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내편은 어디에
로건은 한 미팅룸에서 텔레컨퍼런스 중이었다. 내가 창문 유리창을 살짝 톡톡 치니까 자기 헤드셋을 가리키며 회의 중이라고 입술을 움직였다. 매주 월요일 이 시간에는 그가 맡은 지역구의 지난주 실적 보고 미팅이 있다. 하지만 아니, 이 와중에 무슨 놈의 실적 보고???
내가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면서 회의를 끝내라고 팬터마임을 하니까 그가 피식 웃는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더 열이 뻗친 나는 문고리를 거머쥐었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두들겼다.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닐이 입술에 손가락을 세우며 내 소매를 잡아끌고 옆 미팅룸으로 들어갔다.
닐은 로건처럼 Regional Vice President였다. 역시 로건처럼 우리 회사 경력 25년이 넘지만 석사 학위도 없고 성격 자체가 유유자적 물 흐르는 대로 사는 사람이라 더 이상 올라갈 생각은 안 하는 사람이었다. 둘 다 주로 현장을 다니면서 일을 했으므로 로건은 동부로, 닐은 서부로 돌아다니느라 자기 큐비클에 있을 때는 별로 없었지만, 한 달에 며칠이라도 오피스에 같이 있는 날에는 서로 무용담도 나누고 실무 상황도 얘기하면서 친하게 지냈었다. 둘 다 대학 갓 나와 이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제 나이 오십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이들 나이도 비슷하고 스포츠에 관심도 비슷해서 그야말로 좋은 동료이자 친구로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낸 거였다.
"So I just talked to Betty." (방금 베티랑 얘기했어.)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살폈다.
베티는 본사 CEO 수석 비서관이다. 그동안 CEO는 몇 번이 바뀌었어도 그녀는 몇십 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말은 그녀의 업무 수행 능력뿐 아니라 회사 정치 능력, 특히 회사의 기밀을 얼마나 철저히 함구하고 있는지 검증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그녀가 나일즈가 잘린 후 울먹이며 나와 닐에게 전화를 했다. 옆에서 과정을 지켜본 자기도 믿을 수가 없다고... 그래서 이번 로건 사태도 혹시나 그녀가 뭘 아는 게 있을지 닐은 전화를 해본 모양이었다. 평소 내게는 깐깐하기 그지없는 원장 수녀 같은 백인 할머니였기에 나는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Child"였을 때부터 베티가 보아온 닐은 좀 달랐나 보다.
"What did she say?" (뭐래?) 나는 같이 목소리를 낮추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It is hard to believe, but Logan told the board he didn't want to report to Ryan if he gets the job." (믿기 어렵겠지만, 로건이 보드에다 자기가 그 자리 맡으면 라이언 밑에는 못 있겠다고 했대.)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SVP of Financial Planning & Analytics가 Chief Financial Officer밑에 있지 않으면 누구 밑에 있겠다는 것인지? 나는 상황이 파악이 안 돼 눈만 꿈뻑꿈뻑 닐을 바라보았다.
"Is he saying he wants to be the CFO?" (그럼 CFO 자리를 달라고 했단 말이야?)
설마, 그게 최종 목표이긴 했겠지만 그걸 입 밖에 냈을 리가 하면서도 나는 확인차 물었다.
"No, more like telling them to fire Ryan in a hurry." (아니, 그냥 빨리 라이언 잘라달라고.)
닐은 눈알을 굴리며 머리를 저었다.
와우...
"That's an equally bad move! That's way beyond reckless and stupid!" (그건 마찬가지로 악수쟎아. 멍청하고 무모해도 정도가 있지!) 나는 닐의 코앞에서 볼륨을 한껏 낮춘 채 소리를 지르느라 목이 메었다.
보드 멤버 몇몇이 로건을 지지하면서 우리 계열사 CFO 자리를 없애고 다른 계열사와 합병을 검토 중이라는 얘기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회사 전략이라는 건 대외 발표가 날 때까지는 그 누구도 확신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뭘 믿고 그런 소리를 공공장소에서 터트린단 말인가? 게다가 그건 잡 인터뷰였다. 아무리 다 내정이 되어 있다고는 하나 외관상으로 아쉬운 쪽은 로건이어야 하지 회사가 아닌 것이다. 그런 시건방을 떰으로써 로건을 지지하던 보드 멤버는 그를 괘씸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만에 하나 라이언하고 친한 보드 멤버가 있었다면 그 인터뷰가 끝난 즉시 연락을 했을 것이다. 게임 오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미팅룸을 나왔다. 침울하게 창문 너머로 아직도 회의 중인 로건을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친 그가 소년처럼 반짝거리는 파란 눈으로 윙크를 했다. 이런 미친... 나는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어 반들반들 빛나는 그의 하얀 대머리를 돌돌 만 공책으로 냅다 두들겨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절대로 제정신일 수가 없는 상황인데 이렇게 태연하다니. 뭔가 백업 플랜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럴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창문에 매달려 그가 회의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What had happened???"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로건이 헤드셋을 벗기가 무섭게 닦달을 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제스처... 나는 너무 게을러서 말로 설명하기 싫으니까 네가 요령껏 유추해 봐. 그런데 나는 그런 걸 잘할 만큼 똑똑하지도 않은 데다 참을성마저 없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한숨을 쉬더니 베티가 전해준 말을 그대로 했다. 라이언을 상관으로 못 모시겠다고 했다고.
"What is your plan?" (대책은 뭐야?) 나는 안달을 하며 물었다.
로건이 잠깐 내 표정을 살폈다.
"You must have had a plan when you dropped that bomb in the interview." (그런 폭탄을 던졌을 때는 뭔가 대책이 있었을 거 아냐.) 내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실렸다.
30분 뒤면 내 새로운 상관인 리로이와 면담이 있다. 그전에 나도 내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로건의 계획을 알아야 나도 뭔가 그림이 보이지 않겠는가. 로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복잡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평소의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가며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I don't have one. I told them I didn't want to report to Ryan." (없어. 그냥 라이언 밑에서 일하는 건 싫다고 했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로건은 자기의 25년 경력을 두고 도박을 했다. 그리고 크다면 큰 실수를 한 것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바위같이 굳건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아직 나를 그의 계획의 일부로 넣지 않았다.
젠장. 나는 아무 무기를 갖추지 못한 채, 적장이 된 내 동료와 싸우러 전장에 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