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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02. 2022

철학에서 '부(富)'의 근원을 찾다 - 몽테뉴

실증주의자인 그의 현실적 충고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

몽테뉴는 내면적 실증주의자다.

살아있는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것은 고려할 값어치가 없다고 보는 적극적인 실증적 태도를 가진 철학자다.

그의 이러한 점때문인지 나는 '몽테뉴처럼 사는 게 꿈'이다.


몽테뉴는 스스로 중요하게 여기는 몇가지 가운데 하나가 '돈버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고고한 철학자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감이 있지만 그도 삶이라는 현실을 살았구나 싶어 살가운 공감대가 느껴지면서 그가 거론한 '돈'의 실질적인 가치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돈 버는 일이었다. (중략)
상당한 금액을 저축했으며 평상시에 쓰는 소비 이상으로 갖는 것이 아니면 가진 것이 아니고,
장차 받을 것이 확실하여도 아직은 받을 희망이 있는 상태로 있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재산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중략)
그런 변고는 무한정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누가 말하면,
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어느 정도의 사태라..

무엇일까.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물론, 더 고차원적으로 '문제는 해결의 속성'을 자체적으로 지닌다고 하지만

내 인생에서 들이닥치는 '문제'의 크기에 따라 때론 내 삶이 처참하게 무너지기도 한다.


뜻하지 않는 재난을 당할 수도 있고 이번 코로나사태와 같이 느닷없는 전염병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잘 다니던 직장을 잃게 할 수도 있으며 그나마 먹고 살만했는데 때아닌 경제공항으로 물가는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시류는 나만 냅두고 달려가는 듯 내 능력으로는 참으로 따라잡기 버겁다.


이보다 한차원 더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돈이 절실한 순간에 아무런 대책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는 것이다. 

당장의 수술비가, 부모님을 모실 요양원비용이, 돈이 조금만 뒷받침이 된다면 내 아이가 꿈을 펼칠 수 있을텐데 하는 순간들 말이다.

더 악한 경우는 내가 몸이 아파도 돈을 벌어야 하니 쉴 수 없다는 현실이다.

이렇게 누구나에게라도 닥칠 수 있는 현실적 한계에서 날 구원해줄 어쩌면 유일한 수단이 '돈'일 것이다.


이런 게 삶이라면 삶이겠기에 몽테뉴가 '돈버는 일'을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며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는 그의 말에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몽테뉴도 '돈'앞에서 남의 눈치를 봤다니.

말을 그렇게도 잘하는 나이지만, 내 돈에 대해 말할 때에는 거짓말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같이 부유하면 가난한 체하고,
가난하면서 돈이 있는 체하며,
자기들이 가진 것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마음 속의 걱정을 덜어준,
꼴불견의 수치스런 조심성이었다.

몽테뉴도 돈 앞에선 남의 눈치를 봤다는 이 글에서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오히려 더 친근감을 느껴 그의 삶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어졌다. 

그냥 믿어버리고 싶었던 그였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한데에는 더 깊은 속내가 있는 듯 하다.

재산을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다 곤궁함을 느끼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 곤궁은 아마도 혼자 있을 때가 어쩌다가 부유함과 같이 있을 때보다 덜 불편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수입에서보다도 질서에서 온다.
그리고 부자로서 불안하고 궁색하고 분주한 자는 그저 가난한 자보다 더 가련하게 보인다.

그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이를 불려가는 과정에서 

분명 왜 '돈은 불어나는데 내 마음은 더 곤궁해지는지'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지면이 몽테뉴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그를 통해 배워야 할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늘어나는 경제력만큼 자기 정신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에 대해 치열하게 경계했던 바로 그 점이

내가 몽테뉴를 닮고 싶고 그에게서 배운 것을 내 삶의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돈'으로 쏠리는 시선을 경계했다.

돈더미에 마음이 쏠리는 버릇이 생기면, 그 때부터 돈은 그대의 소용이 되지 못한다.
그 가장자리도 떼어보지 못할 것이다.(중략)
전에 내가 양떼를 잡히거나 말 한 필을 팔 때에는,
극진히 여기며 따로 간수해 둔 지갑을 열 때만큼 억울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위험한 일은
이 욕망에 확실한 한계를 세워서 저축을 알맞게 그만두기는 쉽지가 않다는 일이다.
이 돈뭉치를 줄곧 키워가며,
작은 숫자를 더 큰 숫자로 불려 나가서,
결국엔 비천하게도 자기 재산을 즐겨볼 생각은 못하고,
모두 간직해 조금도 쓰지 않는 수작만 하는 것이다.

정량적인 부는 분명 우리를 위기에서 여유를 선물하겠지만

동시에 욕망의 한계를 긋지 못하는 정신은 분명 곤궁과 공허로 나를 몰아간다.

한마디로 돈 좀 있는 쫌생이가 되지 않으려면 욕망에 한계를 그을 줄 알아야 한다.




꼴같잖은 늙은이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부'가 양날의 검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 검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어느 누군가는 가난해지기 위해 돈을 모두 바닷속에 버리는데 

누군가는 그 바다를 뒤지며 부자가 되려 하는 이 모순된 인간의 욕망에서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나에게 다시 물어야겠다.

'돈'을 원하지만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가?

나의 '욕구'는 무엇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돈'을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그 '욕구'는 분명 내 인생을 너머 모두를 위한 것인가?


이에 대해 희미하더라도 길을 알고 가는 자라면 

무조건 돈을 모아야만 한다. 그게 우선이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누구가의 인생에 나는 필요하고 유리한 인간일 수 있다. 


하지만, 위험은 분명 내 주변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내 욕망이 탐욕으로 변하는 시점,

내가 얻은 혜택이 권리로 착각되는 시점,

내 시선이 내 실제를 알아채지 못하는 시력으로 전락하는 그 순간이 오면

나는 그 어느때보다 돈보따리를 바다에 던질 용기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나이 들어가며 못고치는 고질병이 '인색'이며

이런 모습으로 꼴같잖은 늙은이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부유는 예지의 빛으로 밝혀지면 장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리안이 된다고 말한다.(중략)
내가 돈을 모을 때는 머지않아 쓸 데가 있다는 생각으로 저축한다.
더 가져도 소용없는 땅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사려는 것이다.(중략)
나는 재산을 불릴 욕심이 전혀 없다.
‘부유의 과실은 풍부이며, 풍부의 규범은 만족이다’(키케로)
나는 당연히 인색해질 나이에 이 버릇을 고치게 된 것을 매우 고맙게 여긴다.
인색은 늙어서 모두 잘 걸리는 병으로,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수작 중에서 가장 꼴같잖은 일이기 때문이다.


p.s. 나는 첫 문단에서 '몽테뉴처럼 사는 게 꿈'이라 말했다.

      몽테뉴처럼 돈 걱정없이, 욕심없이, 맘껏 책읽고 글쓰고 그렇게 수없이 많은 책들로 빼곡한

      숲속 나의 집에서 그렇게 나이들어 가고 싶다. 

      그런 삶을 위해 지금 나는 준비중이다. 

      몽테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 몽테뉴, 에세 나는 무엇을 아는가, 2007, 동서문화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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