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나의 속도를 이해하는 시간
저는 늘 느린 사람이었습니다.
그건 단순한 성향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고 배우는 방식과 깊이 연결된,
아주 현실적인 ‘느림’이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남들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친구들이 한 번만 봐도 외울 내용을
저는 여러 번 반복해야 겨우 머릿속에 들어왔고,
그마저도 금방 흩어져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방학이면
친구들은 여행을 가고 쉬는 동안
저는 더 일찍 공부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남들이 시험 기간에 들어갈 때
저는 이미 두어 바퀴를 돌려야
겨우 비슷한 속도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요.
실습도 그랬습니다.
업무는 빠르게 흘러가고,
시간 조차 없이 일이 이어지고,
정리할 틈도 없이 다음 일이 연결되며
금세 놓치고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마음 한쪽은 서늘하게 내려앉았습니다.
“왜 이렇게 기억이 잡히지 않을까.”
“왜 나는 남들과 같은 속도로 배우지 못할까.”
“왜 나 때문에 자꾸 번거롭게 해야 할까.”
그 죄책감 때문에
더 독하게, 더 오래, 더 일찍 시작하며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써왔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늘 서둘러 뛰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며
“참 성실하다”,
“부지런하다”,
“꾸준하다”라고 칭찬했지만
실은 저는
느리고 자꾸 잊어버리는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더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설명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형태가 흐려지고 순서가 어지러워지는 순간들이었어요.
그 순간마다 저는
제 부족함만 크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느림과 약한 기억력이
모두 단점만은 아니라는 걸
천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느린 만큼
한 번 익힌 것은 오래 기억에 남고,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더 깊이 있고 단단하게 몸에 배었으며,
작업 기억력은 약하지만
대신 상황 전체의 결을 이해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느림은
제가 사람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마음에 오래 머물게 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부분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메모를 자주 하고,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정보를 단계별로 나누어 기억하려 노력합니다.
빠르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제 속도로, 제 방식으로
조금씩 보완해 나가는 중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왜 나는 이럴까”라고 자책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는 나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인정해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아직도 가끔 헤매고,
혼란스럽고,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순간에 주저앉기보다는
조금 흔들리더라도
이내 차분하게 방향을 다시 잡으려 합니다.
불안한 때도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천천히 정리하고,
어지러우면 한 단계씩 나누어 생각하며,
지금의 나에게 맞는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