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 깊어져만 가는 수렁

사라진 직업윤리

by 다소니

나일즈의 오피스에 블라인드 너머로 리로이가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오피스 도어에 나일즈의 이름표가 붙어 있던 자리를 잠깐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곧 리로이의 이름표가 붙겠지. 나는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고, 리로이가 고개를 끄덕거려 응답을 한 후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Since when you are knocking on the door?" (웬 노크?)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성질 급한 나는 나일즈가 회의 중이지 않은 한, 문을 두드림과 동시에 몸이 벌써 문을 밀고 반쯤 오피스에 들어가 있는 일이 다반사였고 팀은 그런 나를 놀리곤 했었다.

"Well, you are the new boss. I haven’t figured out what is ok and what is not." (이제 네가 내 새 보스니까, 뭘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아직 잘 몰라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Junsu… It is me, Muffin, your buddy." (준수, 나야, 네 친구 머핀이잖아.) 리로이는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입사 초기 내가 핏불 데비에게 물렸을때, 그녀를 성토하는 잡담을 하다가 리로이는 자기 자신을 Stud-Muffin 이라고 부르며 남자다우면서도 귀여운 척 자화자찬을 한 이후로, 그가 늘 나를 꼬마(shorty)라고 불렀기에 나는 Stud 를 빼고 그를 Muffin 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사실 섹시함을 나타내는 단어는 Stud 여서 그는 그걸 빼면 어떻게 하냐고 불평을 했지만 나는 그거까지 다 부르기에는 너무 길다고 일축했고 자꾸 불평을 하면 Muffin Top(배둘레햄)이라고 부르겠다고 위협을 했다. 둘 다 HR 에 걸리면 당장 시말서를 써야 할 일이었지만 우리 부서 사람들은 리로이와 나의 티격태격을 재미있어했고 그래서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 나는 리로이의 천진함을 좋아했고 한국에 있는 내 남동생 대하듯 격의없는 관계가 편했다. 그리고 큰 누나 같은 심정으로 전공이 아닌 분야에서 고분군투 하는 그를 도왔던것이다. 그런데 그런 리로이가 내게 이런 중요한 일을 한마디도 없이, 전혀 내색을 안하고 진행을 했다. 그로서는 너무 당연한 일인데 그에 대한 나의 신뢰는 산산 조각이 나버렸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We’ll figure it out. Let’s review my list, shall we?" (차차 알게 되겠지. 일단 내 리스트부터 보자.)

나는 랩탑을 열고 스마트보드에 내가 하고 있는 온갖 일들을 분야별로 정리한 파일을 띄웠다.

"What would you like to see first?" (어떤 것부터 볼래?)
"My lord, are you doing all of these by yourself???" (세상에, 이걸 전부 혼자 하고 있었어???)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록을 만들어 보니 심하다 싶을 만큼 많았다. 새삼 울화가 치밀었다.

"I’ve been asking for the backfills for my position and Luck’s position but Ryan gave me two temps." (내 자리랑 룩 자리 대체 인력 요청했는데, 라이언은 임시직 두 명만 줬어.) 나는 건조하게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그 후 두 시간 동안 내가 맡은 일 중 일부를 설명했고, 리로이는 자기 뇌에 과부하가 걸렸다며 내일 계속하자더니 두통약을 찾았다. 나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그의 한계가 뻔히 보였고, 앞으로 얼마나 고생할지 생각만 해도 깨소금맛이라고 혀를 메롱해주고 싶었다. 동시에 나한테 잘못한 게 없는 리로이에게 내가 왜 이러지도 싶었다. 나를 친구라고 여기고 자신의 성공을 같이 기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그에게 단지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내 멋대로 판단하고 시기하고 있었던 것 같아 찜찜했다.


리로이를 안쓰럽게 생각했던 마음은 그다음 날부터 내가 몇 시간씩 그와 씨름하며 그를 가르치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내 일을 리뷰해줘야 할 보스를 오히려 가르쳐야 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짜증을 유발했지만, 리로이의 스태미나와 집중력은 존경할 만했다. 문제는 나와 라이언의 중간 역할을 해야 하는 그가 라이언의 질문조차 이해하지 못해, 결국 내가 임원 회의에까지 불려 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이럴 거면 리로이를 그 자리에 앉힌 이유가 뭐냐는 의문이 또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나일즈가 흑인이라 구색을 맞추느라 역시 흑인인 리로이를 뽑은 게 아니냐는 흑색 소문까지 돌았다. 설마 그랬을 리는 없었겠지만 이래 저래 내 일은 더 고달파졌으면 고달파졌지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언은 난데없이 금발에 얼음 같은 청회색 눈을 가진 에밀리를 데려왔다. 내 밑에 애널리스트 둘을 채용하는 대신 파이낸스 디렉터 한 명을 뽑았다며, 라이언에게 보고하는 업무를 에밀리에게 넘기라고 했다. 얼핏 보기엔 내 일을 덜어주는 것 같았지만, 실제론 내 직무 자체를 애널리스트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었다. 리로이가 내 보스였지만 에밀리가 해야 하는 일이 내게 받은 보고서를 다듬어서 라이언에게 올리는 일이었으므로 실제적으로 내 일이 줄지는 않았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들으면서도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라이언이 나를 싫어하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나일즈가 떠난 지도 이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아쉬워서든 어쨌든 나를 승진시켜 놓고 왜 이런 식으로 물을 먹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나일즈하고 사이가 좋았던 것 때문에 너한테 피해 준 게 뭐냐고 따져보고 싶었지만 그런 얘기는 당연히 내 머릿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데비가 출산휴가에서 복귀했다.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다시 시험관 시술을 했고,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그리고 이혼 소송 중이었지만 두 살짜리 아이가 있어서 곧 싱글맘이 될 에밀리와 단짝이 되었고,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과 멀쩡한 남편이 있는 나는 곧 왕따가 되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데비는 임신 중이기에 해고 염려도 없었고, 곧 가족이 있는 오하이오로 돌아갈 생각이기에 일은 최소한으로만 했다. 에밀리는 남편이 비서와 바람이 나서 그야말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이혼 과정을 겪느라 일을 나몰라라 했다. 그리고 그 둘은 자기네와 같이 수다를 떨거나 두 시간씩 점심을 먹고 오지 않는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에밀리는 그렇다 치고 늘 열심히 일하던 데비가 나태해지면서 나를 적대시한다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는 에밀리가 아프다며 결근한 탓에 내가 라이언에게 보고를 하게 되었다. 라이언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웠지만 내 보고서는 그가 에밀리에게 지시했던 것과 다르다고 말을 했다. 나는 무뚝뚝하게 에밀리가 그의 지시를 내게 전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 말고도 평소에도 에밀리에게 받은 피드백이 없었으며 그녀가 거의 하는 일이 없다고 얘기를 했다. 나는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너무 놀라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내 입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데비와 에밀리가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뭐 하느라 일을 안 하는지까지 그래서 내 일이 얼마나 늘어났는지까지 고해바쳤다. 너 미쳤어?? 입 다물어!!! 나는 머릿속에서 악을 쓰고 있었음에도 한번 터진 입은 멈추지 않았다.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눈물이 차오르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라이언이 클리넥스를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You cannot teach people work ethic. Either they have it or they don’t. You cannot make them work." (사람에게 직업윤리를 가르칠 수는 없어. 타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억지로 시킬 수도 없고.)

나는 의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But it is not fair…" (그렇지만 이건 불공평하잖아요...) 유치원생 응석 부리듯 말하는 나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Then don’t work that hard." (그럼 그렇게 열심히 하지 마.)

라이언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엔 바늘처럼 날카로운 짜증이 숨어 있었다. 회사 최고 책임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니, 나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회사에서 일 시작하고 최악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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