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독서 7년을 넘기며 큰 선물이 있다면 나를, 현상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현실을 살지만 현실의 이유를 들여다볼 눈이 생겼고 미래를 살아보지 않았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7년의 새벽독서를 통해 얻은 15가지 삶의 관점을 하나씩 풀어본다.
오늘 7번째!
나는 길이다.
나
나의 일
나의 꿈
나, 일, 꿈은 아주 밀접하게 교류해야 한다.
되고 싶은 나, 꿈.
꿈의 실천, 일.
일의 행위자, 나.
반백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며 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저 일을 하려 했으나 이 일을 하고 있고
나는 저리로 가려 했으나 이리로 가고 있다.
대부분이 예상도, 계획도 비껴갔다.
'느닷없이', '예고없이' 진입한 어떤 사태가
나를 그 때 그 자리로, 지금은 이 자리로 이끌어 세워 놓았다.
그래서 나는,
내 계획과 판단을 너머선 더 큰 법칙,
그러니까, 어떤 '힘'이 날 이끌어왔다는 결론에 닿았다.
게다가,
지금의 삶이 넘치는 감사뿐이니
내 계획과 판단보다
어떤 '힘'이 '나'를 '꿈'에 가깝도록 '일'을 부여한다는 결론에도 닿아있다,
정신적인 창조란 육체에서 비롯되며
본질적으로는 육체적인 창조와 동일하고 (중략)
창조자로서 생산하고 무엇을 만든다는 생각은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영원하고도 거대한 확증과 현실감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즐거움은 그것이 수백만의 생산과 잉태때부터 얻어진 추억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중략)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우연성에도 법칙이 있기 마련이지요(주1).
창조자.
꿈을 창조하는 창조자로서의 나.
거대한 확증과 현실의 결합.
그리고, 우연성.
만약 내가 계획과 생각과 전략을 '이성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집부려 고수했다면
나는 지금처럼 살지 못했을 것이다.
목적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 지금,
나는 '하려고 애쓴 일'보다 '이끌려 온 일'이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애써 고민하여 밀어붙인 결과보다 자연스럽게 따른 길이
오히려 더 나를 목적지에 가깝게, 그리고 빠르게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경험이
새벽독서를 통해
영성적으로, 학문적으로, 수많은 성공자들의 주장으로 뒷받침되어
이제는 확고한 관점이 되어 버렸다.
어떤 것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필요한 것을 얻을 것이다.
마무리되고, 이루어지고, 채워진다는 느낌이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주2).
데이빗호킨스의 말이 내 삶에 자리잡아감을 느낀다.
'내가 애써 하려 들지 않을수록'
일은 마무리되고, 이루어지고, 채워졌다.
많은 이에게 질문해봤다.
'과연 자기 계획대로 된 것이 얼마나 있는가?'
별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계획대로였다면 지금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창업하는 자들의 90%이상이 거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과연 그들이 설계를 잘못해서, 계획이 서툴러서, 아이디어가 형편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나는 이렇게 본다.
내가 하려 하지 않고
나는 그저 꿈과 일의 통로이자 길이면 된다고.
생각해보라.
창업, 즉 기발한, 독특한, 특별한, 창의적인, 앞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에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시각과 능력, 이성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 아닐까?
여기에는 분명
이성을 너머선 무언가,
능력을 너머선 무언가,
계획에 혼을 넣어줄 어떤 힘이 존재해야 한다.
그들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빠뜨렸던 것이다.
어쩌면 너무 자신을 과신한 것일 수도 있다.
자신감은 좋으나, 결여를 참작하지 않은 자신감은 낭패를 끌어 당긴다.
"반대편에서 어떤 요란한 외침이 들리더라도 온화하고도 단호하게 자신의 자발적인 신념과 직관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어떤 낯선 이가 다가와 따져 물을 것이다. 그대는 항상 무엇을 생각해 왔고 무엇을 느껴왔는가?" 나에게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지 않은 이유때문에 한없이 초라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처지가 되어서야 되겠는가?(주3)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은 논리적이지 않아 뜬금없거나 믿을 수가 없다고 치부할 지 모르나
이는 더 큰 우주의 대법(大法),
인과(因果)의 근간을 무시하는 처사다.
지금 이 말이 우습고 말도 안되는 논리로 여겨진다면,
'당신은 기적과 운이 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없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도 어떤 순간에 두 손 모아 기도하지 않은가?
아미엘(주4)은 날카로운 비평에 시달렸던 철학자다.
형이상학적이기만 해서 형이상학자라고 불리지 못한. 즉,
형이상학은 형이하학이라는 현실에 발을 디딜 때
진정한 형이상학인 것이다.
경제위기, 첨단과학, 급변과 예측불가의 시대,
극단적 양극화, 전연령대의 자살률 1위.
지금 우리나라에는 인문학과 철학이 간절하다.
인간본성을 일깨우자는 목소리가
현실을 살지 말고 꿈이나 꾸자고 잔뜩 부풀리는 바람은 아니다.
보다 초월된 의식으로
더 큰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제대로 살자는 간절한 외침이다.
'내가 하려고 해서'
거창한 아이디어가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면
여기엔 기획과 계획과 능력말고
더 큰 무언가가 빠진 것은 아닌지
이제는 고려해야만 한다.
니체 역시 정신의 3단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맹한 사자가
'나는 원한다. 나는 기꺼이 한다.'라고 하자
커다란 용은
'그대는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주5)..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이 없다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그것은 사자라도 감히 할 수 없다고 말이다.
모든 것은 반드시 상반된 이면을 품고 있다.
그래야 '전체', '일체성'이 보장된다.
햇빛이 비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림자를 품고 산다.
선은 악이 존재할 때 선이며
빛은 어둠이 존재하기에 빛이다.
수직과 수평, 앞과 뒤, 위와 아래, 넓이와 깊이, 유한과 무한, 생성과 소멸, 나와 나아닌 모든 것, 물질과 비물질, 삶과 죽음. 현상과 본질, 이상과 현실...
우리는 영혼의 소리를 담은 내면으로
단단히 발을 붙인 현실을 살아야 한다.
논리와 비논리
합리와 비합리가
균형을 이뤄 전체가 되어야
일은 결과를 낸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그것'에 자격있는 내가 되려고,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적합한 내가 되려고
일과 꿈을 나에게서 분리시켰다.
지금까지의 인식으로
나의 꿈과 일이 가는 길을 훼방놓던 내가
스스로의 속도와 방법으로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나는 바닥으로 내려앉아 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나를 통해 세상에 창조될 무언가' 라는 관점으로 격상시켰고
꿈을 따르려는 낮은 위치로 현실의 나를 이동시킨 것이다.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고
꿈 역시 꿈이 가는 길이 있다.
꿈은 자신이 가는 길에 필요해 일을 생성시켰고
일은 자신이 가는 길에 필요해 나를 선택했다.
그런데 과연
'내가 이루고자 하는' 그것을 온 우주에서 나만이 원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나와 비슷한 꿈을 품은 이는 많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자격을 갖추고 내 꿈이, 꿈을 위한 일이 나를 선택해주길 간절히 바라며 나를 연마하여 적합한 나로 만들어가는 것만이 내가 현실에서 해야 할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것이라면 현재의 내 능력만큼만 나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의 꿈을 내가 현실로 만든다?
아니다.
꿈은 자신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그 시간에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꿈을 위한 일을 내가 선택한다?
아니다.
그 일이 가는 길에 내가 적합하다 판단되면 나를 데려다 쓸 것이기에 나는 나를 연마하고 있으면 된다.
내가 꿈과 일을 섬기는 자세로 충직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꿈과 일의 주인이 되어갔다.
타인이 아니라 '미래의 나'에 충직한 일상이 진정 나의 자아가 원하는 삶이다.
무한한, 잠재된, 위대한 자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현실의 나는 그저 길이 되어주는 것.
이 얼마나 단순한가?
꿈은 그 자체의 시간을 따라 현실이 되고
일은 그 자체의 필요에 따라 나를 데려다 쓴다.
그러니,
나는 그들에게 선택되는 존재,
그들이 지나가는 길일 뿐이다.
꿈이 요구하는 인간,
일이 믿어주는 인간으로 내가 선택되도록
나를 연마하면 된다.
그러면
일은 나를 필요로 할 것이며
꿈은 나를 선택해 주인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충복이고 싶다.
나는 그들이 탐내는 내가 되고 싶다.
나는 그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잘 닦인 길이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나 아니면 안된다고,
무조건 나여야 한다고,
'나'라는 길로 가야 한다고,
그렇게
꿈의 충복에서 주인이,
동시에 창조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장자크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주6)'에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한 하나가 결국,
'너는 네가 행하고 받는 것에 대해 불평등하지 않고 공평하다 여기며 잘 산다'고 생각하는가?를
우리에게 물은 것이라 여긴다.
이에 '그렇습니다!'라고 감히 대답할 수 있는 나로 나를 만드는 것. 욕심부리지도 말고 억울하지도 않게 그저 나를 '내가 원하는 일'. '내가 원하는 꿈'에 걸맞는 나로 나를 키워내는 것, 그러니 나는 미래를 살지 않고 현실을 살면 그뿐이다.
나는
'나 외의 모든 것'이 나를 선택해주길 바라며
미래가 지금의 현실을 이끌어주길 바라며
영혼이 실재인 나를 깨워주길 바라며
꿈이 제 때의 현실로 발현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
'꿈과 일이 나'를 지나가도록
내가 길이 되는 것이
내가 꿈을 이루는 가장 지름길이라는 것이
내가 터득한 관점이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8437164
[지담연재]
월 5:00a.m. [짧은 깊이]
화 5:00a.m. [엄마의 유산]
수 5:00a.m. [필사 - 사유의 손끝에 철학을 품다]
목 5:00a.m. [영혼의 노래]
금 5:00a.m. [나는 시골이 좋습니다.]
토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일 5:00a.m. [조용한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