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질투라는 이름의 탱크

내가 원하는걸 나도 모르지만 그래도...

by 다소니

사건의 발단은 필터 없는 내 입이었다. 처음으로 CEO 빌이 참석하는 파이낸스 미팅에 참가해서, 분수도 모르고 그의 질문에 대답을 했던 거다. 그가 SG&A 비율을 줄일 방법이 없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냥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Maybe we can reclassify engineering training costs as part of COGS if it’s just about the ratio." (비율이 문제라면 엔지니어 교육비를 생산원가로 넣는 게 어떨까요?)

회계적으로 무리수를 두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한 말이었다. 그러자 CFO 이면서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라이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That could be a good idea. Let’s look into it." (좋은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네. 검토해 보자.)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칭찬만으로도 감지덕지해서 나는 기쁘기까지 했다. 다만 나일즈의 얼굴이 굳어 있었고, 케이티는 얼굴까지 붉히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을 때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라이언이 다른 발표로 분위기를 바꾸는 바람에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다.


"Well, I have bittersweet news. Eric, the corporate CFO, called me personally and apologized for stealing one of my star players." (기쁘고도 슬픈 소식이 있어. 본사의 CFO 에릭이 우리 스타플레이어 중 한 명을 빼앗아서 미안하다고 직접 연락을 해왔어.)

라이언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룩을 바라봤고, 룩은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Luke is getting promoted to a Senior Financial Analyst in the FP&A team at HQ in New York City. Congrats! I heard Niles made that happen. That’s true leadership." (룩은 뉴욕에 있는 본사 FP&A 팀의 시니어 파이낸셜 애널리스트로 승진했어. 축하한다! 나일즈가 다 주선한 걸로 들었어. 이게 진짜 리더십이지.)

라이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날이 선 게 느껴졌다.

"I merely introduced them to each other. It was all Luke." (난 그냥 단순히 소개만 했어. 룩이 다 한 거야.)

나일즈는 라이언의 영혼 없는 칭찬에 손을 저으며 웃었다. 다들 축하한다고 한 마디씩 했고 나도 축하한다고 웅얼거렸지만 솔직히 가슴이 싸했다. 본사는 우리가 속한 자회사보다 무려 20배는 크다. 그 팀의 재정부서라면 다루는 숫자뒤에 붙는 동그라미 개수가 달라진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이런 경험은 엄청난 경력이 된다. 게다가 뉴욕 본사라면 나와 똑같은 직급이라도 연봉이 50~70% 더 많다.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왜 나일즈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왜 그걸 주니어 애널리스트인 룩에게 넘긴 걸까?


그걸 곱씹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케이티가 나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온 것도 몰랐다. 손을 씻고 있는데 그녀가 얘기 좀 하자고 불러 세웠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싱크대에서 돌아섰다.

"What you did in that meeting was highly inappropriate. There were CFO, VP of Finance, and your manager. You should’ve let us answer the CEO’s question!" (네가 회의에서 한 행동은 정말 부적절했어. CFO, 부사장, 그리고 네 상사도 있었는데 왜 네가 대답을 해?)

케이티는 화가 잔뜩 나서 붉어진 얼굴로 손을 허리에 얹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당황해서 말이 안 나왔다. 빅 4에서 일할 때 주니어인 나와, 시니어, 매니저, 시니어 매니저 그리고 파트너까지 같이 여러 번 미팅을 했었지만 시니어가 상관들이 있다고 해서 파트너에게 할 말을 못 하는 거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니어인 나야 무식하고 무지해서 대화를 따라가기도 힘들었으므로 할 말이 없어서 못했지 할 말이 있는데도 참은 건 아니었다. 무슨 미국회사에서 계급을 따지지? 나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물었다.

"Are you saying my suggestion should’ve been vetted first, or that I shouldn’t have opened my mouth at all?" (내 제안이 사전에 검토됐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단 뜻이야?)

케이티는 잠깐 생각하더니 단호하게 내뱉었다.

"Both!" (둘 다!)

"…Got it." (알겠어.)

나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돌아서서 페이퍼 타월을 집어 아직도 젖어있는 내 손을 닦았다.

"You know I’m saying this for you, right?" (이거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 거 알지?)

케이티는 침착한 내 반응이 더 성질을 돋운 듯 분에 떨며 말했다.

"Right." (그래.)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을 나왔다. 내가 뭔 잘못을 했든 하이스쿨도 아니고 화장실에서 감정에 복받쳐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행동이 나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당연히 손톱만큼도 믿기지 않았다.


나일즈의 오피스로 가서 문가에 서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나일즈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가락을 까닥이며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그의 오피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I’m sorry for what I did in the meeting. Katie just told me. I’ve got an earful." (회의에서 있었던 일, 미안해. 케이티한테 한소리 들었어.)

나는 우울한 얼굴로 내키지 않는 사과를 했다.

"Yeah, she’s not wrong." (그래, 그녀 말이 틀린 건 아니야.)

나일즈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위로를 기대했는데, 케이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도 전에 그녀의 편을 드는 걸 보고 기분이 상해버렸다.

"…Also, I was wondering why you didn’t tell me about the New York opportunity." (그런데 왜 뉴욕 포지션 얘기를 나한테는 안 한 거야?)

"Why, were you interested?" (왜, 관심 있었어?)

"No, I didn’t even know they posted that position." (아니, 공고가 난 줄도 몰랐어.)

"So you weren’t looking, right?" (그럼 찾고 있던 것도 아니잖아?)

"…Right. But you knew and helped Luke. Why not me?" (맞아. 근데 넌 알았고 룩은 도와줬잖아. 난 왜 아니야?)

나일즈는 한숨을 쉬었다.

"Listen, Luke was actively looking. His girlfriend is moving to New York for grad school. He’s a young guy who can just pick up and leave, make a life decisions on a whim. You have a husband and two small children. Would you have gone if they offered that job to you?" (룩은 열심히 찾고 있었어. 여자친구가 뉴욕에서 대학원 다닐 예정이니까. 넌 남편도 있고 어린아이들도 있잖아. 너한테 오퍼가 왔으면 갈 거였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일단 마이크가 새 직장을 잡아야 할 테고 뉴욕에 아이 둘을 기를 수 있는 집을 사려면 우리 형편으로는 택도 없다. 현실적으로 나와 마이크 정도의 월급으로 지금의 생활 수준을 유지한다는 건 힘들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따져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억울했다. 나는 별 의의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일즈의 오피스를 나왔다.


점심시간에 데비와 운동을 해야 하지만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오늘은 건너뛰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I hear what happened from Katie." (케이티한테 들었어.)

"Yeah... She thought I overstepped. But yelling at me in the bathroom? That’s highly unprofessiona!." (내가 선을 넘었다고 했어. 근데 화장실에서 소리치는 게 말이 돼?)

나는 뒤늦게 분통을 터트렸다.

"Is that what she said? Overstepping bosses?" (그렇게 말했어? 상사를 넘봤다고?)

데비는 쿡쿡 웃었다.

"What else?" (그럼 뭐?)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She was furious because she thought you were flirting with Bill." (빌한테 수작을 걸려고 했다고 화를 냈던데.)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나는 빌의 나이 들어 처진 얼굴과 튀어나온 배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케이티는 비위도 좋지...

"Ewww." (웩.)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간신히 한마디 뱉었다.

"Don’t worry. She’s just jealous." (걱정 마. 그냥 질투야.)

"Jealous of what?" (뭘 질투해?)

"Well, we’re all about the same age, but you’re the only one who’s happily married with kids. Heck, I’m jealous." (우린 또래인데, 너만 결혼도 잘하고 애들도 있고. 나도 부러워.)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Remember when you left like a crazy person when Sandy Hook happened?" (샌디 훅 사건 났을 때 너 미친 듯이 뛰쳐나간 거 기억해?)

데비가 말을 이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아침 내내 미팅에 있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까서 내 책상 위에 앉아 뉴스를 틀었는데 브레이킹 뉴스로 스쿨 매스 슈팅이 보도되고 있었다. 코네티컷에 있는 초등학교에 어떤 미친놈이 들어가 교직원 6명과 6,7살짜리 1학년들 수십 명을 쏴 죽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먹던 도시락을 덮지도 못하고 주차장으로 달려 나가 덜덜 떨면서 집으로 차를 몰았다. 코네티컷에서 차로 16시간이 떨어진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이 사건과 아무 상관없었지만 나는 내 아이들, 특히 같은 1학년이었던 우리 막내를 껴안아줘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충격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Katie came to me after that and fumed how crazy you were. But I thought you were lucky to have children who you love that much." (케이티는 너 미쳤다고 했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자식들이 있다니 너 참 복 받았다고 생각했어.)

데비는 미소를 띠며 쓸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I wish I had that." (나도 자식들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가슴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내가 룩의 젊음과 기회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데비는 내 발목을 잡는 남편과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가만히 데비를 안았다. 그녀도 내 등을 두드렸다. 개떡 같았던 기분이 그나마 조금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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