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소고
무엇이든 본질을 보고자 하는 치밀함은 언제나 나를 힘겹게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나는 반갑고 흥미롭고 좋다. 좋기에 계속 하는데 계속 하다보면 찾고자 하는 그것이 드러나겠지. 중용 23장의 글처럼 '드러나면 뚜렷해지고 뚜렷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교화'되겠지. 나는 나를 교화시키는 중인 것이다.
나를 찾고자, 나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바람을 시작하려니
나는 '나'를 알기 전에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나도 인간이기에.
알아내지지 않는, 수천년부터 철학자들이 고군분투했던 이 앎의 정체에 내가 도달할리 만무하겠지만 결코 완벽해질 수 없음을 인정했기에 불완전한 이 사고의 걸음에 약간의 쉼과 분주함이 번갈아 나를 이끄는 것을 나는 달갑게 반긴다. 수많은 단어가 있는 모국어이지만 나의 짧은 지식으로 다양한 모국어를 적절히 나열하며 나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상당히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이 자판을 두드리는 것에 최대한 의지하여 미숙한 표현이나마 해보려 한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 3가지 외에 또 다른 4번째가 발견될 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자들의 근거와 지금 내가 이해한 지점이 여기까지인지라 이 3가지를 논한다면,
인간은 몸덩어리에 '이성'이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정신덩어리를 함께 지니고 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그리 행동한다고 하지만 정신이 육체에게 명하는 것을 지시하는 또 다른 어떤 자극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아마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자극이 영혼의 자극이 아닐까 싶은데, 무슨 말이냐면, 어떤 책을 읽으면 우리는 정신(이성)으로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어떤 느낌을 갖는다. 가령, 현실점검에 대한 책을 읽으면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슴으로 파고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싶게 정신이 운동하게 만드는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 느낌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이것이 영혼의 자극이라 명명하려 한다.
영혼이 어떻게든 자극을 주었기에 내 정신이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활동을 시작한 것이고 이 정신의 자극을 받은 육체가 '어떻게라도' 살기 위해 무언가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혼이라는 것이 정신마냥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은, 그러니까. 크기와 무게가 전혀 없는 형질의 것이라 나는 '느낌'으로만 전해받을 수 있다. 사실 내 피부에 먼지가 닿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둔한 감각을 가졌다. 길가다 가느다란 거미줄이 내 이마에 스쳐야만 나는 비로소 거미줄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개미가 내 다리에 한참을 타고 올라와야 개미의 발이 내게 붙어 있음을 감지하며 바람한점 없다고 내 피부가 감지할지라도 나뭇잎이 여기에서 저기로 살짝 옮겨진 후 바람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육체는 이렇게 있어도 알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다.
그런데 영혼은 도대체 얼마나 작으면 내 모공을 뚫고 내 가슴에 자극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토록 작은 알갱이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자주, 얼마나 켜켜히 쌓여 있었길래 내 오장육부를 뚫고 가슴으로 그것이 느끼게끔 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오래......계속.....정성스럽게....나에게 신호를 보내왔다는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빛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먼지를 본다. 눈을 뜨고 걷지만 이마에 닿아야 거미줄이 있음을 안다. 우리가 실제 본다는 것은, 피부에 느껴진다는 것은 알갱이가 큰 순서대로 감지되는 것일텐데 이렇게 내 육체가 둔한데, 이를 아는 영혼은 그러한 나의 온 몸을 뚫고 내 안에 자리잡은 채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크기와 무게를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결국, 나의 정신은 영혼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다. 수용하든 훼방을 놓든 그것 역시 자극이 왔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이라는 녀석은 자주 영혼을 방해한다. 분명 영혼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왠지 불안할걸!'이라 내게 그토록 오랜 시간 신호를 보냈음에도 이 신호를 감지한 정신은 '괜찮아. 뭐, 어때? 불편해?'라고 영혼의 메세지를 순식간에 반박하고 훼방놓으며 나름 잘난 정신인 척 내 육체를 그 자리에 머무르도록 지시해버린다. 나는 여기서 정신과 영혼 가운데 영혼쪽의 신호에 더 민감해지도록 나를 훈련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며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임에 확고히 내 사고에 굳혀버리기로 했다.
정리하면, 우주를 유영하던 영혼은 정해진 궤도에서(운명론과는 다른 의미)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간파하고 내게 온 열기를 다 뿜어내며 내가 보지도 알아채지도 못하는 내 피부의 모공보다 더 작디 작은 알갱이로 내 몸에 침투해 내 가슴에까지 도달하여 전해준 그 신호를, 둔감한 육체의 경험들로 만들어진 내 정신이 그 경험적 지식만을 믿고서 한순간에 무시, 외면, 훼방을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육체와 정신의 감각보다 영혼의 소리에 더 귀를 여는 것이 내 귀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라 말하고자 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인 내가 가장 집중해야 하는 것은 정신(이성)도 아니고 육체적 감각도 아닌, 가슴인 것이다. 영혼이 자신을 쌓아두는 가슴. 오랜 시간 나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터를 잡은 가슴...
또한, 육체와 정신만을 두고 봤을 때, 이 둘도 아주 묘한 관계를 지니는 것을 우린 알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육체가 정신의 본성인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어떤 정신적인 충격에 의해서 육체가 땅을 찾아 기어들어가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다. 어떤 충격을 받으면 심하게 두통이 오고 심지어 혈액의 순환을 멈추게까지 한다. 이렇게 정신은 육체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정신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제대로 기능해야 하며 따라서, 정신의 본성은 육체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은 타당한 것이다. 내가 내 입에 무엇을 넣느냐는 이런 관점에서 상당히, 더욱 더 중요하며. 정신은 육체가 먹여주는 것들로 자라는구나를 인정해야 했다.
이로써, 영혼으로부터 온 자극을 경험적(육체적)지식, 즉, 육체에 의해 자라는 정신이 훼방을 놓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라고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사고 자체에도 상당한 모순이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영혼을 무시하는 이성이라면 이는 소용없는 이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영혼의 자극에 무릎꿇는 이성이라면 가히 박수쳐 환영할 정신인 것이다. 다행인 것은, 정신은 내 의식의 통제 하에 움직일 수 있는 성질이니 내가 정신을 어디에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 영혼의 자극을 감지하는 기능은 더하게도 덜하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차려!', '넋을 어디 두고 사니?' 라는 말을 내게 더 자주 해야겠다.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무언가 어디선가 자극이 있었기에 내 정신은 '이걸 해볼까?'와 같은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할 것을 정신이 물어대면 배우게 되기에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물음표.는 영혼의 자극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내가 정신으로써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느낌에 의해 물음표가 생기고 정신은 그 물음표와 함께 받은 느낌으로 인해 활동을 시작하고 이 활동은 그간 먹여 키워준 육체덕에 가능한 것이 된다.
'인간'을 구성하는 이 세가지 요소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이러한 연합으로 나의 세월을 이끌기에 나는 영혼의 자극에 더 민감해야 하며 내 정신이 이를 훼방놓는 것을 특별히 경계하려 한다. 긴 세월을 그리 작은 알갱이로 나에게 끊임없이 보내온, 그리고 지금도 보내는 그 정성에 내가 감복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감탄할 것인가? 나는 나의 영혼이 내게 보내는 신호에 더 민감해지기 위해 오늘도 육체에는 건강한 것들을 넣어줄 것이며 정신이 영혼의 진입을 감지할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내야겠다.
중요한 것은 꽃에서 향기를 뽑아낼 수 없듯이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는 서로가 없이도 그 양태를 유지할 수는 있으나 서로가 조화를 이뤄 연합될 때에 가치롭다. 영혼의 자극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이 영혼이 정신과 육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고 이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내 손길이 닿는 영역의 것, 정신과 육체를 잘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이 터를 잡고 나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내 정신이 그 자리를 잘 챙겨줘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 내 육체는 정신을 더 잘 먹여 키워내야 한다. 그리고 정신의 심부름을 잘 해내도록 날 강인하게 만들어야 한다. 현실을 사는 나에게는 그래서 정신과 육체에 더 힘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며 이 힘을 주고 빼고의 가늠은 영혼이 정신에게 준 신호가 기준이 될 수 있겠다. 늘 깨어 있어 영혼의 자극에 민감하고 이를 통해 정신이 내어준 자리는 맑고 깊게. 그렇게 영혼과 정신을 담는 육체는 정신의 부름에 제대로 응하는 삶.
이로써, 아주 오래전부터 내 가슴에 담아놓은, 톨스토이가 마지막 산문집에서 나를 울렸던 '영혼이 인도하는 길'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기에 이 새벽 나는 감사를 온 세상에 방사한다. 톨스토이가 삶의 무언가를 바꾼다고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한 이유. 영혼의 소리를 무시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으로 삶을 바꾸겠다는 말도 안되는 인생이 된다고 설파한 의미를 이제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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