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계산이 빗나갔다.

악몽의 시작

by 다소니

내 승진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케이티가 하던 일이 많지 않았기에 그 자리만 맡았으면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겠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나는 이제 나일즈의 후임이 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사실상 파이낸스 팀 전체를 책임지고 있었다. 룩의 자리도, 내 자리도 비어있었으므로 두 명의 애널리스트들을 고용해야 하건만 라이언은 계속해서 핑계를 댔다. 새 CEO가 오면, 조직 개편이 끝나면, 연말 결산이 마무리되면… 이유는 계속 바뀌었고 고용은 계속 미뤄졌다.


나는 결국 역량이 부족한 계약직 두 명을 데리고 매일 전쟁을 치렀다. 디렉터 이상급 에게만 주어지는 오피스를 차지하고 모니터 네 개에 랩탑 두 개를 연결해 가며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가며 일했다. 누군가 잡담이라도 하려고 문을 두드리면, 이어 피스를 끼고 회의 중인 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늘 독이 오른 방울뱀처럼,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 올랐다. 데비가 출산휴가를 가있었기에 핏불이 없어진 오피스에 코브라 등장이냐고 어드민들이 수군거렸다. 한국어로는 한마디도 못하는 욕을 영어로는 단어 사이사이마다 떡꼬치처럼 끼워야 말이 제대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아침에 제일 먼저 출근했고, 퇴근해서 아이들 저녁을 챙기고 재운 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 정도로 일했으면 내 회사를 서너개는 차리고도 남았으리라. 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건지 자아 성찰을 해야 할 텐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건 바로 옆 오피스의 로건이었다. 로건은 25년 차 베테랑이자 Regional Vice President였고, 나일즈의 후임으로 내정되어 있다는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일즈는 로건이 라이언과 공모해 자기가 잘리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미워했지만, 실상은 본사에서 일하던 로건과 나일즈는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안다고 해도,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자르고 너를 승진시키겠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사양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로건이 사양을 하던 안 하던 나일즈는 잘리게 되어있었으므로 나는 기왕이면 모르는 사람보다 경력 있고 학력 확실하고 부드러운 매너를 가진 로건이 내 상사가 되기를 바랐다. 로건 역시 나 못지않게 바빴으나 내가 하는 질문을 무시하지 않고 가르쳐주고 도와주고 세일즈나 필드에 모르는 인사들도 소개해주고 해서, 나는 그의 일이라면 우선순위를 두고 도왔다. 라이언의 변덕에 휘둘리면서도 우리 둘은 이 림보에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견뎌보자 하면서 나름 둘만의 허니문을 무언중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보드룸 직속 부하직원들이 모인 회의에서, 라이언이 리로이를 호명했다. 리로이는 예전 내 조언에 따라 10년 전 굿윌에서 샀다는 80년대에 만들어진 랄프 로렌 밤색 체크무늬 울 수트대신 나와 함께 산 몸에 잘 맞는 차콜색 브룩스 브라더스 수트를 입고 있었다. 그날 아침 출근길 평소와 달리 잘 차려입은 그를 보고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리로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곧 알게 된다고 했다. 지난달 그가 본사로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로건 대신 내 보스로 오게 될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격이 차고도 남을 로건을 제치고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에 10년 경력, 우리 회사에는 겨우 5년, 그리고 한때는 나에게 Deferred Revenue Amortization이 뭐냐고 물을 정도로 우리 부서일을 모르는 바로 그 리로이가, 무려 두 단계를 뛰어 Vice President of FP&A로 임명된 것이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라이언을 쳐다봤다. 아무도 축하 인사를 하지 않았고, 아니 못했고 라이언이 무슨 추가 설명을 하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늘 점심에 어느 레스토랑에 축하 점심을 예약해 놓았다며 그때 보자 하더니 보드룸에서 나갔다. 사람들은 그제야 어정쩡하게 축하한다는 말을 우물거렸고 나는 뒷문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다른 회의에 참석한답시고 지금 여기에 없는 로건을 찾아야 했다. 그는 미리 통고를 받았을 테지.


“Junsu! Wait!”
(준수! 잠깐만!)

리로이가 나를 불렀다. 나는 순간 보드룸 문도 못 열고 얼어붙었고,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환하게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Isn’t it great? Aren’t you happy that I’m your boss now?”
(대박이지? 내가 네 보스가 됐다는 게 기쁘지 않아?)

리로이는 그의 검은 얼굴에 흰 이가 반이 되록 활짝 웃었다.

“Yeah… I’m, I’m happy for you. I’m just… I’m still processing it.”
(응… 축하해. 그냥… 아직 정보 소화 중이야.)


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는 나와 같은 파이낸스 매니저다. 전체 라인을 관장하는 나와 달리 그는 한 지역만을 총괄했고 숫자만 보는 나와 달리 오퍼레이션까지 겸하고 있었다. 입사했을 때부터 우리는 서로를 좋아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 장닭같은 그는 일을 잘했고, 일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차가 없다는 점에서 나와 잘 통했다.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말을 돌려하지 않고 입에 필터가 없다는 치명적 단점까지 우리는 비슷했다. 그는 키가 크고 잘생겼고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을 늘 자랑하고 다녔다. 그는 여자들이면 누구든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남자들은 자기를 질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낸다는 거. 나는 열 살이나 어린 그가 하는 짓이 유치하고도 웃겨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다른 직원들은 달랐고 리로이는 HR이 Walking time bomb이라고 부를 만큼 Politically correct 한 미국 기업 문화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 짧은 근무 기간 중 아마 HR에 들어온 신고만 해도 아마 열손가락이 모자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인간을 시니어 임원자리에 임명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그를 동료로서 좋아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건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로건을 찾아야 한다. 대체 이 인간이 어디에 짱 박혀 있는 거지, 분명히 출근을 했을 텐데… 나는 내 오피스에 랩탑을 집어던지듯 내려놓고 로건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