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4. 나를 규정하다 8
나는 '항상 수혜자'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는 지난 주 글 '나는 선택되었다'에서 서술한 바 있다.
한마디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나는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라 '선택되어지는' 객체라는 의미다.
오늘의 관점 역시 이와 결이 같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데에는
'모든 것은 (비물질이든 물질이든) 생명을 지니며 모든 것은 나와 연계된 개념일 뿐 나의 것은 없다'라는 인식이 나의 저변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나
나의 일
나의 미래(꿈)
이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리도 배우려, 성장하려는 이유는 나의 욕구때문이다.
욕구란 추구하는 것, 즉, '어떤 내가 되고 싶은지',
그러한 내가 되는 길을 가려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3가지.
나, 나의 일, 나의 미래가 아주 밀접하게 교류해야 한다.
지금까지 반백년의 기억을 더듬으면 나는 이 일을 하려 했으나 저 일을 하고 있고
나는 여기로 가려 했으나 저기로 가고 있다.
대부분이 나의 예상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고
'느닷없이', '예고없이' 나에게로 진입한 어떤 사태가 나를 그 때 그 자리에 세워놓은 듯하다.
과연 내가 무(비)계획적이거나 엉뚱한 생각으로 살아와서일까?
천만에!
결코 아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어떤 '이끄는 힘'이 애초의 나보다 더 나은 지금의 나로 만들어냈다.
정신적인 창조란 육체에서 비롯되며
본질적으로는 육체적인 창조와 동일하고 (중략)
창조자로서 생산하고 무엇을 만든다는 생각은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영원하고도 거대한 확증과 현실감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즐거움은 그것이 수백만의 생산과 잉태때부터 얻어진 추억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중략)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우연성에도 법칙이 있기 마련이지요(주1).
내가 계획하거나 생각해서 이뤄진 것보다 지금이 더 낫다는 말인데...
만약 계획과 생각과 전략과 기타등등을 '이성적'이라는 이유들로 고수했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서서히 어떤 결과들을 얻으며 나는 목적한 방향으로 걷되 계획하지 않고 이끌리며 일을 해왔던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 내 인생에서 습득하여 체화된 상태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경험이
새벽독서를 통해
영성적으로, 학문적으로, 수많은 성공자들의 주장으로 뒷받침되어
이제는 확고한 관점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떤 것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필요한 것을 얻을 것이다.
마무리되고, 이루어지고, 채워진다는 느낌이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주2).
데이빗호킨스가 알려준 이 느낌, 이 원리가 내 안에 자리잡아감을 느낀다. 실제 내가 하려 하지 않을수록 나는 마무리되고, 이루어지고, 채워지는 것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런 일은 소소하게 자주 일어난다. 거기서 그것을 사려 했으니 거기까지 가는 길에 저것이 눈에 띄기도 하고 사려한 그것이 팔려서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다 된 계약이 엎어지기도 하고 다 만들어놓은 무언가가 몹쓸 것으로 전락하기도 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거창한 무언가가 되어 있기도 한다.
모든 것 -앞서 말했지만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은 각자가 가는 길이, 자기 인연이 따로 있다.
많은 이에게 질문해봤다.
'과연 자기 계획대로 된 것이 얼마나 있는가?'
다들 나와 비슷하게 경험했다고 한다.
별로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고.
계획대로였다면 지금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창업하는 자들의 90%이상이 거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과연 그들이 설계를 잘못해서, 계획이 서툴러서, 아이디어가 형편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천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창업을 하거나 미래의 꿈을 이루려는 것은 현재 없는 것이다.
기발한, 독특한, 특별한, 창의적인, 앞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없다.
그런데 현재의 시각으로 현재의 능력으로, 현재 머리속 이성으로, 현재의 이론으로 그것을 계획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여기에는 분명
이성을 너머선 무언가,
능력을 너머선 무언가,
계획에 혼을 넣어줄 어떤 힘이 존재해야 한다.
그들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빠뜨렸던 것이다.
어쩌면 너무 자신을 과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감은 좋으나, 결여된지 모르는 자신감은 낭패를 더 빨리 끌어당긴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은 논리적이지 않아.라고 할 지 모르지만
이는 더 큰 우주의 대법(大法),
오히려 인과의 가장 근간을 무시하는 처사다.
지금 이 말이 우습고 말도 안되는 논리로 여겨진다면, '당신은 기적과 운이 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어떤 순간에 두 손 모아 기도하지 않을까?
철학자 아미엘(주3)은 날카로운 비평에 시달렸다.
너무 형이상학적이기만 해서 형이상학자라고 불리지 못한, 한마디로 형이상학은 형이하학이 현실에서 받쳐줄 때 진짜 형이상학이 된다.
지금같은 경제위기에 인문학과 철학으로 인간본성을 일깨우자는 목소리는
현실을 살지 말고 꿈이나 꾸자고 잔뜩 바람만 불어넣는 현상이 아니다.
보다 초월된 의식으로 현실을 더 큰 눈으로 바라보고 제대로 현실을 걸음하자는 간절한 외침이다.
'내가 하려고 해서' 거창한 아이디어가 쓰레기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면 여기엔 기획과 계획과 능력말고 더 큰 무언가를 빠뜨린 것은 아닌지 고려해야만 한다.
니체 역시 정신의 3단계에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맹한 사자가
'나는 원한다. 나는 기꺼이 한다.'라고 하자
커다란 용은
'그대는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그것은 사자라도 감히 할 수 없다(주4)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반드시 상반된 이면을 품고 있다.
그래야 '전체', '일체성'이 보장된다.
나는 햇빛이 비치지 않더라도 그림자를 품고 산다.
선은 악이 존재할 때 선인 것이며
빛은 어둠이 존재하기에 빛인 것이다.
수직과 수평, 앞과 뒤, 위와 아래, 넓이와 깊이, 유한과 무한, 전체와 부분, 생성과 소멸, 나와 나아닌 모든 것, 물질과 비물질, 삶과 죽음. 현상과 본질, 이상과 현실...
'나'라는 존재도 영혼의 소리를 담은 내면으로 현실에 발을 붙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논리와 비논리
합리와 비합리
이성과 감각이 균형을 이뤄야만 전체가 되어 일이 결과를 낸다.
그래서,
그렇게 하니,
'나'는 내가 조절,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개체인 '나의 현실적 행동'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나의 대상, 즉 미래, 꿈, 일 등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나를 필요로 하겠지. 로 결론이 나버렸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미래'라는 새로운 창조에 어울리는 내가 되어야지.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그것'에 자격있는 내가 되어야지.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적합한 내가 되어야지. 하면서
일과 꿈을 나에게서 떼어놓았던 것이다.
딱 달라붙어서 나의 일과 나의 꿈이 가는 길을 훼방놓던 내가 그들을 놓아주어 그들의 속도로, 그들이 가는 길을 가게 하고 나는 그것들에게 어울리는 내가 되려고 가장 바닥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즉, 나의 미래는 내가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나를 통해 세상에 창조될 무언가' 라는 관점으로 나는 그것들을 더 격상시켰고 그것을 바라보는, 따르려는 낮은 위치로 나를 이동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고
내가 원하는 미래의 꿈 역시 그것이 가는 길이 있다.
그런데 과연 '내가 이루고자 하는' 그것을 온 우주에서 나만이 원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나와 비슷한 꿈을 품은 이는 많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자격을 갖추고 내 꿈이, 꿈을 위한 일이 나를 선택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연마하여 단련시켜 적합한 나로 만들어가는 것만이 내가 현실에서 해야 할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것이라면 현재의 내 능력만큼만 나는 최선을 다하면 되니 말이다.
나의 꿈을 내가 현실로 만든다?
아니다.
나의 꿈이 내가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그 시점에 현실이 되는 것이다.
나의 미래를 내가 만든다?
아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미래가 나에게 요구한 계산이 잘 들어맞을 때 내가 그 주인공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나의 일을 내가 행하는 것이다?
아니다.
그 일이 가는 길에 내 쓰임이 용이하다 판단되면 나를 데려다 쓸 것이기에 나는 나를 연마하고 있으면 된다.
노예로서 종속되었을 때 내 꿈과 일의 주인이 되는, 기가막힌 모순이 내 인생에 펼쳐지는 것이다.
타인의 노예가 아니라 '미래의 나'의 노예가 되는 일상이 진정 나의 자아가 원하는 삶이다.
무한한, 잠재된, 위대한 자아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나도록 현실의 내가 문을 활짝 열어주니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일은 일 자체로 결과로 가는 길이 있고
꿈은 꿈 자체로 현실로 가는 길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간택되는 존재다.
그 길에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나는 그 옆을 지키는 존재다.
어떻게든 바둥바둥 그것들에게 내가 선택되어질 수 있도록 나를 연마하는 존재다.
그러면
일은 나를 필요로 할 것이며
꿈은 나를 선택해 주인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노예이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섣부른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이 가는 길에 꼭 쓰임있는 인간이고 싶다.
나는 그들이 탐내는 내가 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이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나 아니면 안된다고,
그래서 무조건 나여야 한다고,
그러니 나를 데려가야 한다고,
그렇게 노예에서 꿈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장자크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주5)'에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한 것은 결국, '너는 네가 행하고 받는 것에 대해 불평등하지 않고 공평하다 여기며 잘 산다고 생각하니?'라고 우리에게 묻는 것이라 여긴다.
이에 '그렇습니다!'라고 감히 대답할 수 있는 나로 나를 만드는 것. 욕심부리지도 말고 억울하지도 않게 그저 나를 '내가 원하는 일'. '내가 원하는 미래'에 걸맞는 나로 나를 키워내는 것, 그러니 나는 미래를 살지 않고 현실을 살면 그뿐이다.
나는
'나 외의 모든 것'이 나를 선택해주길 바라며
미래가 지금의 현실을 이끌어주길 바라며
영혼이 실재인 나를 깨워주길 바라며
꿈이 현실로 발현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 나는 '꿈과 꿈으로 날 데려갈 일'이 가는 길에 적합한 나로서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
내가 꿈을 이루는 가장 지름길이라는 관점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주1>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꿈꾸는 아이들
주2> 데이빗호킨스, 놓아버림, 판미동
주3> 아미엘, 아미엘일기, 범우사
주4>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주5> 장자크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 책세상
[지담연재]
월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화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수 5:00a.m. [지담단상-깊게 보니 보이고 오래 보니 알게 된 것]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