the last few years. In the beginning, it was to prove my worth — for money and approval. Then I think it became about power. I was just a low-level analyst, then a manager, but I had a lot of power over people because I controlled the budget. Now I feel like I’ve lost that. And somehow, I just don’t want to work anymore. I know this sounds pretty bad and irrational...” (지난 몇년 동안 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어. 처음엔 내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지. 돈과 인정받기 위해서.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권력의 문제였던 것 같아. 나는 그냥 하급 애널리스트였다가 매니저가 됐지만, 예산을 내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힘을 잃어버린 것 같아. 그리고 왠지 더 이상 일하고 싶지가 않아. 이런 말이 되게 이상하고 비이성적으로 들리는 거, 나도 알아...)

나는 내가 말해놓고도 한심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It doesn’t matter if it is irrational or not. I don’t make a lot of money but I make enough for us. I want you to be where you can be happy.” (합리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내가 많이는 아니어도 우리가 먹고 살정도는 벌잖아. 난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마이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울컥했다. 지난 몇년간 나를 짓눌렀던 바윗덩어리가 내 어깨에서 굴러 내려간 느낌이었다.


그다음 날, 나는 리로이에게 사직을 알렸고 그는 문자 그대로 팔팔 뛰다가 제발 생각을 바꿔달라고 빌다가 했다. 그동안의 우정을 봐서 자기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원망을 했지만, 나를 친구가 아닌 자기 발판으로 취급한 건 리로이가 먼저였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모든 일을 체계화해서 문서로 정리하면서 떠날 준비를 했다. 내가 그만둔다는 얘기가 퍼지자 오피스는 물론 필드에서도 계속 연락이 왔다. 마침 오피스에 와있던 로건은 내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그건 내가 전에 그에게 물었던 말이었다. 그때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아직도 회사에 남아있었다. 나는 그때 그가 그랬듯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도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한 명의 이름과 이메일을 건넸다.

“My buddy, Frank is looking for a Finance Director for his medi-tech startup. You should talk to him.” (내 친구 프랭크가 메디텍 스타트업에서 파이낸스 디렉터를 찾고 있어. 얘기해 봐.)


나는 즉시 프랭크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그는 당장 만나자고 했다. 나는 리로이의 짜증을 무시하고 오후 반차를 내고 프랭크의 오피스로 면접을 보러 갔다. 오피스는 작았고, 새 집기들과 캐비닛들이 박스에 쌓여 나오지도 않은 채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컨퍼런스룸인지 청소 창고인지 헷갈리는 공간에서 프랭크를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나는 스타워즈에 나오는 추바카를 보았다. VP of Finance인 프랭크는 키가 6피트 7인치쯤 되어 보였고, 얼굴 전체가 주황색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덮여 초록색 눈이 간신히 보였다. 그의 옆에는 한 솔로처럼 생긴 회계 부서장 조셉이 웃으며 서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다섯 명의 임원과 5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적어도 열 살에서 열다섯 살은 어려 보였다. 스타트업이 실리콘밸리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동네 같은 중소 도시에도 있다니 신기했다.

그리고 이틀 뒤 나는 오퍼 레터를 받고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거기엔 지금 내 연봉의 두 배가 적혀 있었다. 스타트업이 이렇게 돈이 많을 줄은 몰랐다. 나는 내 리크루터인 캐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 오퍼를 수락해도 되는지 물었다.

“Heck, yeah!!” (당연히 받아야지!!) 그녀는 6년 전처럼 똑같이 대답했다.

“Frank said he cannot guarantee my position for more than 3 years.” (프랭크는 3년 이상 내 자리를 보장할 순 없대.)

“Yeah, that’s what happens to Private Equity firm owned companies. They build, grow and sell. Are you ok with that?” (그래, 사모펀드가 소유한 회사들이 그렇지. 세우고, 키우고, 팔고. 괜찮겠어?)

“I think so.” (괜찮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엔 Jefferson Starship의 “We Built This City” 가울려퍼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마지막 날 점심 회사 사람들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나를 위한 송별연을 열어주었다. 40명이 넘게 왔는데 정작 내 팀에서는 라이언도, 에밀리도, 데비도 심지어는 리로이도 오질 않았다. 점심은 두 시간 넘어 끝났고 아직 다 인사도 다 안 끝났는데 리로이가 언제 오피스로 돌아올 거냐고 라이언이 새 리포트를 기다리고 있다며 전화를 했다. 원래 우리 회사는 퇴사하는 날 점심이 마지막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내가 마지막 날 마지막 시까지 일할 걸로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I'm not coming back to the office.” (나 안 돌아가.)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What???” (뭐라고???) 리로이가 소리를 질렀다.

“I've already turned in the laptop.” (노트북은 이미 반납했어.)

“How can you do this to me?”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리로이는 백번도 더 했던 소리를 또 되풀이했다.

“You must be mistaken. I don’t owe you anything. Don't call me. I wish you luck.”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너한테 아무 빚도 없어. 이제 나한테 전화하지 마. 행운을 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


‘Don’t burn the bridge.’ 퇴사를 할 때 다리 태우지 말라는 말은 진리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직접 불을 질러야 하는 다리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레스토랑을 나와 내 차에 올라타고 음악 볼륨을 한껏 올렸다. Jefferson Starship의 “Nothing’s Gonna Stop Us Now” 가 울려 퍼졌고 나는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른 오후의 퇴근길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뻥 뚫려있었다.


나의 미국 회사 생존기 1부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