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말을 못 해요
또 안 맞는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룩의 구레나룻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회사 구조상 케이티가 그의 보스이지만, 룩의 리포트를 기반으로 내가 최종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지라 언젠가부터 룩은 케이티 단계를 건너뛰고 직접 나에게 리뷰를 받기 시작했다. 원칙대로라면 케이티가 먼저 검토한 뒤 나에게 넘겨야 하지만, 그녀는 파일을 열어보지도 않고 나에게 그대로 포워드 하고, 내가 고칠 점을 정리해 다시 보내면 그 이메일을 그대로 룩에게 포워드를 했다. 룩과 나는 그런 시간낭비 할거 없다는데 동의하고 케이티를 건너뛰고 직접 같이 일을 시작했고 케이티나 나일즈도 아무런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기에 점점 그런 시간들이 많아졌다.
룩은 대학을 갓 졸업한 지 3년 남짓 된 주니어 애널리스트다. 말수도 적고 수줍음이 많아서인지 늘 무표정이다. 190센티가 훌쩍 넘는 키에 금발 머리, 안경을 벗으면 깜짝 놀랄 만큼 미남이지만 평소엔 얼굴 절반을 가리는 알이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 매력이 가려진다. 그 안경이 나일즈와 비슷해서, 나는 가끔 둘이 세트로 맞춘 거냐며 놀리기도 했다.
엑셀 화면을 포뮬러 뷰로 전환하자, 어디서 실수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걸 손대려면 줄줄이 이어진 다른 포뮬러도 수정해야 했다. 룩은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연달아 실수를 했고, 나는 일어나 허리를 쭉 폈다.
"That's okay. You must be having performance anxiety because I'm breathing down your neck. I'll leave you alone so you can finish it." (괜찮아. 내가 너무 바짝 붙어 있어서 긴장했나 본데. 혼자 하게 자리를 비켜줄게.)
순간 근처 큐비클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룩의 얼굴은 새빨개지더니,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방금 뭔 말을 했는지 머릿속에서 다시 되짚어봤지만, 뭐가 문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애를 야단치는 걸로 들렸나? 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한 시간쯤 지나 룩은 수정된 리포트를 이메일로 다시 보내왔다. 나는 꼼꼼히 리뷰한 후 승인 사인을 보내주었다. 오후 3시에 있을 팀 미팅까지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늘 발표자는 룩이었고, 그는 회사 전체의 자본 계획을 맡고 있다. 다만 우리 회사 최대 고객인 머시 종합병원 관련 자료는 리로이가 따로 준비했다.
컨퍼런스룸에 들어가 보니 룩과 리로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발표 분량은 룩이 훨씬 많을 텐데, 리로이가 가져온 자료들이 배는 더 많다.
"Wow, Leroy, how come your package is bigger than Luke's?" (와, 리로이, 왜 너 패키지가 룩보다 더 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리로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룩과 하이파이브를 했고, 회의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웃기 시작했다.
"What's so funny? What did I say?" (뭐가 웃겨? 내가 뭐라고 했는데?)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며 리로이는 킥킥 웃었다.
"Nothing. You're on a roll today, by the way."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너 왜 이렇게 웃기냐, 진짜.)
"I don't understand. Explain yourself so I can laugh with you."(뭔 말이야. 설명 좀 해봐. 나도 같이 웃게.)
"Don't explain that here." (여기선 설명하지 마.) 나일즈가 웃음 참으며 끼어들었다.
"Fine. I'll ask my husband at home." (좋아. 집에 가서 남편한테 물어보면 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포기하고 내 랩탑을 열었다.
미팅이 끝나고 컨퍼런스룸을 나서는데, 동부지역 파이낸스 디렉터 닐이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Don't mind people laughing at your expense. It's all good. I've never had this much fun in the office in my 25-year career here." (사람들이 네 말에 웃었다고 신경 쓰지 마. 난 회사 생활 25년 동안 이렇게 재밌었던 적 없었어.)
"So what was so funny?" (그래서, 뭐가 그렇게 웃겼는데?) 나는 되물었다.
"Oh, no, I'm not explaining that to you. Ask your husband." (내가 설명할 순 없고 남편한테 물어봐.) 닐은 윙크를 하고 내게 멀어져 갔다.
그날 밤, 나는 마이크에게 사건 전말을 털어놓았고, 마이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내가 룩에게 한 말들이 성적 능력을 암시하게 들렸을 것이고 "패키지" 역시 남자들의 성기를 상징하는 속어라고 설명을 해줬다. HR에 보고라도 들어가는 거 아닐까 덜컥 겁이 났지만, 마이크는 미국 서민들은, 특히 남자들은 뭔 말을 해도 성적 농담으로 받는 게 지극히 흔한 일이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줬다.
그래도 나는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다음 날 아침, 룩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그의 큐비클로 갔다.
"Hey, Luke, about what I said yesterday..." (어제 내가 한 말 말인데...)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그다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Oh, that's okay. Don't worry about it. It was funny." (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재미있었어.)
룩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안경을 벗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I have a question for you though..." (근데 너한테 궁금한 게 하나 있어.)
"What is it?" (뭔데?)
"How did you know Mike is The One?" (어떻게 마이크가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룩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게 나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What do you mean?" (무슨 뜻이야?)
"I have a girlfriend I met in Romania while backpacking Europe. We were in a long-distance relationship for two years, and she’s moving here for grad school this fall. I know she’s expecting me to propose… but how do I know she’s The One? How do I know she’s not just using me to get a green card?" (유럽 여행 중 루마니아에서 만난 여자친구가 있거든. 2년 동안 장거리 연애 중인데, 올가을에 유학 와서 대학원에 다닐 거야. 걔가 내가 청혼해 주길 기대하는 걸 아는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혹시 나를 그냥 영주권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건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룩이 이렇게 진지하게, 또 이렇게 길게 말한 건 처음 봤다. 게다가 개인적인 연애 이야기를 털어놓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Well… I didn’t know Mike was The One either. I still don’t. Back then, the only thing I knew was that I wanted to be with him, and marriage was the only way. If I were American, or if Mike were Korean, maybe we wouldn’t have rushed. But at that time, it was the best option."
(글쎄… 나도 마이크가 내 사람인지 몰랐어. 지금도 모르겠어. 다만 그때는 그냥 그 사람이랑 있고 싶었고, 결혼이 유일한 방법이었지. 내가 미국인이거나 마이크가 한국인이었으면 그렇게 급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나는 10여 년 전 우리가 룩 나이 또래였을 때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But I know for sure Mike didn’t think I was using him for a green card. If you’re not sure about her motives, it doesn’t matter what she expects. I wouldn’t do it until I’m sure."
(하지만 분명한 건, 마이크는 내가 영주권 때문에 결혼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야. 네가 확신이 없다면, 그녀가 뭘 기대하든 지금은 하지 않는 게 맞아.)
룩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하게 면도된 그의 파릇한 앳된 얼굴에,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새삼 그의 젊음이 부러웠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내 표정을 들키기 전에 그의 큐비클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