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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03. 2022

철학에서 '부(富)'의 근원을 찾다 - 쇼펜하우어

어디에 길들여지도록 나의 자리를 내어줄 것인가?

 쇼펜하우어에 대한 의리

참 부러운 쇼펜하우어.

막대한 유산덕에 걱정없이 탁월한 두뇌와 해안을 글로 표현할 여유를 지녔으니까.

브루주아의 자식으로 태어난데다 그릇된 성품으로 수많은 비판이 그를 대변하고 있지만 

나는 그래도 그가 참 좋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발타자르그라시안을 그도 좋아한다는 사실때문에 

시대를 초월해 공감과 동질감이 느껴졌고

둘째,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있지, 

그 사람이 어떻다 저떻다를 논하는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 말도 거칠고 생활도 방탕하고 염세적인 그이지만 그가 세상을 향해 내지른 용감한 그의 철학이 분명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수세기를 지나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에 대한 왈가왈부에 합류하기 싫다. 그에게 아무것도 준 것 없이 배우기만 하니 그의 개인적 성품은 감싸주고 그에게서 배울 점만 잘 배우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미와 표상으로의 세계'는 참 나에게 어려운 책이었다. 

그는 내 지식의 바닥을 보게 하고 내 이해력의 한계를 알려주면서

꾸역꾸역 읽어나가는 끈기도 배우게 했다. 

그 시간으로 인해 나의 지력은 나름 강해졌을테니까 나는 쇼펜하우어에게 감사할 것밖에 없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고생하며 일하지만 정신이 텅빈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인 그가 '부'를 논하는 것에 대해 적잖은 반항도 있었던 나였기에 

책을 읽는 내내 '네가 알아?'라는 시건방이 계속계속 내 안에서 튀어 나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잘못된 말을 해서가 아니라 내 내면에 질투와 편견이 가득해서였다. 

아무 의미없는 질투는 그의 명석하고 뛰어난 통찰에 매번 나만 부끄럽게 했다.


그는 자신의 글처럼 '부자였지만 불행하다고 느끼는' 한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신에 흥미를 가져다 줄 '철학'을 심오하게 파고 들며 '헤겔'에게 덤비곤 했겠지.

어쩌면 그의 정신적 갈구는 그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물질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비해야 하는 의무였을 지 모르겠다.


그리고 명확하게 그는 주장했다. 

'정신의 부'가 '외면이 부'를 견인한다고!


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부, 즉, 쓰고 남을 정도의 부는
우리들의 행복에는 거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
부자들 중에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참된 정신적 교양이 없고, 지식도 없어서 정신적인 일을 할 수 있을만한 기초가 되는
그 어떠한 객관적인 흥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
인간의 소유물에 비해 행복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더 큰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정신적인 교양을 쌓기보다는 부를 쌓는 일에 천배나 더 노력을 바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얻은 부를 늘리려고 앉아있을 틈도 없이 바쁘게,
개미처럼 부지런히, 아침부터 밤까지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중략)
정신이 텅 비어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중략)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난 도련님이 막대한 유산을 순식간에 탕진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이런 낭비의 원인은
사실 정신의 빈곤과 공허에서 일어나는 권태감에 있다. (중략)

내면의 빈곤이 외면의 빈곤까지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음.. 

다른 시대를 살아온 쇼펜하우어이지만 그가 조언하는 '부'는 현실적으로 아주 공감할 부분이 많다.


어쩔 수 없이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가난과 재난의 고통 속에 사는 이들도 물론 세상에는 많지만

흔히들 '중산층'이라 불리는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적어도 '죽을만큼 해봤어?', '목숨걸고 해봤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미친 듯이 치열해본', '이거 아니면 안돼!'라고 덤벼본 경험없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아닌, 

그의 말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개미처럼 고생은 하지만' 그다지 치열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게으른 것도 아닌, 말 그대로 평.범.하.기.그.지.없.는. 사람이라면

경제적인 치열함보다는 행복하기 위한 치열함에 더 비중을 두고 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휴일이면 캠핑을 가야 하고

심심하면 넷플렉스를 찾아 즐겁고 흥분된 곳으로 갈길잃은 정신을 배치시켜야 하고

외로울 땐 또 다른 외로운 이를 찾아 술 한잔 기울이며 세상 떠도는 이야기로 

지적허기와 참고 있던 혀를 달래며

넋두리와 하소연에 위로와 응원을 적절히 섞어 '이게 사는거지'라며 퉁쳐버리는,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돈과 시간에 치열하기'보다 

'공허함을 달래고 행복을 쫒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적당히 가져서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포기하며 사는 적당한 인생...


그래서, 적어도 나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진짜 '부'는, 우리가 그리 가지고 싶어 하는 '부'는 정신에 있다는 말 말이다.


내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정신의 빈곤과 공허'를 달래기보다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지 의식적 각성에 시간과 정신을 투자해야 한다.

  



 의식적 각성에 나를 놓아두면.  

의식적 각성에 나를 놓아두면 정신이 바빠진다.


나에게 무료할 틈을 주지 않는 끊임없는 갈구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주책맞은 공허

결코 스스로와 타협되는 않는 지독한 양심의 잣대

정신의 노동으로만 채울 수 있는 무한함과의 직면

도망가려는 정신을 민감하게 잡아채어 제자리에 앉혀야 하는 집착에 잠시도 쉴 틈이 없어지고


눈동자는 앞을 향해 있지만 시선은 허공에 있는

수많은 소음 속에 살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을 향해 내지르고 싶은 말이 넘치지만 어떤 언어도 그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행복할 순 없을거라 스스로를 자진해서 위기로 내모는 지경까지 자신을 데려갈 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에 시간을 허락하고

정신의 호흡을 달래주며

정신으로 나의 기를 모아줄 때 


나의 내적외적 빈곤이 정신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될 것을 확신한다.  .

정신을 채우느라 돈을 쓸 여유가 없어지고 

정신을 비우느라 돈이 뭔 짓을 하는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기에 


자연스레 내 주머니에서 돈은 새어나갈 겨를이 없고 

돈도 마음놓고 스스로를 불릴 태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기에

정신의 부는 외면의 부를 불러오는 그의 말이 내 세계에서 입증됨을 경험할 것이다.


빈곤을 가장 안전하게 방지하는 길은 내면의 부, 정신의 부를 쌓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부는,
그것이 우수함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료함이 만연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퍼올려도 마를 줄 모르는 사상의 활발한 움직임,
내면세계, 외면세계의 각기 다른 여러 현상에 접하며 끊임없이 새로이 솟아오르는 사상의 유동,
시시각각으로 다른 사상의 결합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이것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충동들 때문에.




그리고 여기, 쇼펜하우어는 부도 가난도 습관이 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길들여진다는 건...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어디에 길들여지도록 자신의 자리를 내줄 것인가?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부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 부는 없어서는 안될 것, 유일하게 활용가능한 생활요소,
이른바 공기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처럼 그 부를 지키며,
따라서 대체로 정돈하기를 좋아하고 세심하며 검소하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빈곤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따라서 후에 어떤 계기로 부가 굴러들어오게 되어도 그것은 덤과 같은 것,
오로지 향락과 방탕을 위한 것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그 부가 없어지게 되면 그것으로 그만,
다시 예전처럼 생활하며 오히려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져버린 것이라 여긴다. 

노년기에 있어서의 빈곤은 커다란 불행이다.
빈곤을 정벌하고 건강을 유지한다면 노년기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연령기이다.
한가롭게 있고 싶다는 것과 안심하고 지내고 싶다는 것이 노년기의 주요한 욕구다.

쇼펜하우어, 인생론, 2010, 나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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