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지가 되겠다.

by 지담

새벽독서 7년을 넘기며 큰 선물이 있다면 나를, 현상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현실을 살지만 현실의 이유를 들여다볼 눈이 생겼고 미래를 살아보지 않았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7년의 새벽독서를 통해 얻은 15가지 삶의 관점을 하나씩 풀어본다.


오늘 8번째!

나는 거지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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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식의 거지가 되겠다.

지식이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과거의 부산물이다. 마치, 음식이 배속에 들어가는 그 순간 쓰일 것이 다 쓰이면 나머지는 배설되듯 내 머리속의 지식도 그래야 한다. 쓰이고 남은 지식에 기대어 우쭐대는 것은 배설되지 못한 것으로 사유를 채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장을 멈춘 지식은 축적이 아닌, 정체와 퇴보다.


나는 쓰레기지식은 남기지 않겠다.


나는 감정의 거지가 되겠다.

감정에 사로잡혀 방황하고 아파했던 나날들이 길었다, 그 시간들이 무용했던 것이 아니라 감정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락했던 내 정신의 무능을 이제 안다. 꼭 필요할 때 기능되어야 했던 감정이 남발되었던 시간들 탓에 감정은 내게 사치가 되었기에 감정의 지배는 곧 나 스스로의 식민화하는 일이라 여긴다.


더 이상 나는 감정에게 지배당하지 않겠다.


나는 재산의 거지가 되겠다.

목적없는 삶에서 이룬 재산은

소유가 아니라 훈육의 도구였음을 이제 안다.

돈은 사람을 데려왔고

사람은 이해를 남겼으며

이해는 현실을 알게 했고

현실은 마침내 꿈을 데려왔다.

그러니 이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지불해야 마땅한 교육비다.


먹고 사는 기본권을 제외한 나의 소유는 세상의 것이다. (부연글)


나는 시간의 거지가 되겠다.

무상으로 주어진 시간을 모두 내 것이라 여기며 소비, 소모해 온 날들이 길었다.

혜택을 권리로 착각하는 순간 보은을 잊게 되는 꼴사나운 인간이 되어가는 나를 방치했던 나.

이제 나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인생이라는 시간앞에서 감사하고 겸허해야 하니


내 맘대로 사용해도 되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조건의 거지가 되겠다.

이 깨달음을 인정하기까지가 가장 어려웠다.

태어나고 죽는 것을 제외한 모든 선택과 판단이 내 의지의 결과라 믿었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내가 선택했다고 믿어온 판단과 결정은

거대한 조화에 의해 배치된 결과였음을.

어떤 엄중하고 장엄한 시선이 있었음에도

나는 '선택'이라는 오만을 지금껏 품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은 소유가 아니라 잠시 허락된 자리다.

이제 나는 이 조건들에 기대지 않고

조화를 위한 하나의 구성요소로 머물러

제대로 쓰이려 한다.


자발적 비움

선택적 결단

존재의 배치

소유의 윤리


거지가 되니 참으로 편하다

아무 것도 없으니 아무 것도 안해도 된다.


지식의 거지가 되니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머리통이나 세척한 후 비어있는 통에 들어오는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고 빼고 넣고 빼고...

중요한 것은 들어오는 지식이 이니라 머리통의 것을 팔다리로 빼내는 기능이다.


감정의 거지가 되니 감정쓸 일 없어 좋다.

드디어 인간의 기능인 이성을 사용하니 참으로 명쾌하다. 데카르트(주1)가 알려준 12규칙대로, 사고(思考)하는 존재로서의 길로 들어선 듯 하여 마냥 기쁘다.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의 참의미를 조금은 이해한 듯도 하다.


재산의 거지가 되니 돈이 알아서 머문다.

이로써 나는 돈에서 멀어졌다.

내가 관심두지 않으니 이 녀석이 오히려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알아서 머물다 알아서 가라고 빈호주머니만 빌려주면 된다.

현자의 주머니는 뚫려 흐르지만 결코 비워지지 않는다(주2) 했으니...



시간의 거지가 되니 시간이 더 많아졌다.

무한정 주어지는 시간앞에 유한의 삶을 사는 나는

하루를 2등분하기도 3등분하기도 한다.

태양마중, 위대한 정오, 태양배웅.

새벽부터 아침나절까지의 하루.

정오부터 해질녘까지의 하루,

그리고 해넘어간 이후 시간.

이렇게 하루를 분절시켜 내가 시간에 쓰이도록 해야할 것을 우선한다.


시간을 제거하니

나는 단순해졌다.

아둥바둥 살 필요가 없고

그렇게 사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여유롭다.

신기한 모순 속에서 해야할 것을 다 하고도 여유가 넘친다.


조건의 거지가 되니 오히려 충만하다.

세상에서 내게 부여한 조건을 내려놓으니

자연과 사람의 모든 감각들이 나를 매개로 스쳐간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다만 흐름의 조건에 잠시 필요한 매개자일 뿐,

세상 모든 것이 내게 들어와

나를 통해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

이 자체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충만하다.



아!!!!!

거지인 나는

구걸만 하면 되는구나!


모르니 알려달라고

없으니 채워달라고

아프니 살펴달라고

보고 싶으니 보게 해달라고

듣고 싶으니 듣게 해달라고

갖고 싶으니 갖게 해달라고

느끼고 싶으니 보내달라고

알고 싶으니 알게 해달라고

주고 싶으니 주게 해달라고

가고 싶으니 가게 해달라고

이렇게 나는

구걸하면 되겠다.


세상 참 편하다.

웃음이 터진다.


비워야 채워지는 진리

이제 가슴으로 들어와 나를 간지럽히고

진정한 앎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함이라는 이치가

나의 이성과 놀자 하니 좋다.

그저 세상을 위한 도구로 존재하니

'나'라는 본성이 꿈틀거려

나는 더 웃게 된다.


주1> 데카르트, 방법서설, 문예

주2> 세네카, 세네카인생철학이야기, 동서문화사


공연관람 및 [엄마의 유산]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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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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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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