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버틸 수 있을때까지 버텨보기

산 넘어 산

by 다소니

통보했던 대로, 나일즈가 떠났다.
나는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날이 되자 오피스 전체는 물론 본사 사람들까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나일즈의 마지막 날, 나는 그의 환송회가 점심시간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아예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는데, 마치 주문처럼 정말 하루 종일 토사곽란에 시달렸다. 덕분에 그다음 날, 2킬로그램이나 빠진 핼쑥한 얼굴로 출근해 일부러 빠진 게 아니라는 거짓말에 신빙성을 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옳았다.
나는 텅 빈 나일즈의 오피스를 보면서 가슴이 저려왔고,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의 오피스를 피해 멀리 돌아가야 할 정도로,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나 자신이 한심해 쓴웃음을 지었다.


나일즈의 퇴사야 예정된 일이었지만, 불과 한 달 뒤 CEO 빌의 은퇴는 정말 뜻밖이었다. 내가 그의 사생활을 경멸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엔지니어 출신 의사이자 천재적인 사업가였다. 2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종합병원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는 건 전적으로 모두 빌의 수완과 인맥 덕분이었기에 회사가 팔린 후에도 그는 5년 동안 CEO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바뀐 건지, 어느 날 갑자기, 60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플로리다로 은퇴를 선언했다.


케이티가 이걸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후 6개월 동안 그녀는 나를 들들 볶으며 자신의 답답함을 풀었다.
특히 나일즈의 빈자리를 사람들이 그녀를 건너뛰고 내게서 채우려 하면서, 그녀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급기야 "케이티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히스테리를 받아내는 데 진력이 났고, 나일즈도 없는 이 회사에 계속 있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나는 데비와 만나 케이티의 만행을 성토했고 그즈음 20킬로그램을 감량하고 아이라이너 색을 갈색으로 바꾼 데비의 연애 상담을 했다. 데비의 연애는 내 답답한 회사 생활만큼이나 험난했다. 그녀 말에 따르면, 여자가 서른다섯을 넘기면 결혼할 가치가 있는 남자들은 이미 다 결혼했고, 남은 건 "what's left"— 이혼했거나, 나이가 많거나, 능력이 없거나, 혹은 그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남자들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5살, 10살, 심지어 20살 어린 여자들만 본다고 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망할 자식들!!!
나는 데비의 분노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데비는 반복되는 남자들의 거절에 마음이 많이 다친 상태였다.

"Actually, I'm not even sure what I want is a man. I want a family for sure, and I'm not sure if I really need a man for that." (사실, 내가 원하는 게 남자인지도 잘 모르겠어. 가족은 확실히 갖고 싶지만, 그걸 위해 꼭 남자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어.)
데비는 샐러드를 포크로 쿡쿡 찌르며 낮게 말했다.

"Uh?" (응?)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I'm running out of time, and I don't want to wait for a Mr. Right." (시간이 없거든. 더 이상 '완벽한 남자' 기다리고 싶지도 않아.)
데비는 큰 숨을 몰아쉬었다.

"I've decided to use a sperm bank." (나 정자은행을 이용하기로 했어.)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I already saw a doctor, and thanks to you, my body is in the best shape it's been in a very long time. She said it's doable." (이미 의사도 만났어. 네 덕분에 몸 상태도 정말 좋아졌대. 가능하대.)

데비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파트너가 있어도, 아니, 마이크처럼 헌신적인 파트너가 있어도 힘든 일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자발적으로 싱글맘이 되겠다는 결정을 축하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I have to pick a donor. Would you go with me?" (정자 기증자 고르는 데 같이 가줄래?)
데비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Of course. I'll go with you." (물론이지. 같이 갈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 후 6개월, 먼저 룩이 뉴욕으로 떠났고, 케이티는 빌을 따라 플로리다로 갔다. 빌의 영향력이 줄어들어서인지 파이낸스도 아닌 오퍼레이션 슈퍼바이저로, 커리어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강등인데도 그녀는 이혼하겠다고 거짓말하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빌을 따라 플로리다로 간 것이다. 그녀에게 염증을 내고 있던 나로서는 환영할 만한 뉴스였지만, 그래도 케이티가 대체 뭐가 모자라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Maybe she is really in love with him.” (어쩌면 정말 사랑하는 걸지도.)
데비는 케이티의 텅 빈 큐비클을 보며 말했다.

“Really? That old man?” (진짜? 저 노인네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He wasn’t that bad 15 years ago, when he was just 45. Katie was 27. Fifteen years is a long time to have a fling. I initially thought she was after a promotion, but considering how she doesn’t care about work, I don’t think that’s it. You never know the inside story.”
(그가 45살이던 15년 전엔 그렇게 나쁘진 않았지. 케이티는 27이었고. 15년이면 그냥 불장난으로 보기엔 긴 시간이야. 나도 처음엔 승진이 목적인 줄 알았는데, 일에 전혀 관심 없는 거 보면 아닌 것 같아. 속사정은 아무도 모르지.)

15년. 결혼해서 아이 둘셋 낳고 이혼까지도 할 수 있는 세월이었다. 데비 말이 맞았다.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 케이티는 끝까지 빌과는 아무 상관없는 척, 오퍼레이션에 관심이 많았다며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를 강조하면서,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고 떠났다.


케이티의 자리가 비자 당연히 사람들은 내가 그 자리를 채우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라이언은 내게 그 자리를 포스팅할 거라며,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를 쓰라고 했다. 나는 무반응으로 그 모욕을 받아넘기며, 그녀가 하던 일을 사무적으로 정리해 적었다. 임시로 내가 그녀의 일을 맡게 되었고, 서버에 있던 그녀의 파일을 열어보니, 그녀가 얼마나 일을 안 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가 안 해서 내가 대신해왔던 일들까지 포함해 기술서를 수정해 HR에 넘겼다.


3주 동안 아무 반응이 없던 라이언은, 지원자들이 시원치 않았는지 나를 불러 직접 지원하라고 했다. 사실상 나를 승진시키려는 걸로 내정돼 있었지만, 그는 나에게 무려 일곱 명의 임원들과 인터뷰를 시켰다. 대부분은 나와 이미 함께 일한 사람들이라 수다로 시간을 채웠지만, 둘은 나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며 HR이 준비한 질문지를 읽고 내 대답을 일일이 적으며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내 승진은 그저 HR에서 날아온 이메일 한 통, 오퍼 레터로 통보되었고, 그걸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이 이메일로 축하를 보내준 게 전부였다. 보통은 분기별 어닝 콜 이후 열리는 타운홀 미팅에서 공식 발표가 있는 게 관례였지만, 그날따라 일정이 바빴다는 핑계로 건너뛰었다. 그래도 라이언이 꼭 하려면 일분도 안 걸릴걸 못할 건 아니었지만 그가 내 승진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증명된 셈이어서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며 분해했다.


게다가 룩의 후임도 계속 뽑지 않아서, 나는 그의 업무까지 떠안고 있어서 나는 우리 부서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라이언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참다못해 문제를 제기하자 라이언은 마지못해, 큰 인심이나 쓰는 듯 일단 계약직을 뽑아보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경력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 계약직원들까지 면접을 봐야 하는 임무까지 떠맡게 되었다.


그 와중에 데비는 덴마크 정자은행에서 나와 함께 고른 기증자를 통해 임신에 단번에 성공했다. 그동안의 체중조절이 허무하게 데비는 첫 달부터 살이 급격히 찌기 시작했고, 일에 대한 집중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입덧은 없었지만 그녀는 늘 행복해했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그녀를 '핏불'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업무 실수가 잦아졌고, 점점 많은 일들이 내 몫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실수를 조용히 커버하면서도, 라이언이 하루빨리 나일즈의 후임을 뽑아 내 짐을 덜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일즈가 떠난 지 거의 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전 20화EP.19 질투라는 이름의 탱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