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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21. 2023

너의 '뜻'이 너에게 '길'
을 내어줄거야.

'엄마의 유산 13'

소신. 이란 단어는 참 무겁지. 바쁜 우리 일상과는 다소 멀고 낯설지. 왠지 이 단어는 독립운동가처럼 나라를 구한 역사 속 인물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그렇게 책이나 드라마에나 등장하는 그런 단어지. 하지만, 인간이라면 또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 단어를 가슴중앙에 깊이 품고 살길 바래. 게다가, 소신을 가지면 상당히 편하고 단순한 삶을 보장받은 것이란다. 


그래서, 오늘은 너의 더 평안하고 가치있는 삶을 위해 '소신'에 대해 얘기해볼까 해.


소신을 가지면 더 편하고 단순해진다고? 뜬금없겠지만 들어봐봐.


우선 정신이 너무 활발하게 움직여서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이 없어지고 해야할 것을 남에게 묻지 않아도 돼. 

왜냐면 

자기가 스스로 해야할 것이 마구마구 생기니까. 

지켜야 할 그것에 집중하게 되니까. 

서 있어야 할 그 곳에서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뭘하지?', '어디로 가지?' 망설이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으니까

어줍잖은 지식으로 남들에게 조언하고 훈수뒀던 시간이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배움이 있는 곳으로 옮겨질 것이며 갈등과 불안으로 보낸 시간들은 야망과 미래로 이동하여 오로지 도달해야 할 그 곳에 가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거기에 맞추게 되거든. 

그래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단순하고 쉬운 것이란다. 게다가 바람직하고 알차지.


소신(所信)이 뭘까?

믿는 바에 따르는 것이지. 

자, 그렇다면 네가 무엇을 믿는지, 믿을 것인지,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잠깐 생각해볼까?

여기서 잠깐, '나는 누구를 믿는다'처럼 '누구라는 변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피하도록 해. 예를 들어서 '나는 엄마를 믿어요.' 라고 한다면 믿는 대상이 엄마이지. 그렇다면 너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엄마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네 믿음은 좌지우지될 수 있어.(아, 물론 엄마를 믿지 말라는 것은 아니야^^;;).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상'을 믿고 따르지 말고 네가 스스로 통제가능한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 것을 따르라는 것이야. 가령, 너의 꿈. 너의 미래, 너의 이상, 너의 일상, 너의 사고, 너의 판단, 너의 가치관, 너의 무언가.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외에 그 어떤 것도 통제할 수가 없거든. 심지어 우리집 고양이도 네가 통제하지 못하잖아. 자기 스스로 통제가능한 것들에 소신을 갖는거야. 그렇다면 어떤 변수가 나타나더라도 네 믿음 역시 네가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어.


자신이 정한 길을 따라서 옆을 볼 새가 없으니 삶이 얼마나 단순해지겠니? 

그리고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니 다람쥐쳇바퀴도는 삶에선 벗어난 것이지. 

의미있는 걸음이지. 

정말 자신의 길을 간다는 뿌듯함으로 혹 '이 길이 아니면 어쩌나'와 같은 의심이나 

'이 길을 제대로 가야 할텐데'와 같은 불안에 힘들더라도 '길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허락하지 않지. 

이 길이 나에게 희망의 길이라는 믿음으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흥미와 재미와 관심과 쾌락을 누릴 것이야.

이리저리 고개돌리며 갈팡질팡 우유부단한 삶에서 정확하게 봐야 할 곳을 보고 걷는 걸음에는 구구절절한 변명이 등장하지 않아.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걸으면 되는 것이란다. 누구에게 도움청할 것도 없고 질문할 꺼리도 없지. 오로지 모든 해답은 네 속에 있으니까 말이야.


자신이 어디로 무엇을 위해 걷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그저 남들따라 걷게 되지. 세네카는 '양떼처럼 앞에 가는 무리를 그저 뒤따라가는 짓을 하면 안된다(중략). 저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남을 믿기를 좋아하면, 삶에 대해 아무 판단도 없이 늘 남을 믿음으로써, 그 때문에 잘못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전파되어 우리를 쓰러뜨리고, 마침내 전락의 심연으로 빠뜨리게 된다. 우리는 남이 지나간 길을 밟음으로써 자멸한다. 사람이 모여든 곳에서 멀어지기만 해도 우리는 이 병폐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했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남들따라 가는 것은 어쩌면 가장 쉬운 길일지 몰라.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여전히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단다. 정의를 앞세워야 할 법정에 비리가 난무하고 사회를 지켜야 할 정치에 부정이 가득하고 생명이 담보되어야 할 현장이 외모를 가꾸는 것으로 보편화되고 진리를 알려줘야 할 교육이 획일화되어 가고, 사람들 먹거리에 장난치고, 세금으로 복지를 실현해야 하는 곳에 가장 큰 도둑이 숨어 있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소신을 버리고 '다들 이렇게 하는데 뭘..'이라는 쪽으로 타협하게 되지.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선택과 판단이 소신을 지키는거야.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들이 희생되어야 한다거나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윤리를 소외시하는 경우가 너무 쉽게 용인되는 사회에서 사실 소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어쩌면 소수의 몫일지도 몰라. 


그런데 왜 소수일까?

신성한 어떤 책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자꾸만 어리석어지자 2명의 천사에게 지시했어. 한천사에게는 세상에서 지혜롭게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을 모두 데려오라 했고 다른 천사에게는 지켜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모두 자루에 담아오라고 했지. 그런데 첫번째 천사는 아주 쉬웠어. 몇 명 안되니까. 두번째 천사는 너무 수가 많아서 시간도 오래 걸렸을 뿐 아니라 자루에 담아보니 너무 무거워서 날아 오를 수가 없어 못 데려간거지. 그래서 세상에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소신을 지키는 이보다 소신이 뭔지도 모르고, 알더라도 쉽게 버리는 인간들이 많아진거야. 신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물들여가는지 지켜보기로 했대.


하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 소수의 힘때문일거야. 네 주변에도 많이 있겠지. 국수면발 하나를 뽑더라도, 옷깃하나를 재단하더라도, 권력이 보장되는 제안이나 돈이 굴러들어오는 계약서 앞에서도, 오랜 시간 공들인 사업의 성공을 보장하는 타협앞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결코 훼손시키지 않고 소신을 지켜내는 사람들. 더 깊이 거론하자면, 사람들은 이로운 곳으로 향하거든. 이로운 것은 강하지. 그래서 선(善)은 항상 이롭기에 강해. 인간개인의 힘보다 더 강한, 초월된 어떤 힘이 결국 선을 이기도록 만드는거야. 그것이 전체의 질서를 위해서도 이롭기 때문에 그리 갈 수밖에 없거든. 


네가 서야 할 자리가 있다면 어떤 방향으로 서 있겠니?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할거야. '소신'이 필요한 순간은, 뜻밖의 달콤함이 널 유혹하는 순간, 포기를 맞딱뜨린 위기의 순간, 뭔가 어긋남이 감지된 그런 순간이거든. 그 특별한 지점에서 반드시 소환해야 할 가치가 '소신'이야.  꼭 명심해. 악마는 천사보다 신비로운 목소리로 천사보다 더 빨리 너에게 속삭이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왜 신은 항상 악마를 더 이쁘게 치장해서 더 빨리 네게 보낼까? 너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너를 더 강하게 만들어 귀하게 쓰려구! 네게 선택이 주어질 때마다 또 명심해. '신이 날 선택해서, 내가 선택에 강해지게 하기 위해서,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길 바라기 때문이구나!'라고.


소신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연명하는 인생이라 할 수 있으니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정한 길에 있어 소신을 지켜가길 바란다. 소신이 필요한 어떤 순간에는 상당한 타격이 올 것같아 겁도 나겠지만 결과적으로 더 위대한 시선이 네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마. 당장의 '손해'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위대한 시선은 절대로 너를 해하지 않아. 더 큰 '이로움'을 위해 그 경험을 겪게 하는 것뿐이야. 늘 말하지만, 너는 귀하고 소중한 존재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을 때, 능력이 뭔가 결과로 보여질 것 같을 때, 사람들은 소신을 들먹이지만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갈 것을 알게 된다면 소신은, 아직 멀쩡한데 작아진 신발처럼 버리지도 신지도 못하면서 한켠에 쳐박아두게 돼. 그런 사람들이 항상 네 주변에 있을거야. 천사가 데려가지 못한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 말야. 이들은 너에게 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데 부지런을 떨거야. 그렇게 항상 네 옆에서 네게 조언할거야 '세상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네가 세상을 몰라서 그렇다' 라고. 


또 살짝 헷갈리게 하는 사람들도 있어. 마치 자신이 엄청나게 소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작은 책임도 지지 못하는 사람들. 가령, 지금 이 격변의 시대에 자기 인생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면서 정치걱정, 경제걱정, 남걱정으로 바쁜 사람들이 있어. 자기 생존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면서 자기가 마치 커다란 책임을 떠안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 바빌로니아의 노예해방에 들떠 주장하던 한 사람에게 위대한 철학자 랄프왈도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대. '가서 당신의 아이나 사랑하시오 (중략) 먼 곳에 있어 이룰 수 없는 그 사랑이 집에서는 원망이 될 것이오'라고. 노예해방의 가치를 주장하기 전에 기본이 되는 책임부터 다하라는 것이지.


이런 사람들은 천사가 자루에 담아 데려가려다가 포기한 당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모를걸!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개개인이 자신의 가치관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지켜내야 할 것을 먼저 지키고 보여줌으로써 증명하게, 증명함으로써 이로운 사람이 되길 가장 우선적으로 바라고 있어. 진심으로 바라건데 자기 인생부터 먼저 구름위로 올려놓아라. 제 아무리 비바람이 거세고 천둥번개가 너를 위협해도 구름위는 고요하단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관계적으로 자기 인생부터, 자기 가족부터 그리 만들고서 더 큰 곳으로 걸어가라. 그것이 자신이 살면서 지켜야 할 소신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란다.


물론, 탁월한 사명감으로, 특출난 능력으로, 남과 다른 배포로, 자기 인생과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고 대의를 위해 선출된 인간들도 있어. 만약에 너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기회에 선택되지 못한 평범한 우리네 인생에서는 자기 자신부터, 자기 가족부터 챙겨야 해. 이 말을 오해없이 듣길 간절히 바란다. 이기적으로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이타를 위해 기본이 되는 자리(自利)부터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해. 개인이 있어야 조직이 있고 조직이 있어야만 사회가 존속되지. 사회가 있어야 국가가 있고 국가가 건강해야 성숙한 세계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이 세계가 더 큰 우주의 질서에 부합하는데 일조하는 것이야. 우주의 시선으로 볼 때 초유기체로서의 개인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단다. 기본부터 먼저 세우는 것이 소신의 시작이야. 소신은 책임지는거거든. 자기인생,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 


아무리 전쟁과 질병이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 끊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껏 역사는 소신을 지킨 개개인으로 혁명이 일어나고 진화가 거듭되고 창조가 탄생하는 것을 증명했지. 이 모두가 소수가 행하는 '선'의 힘일 것이야. 무슨 나라를 구하라는 것도, 지구를 구하라는 것도 아니며 그저 네 인생 먼저 제대로 구하라는 것이야. 앞서 말했듯이 국수면발을 뽑더라도, 누군가에게 요리를 하더라도, 어떤 상품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개발하더라도, 강아지 한마리를 치료하더라도, 그 어떤 일에서라도 그 일과 자신의 가치를 품은 소신을 지켜내는 것이야. 그렇게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지. 그런데 자기 인생 제대로 구하라는 이 말이 얼마나 큰 뜻을 품고 있는지 아니?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인생 제대로 구하고 제대로 의미를 위해 소신을 지킨다면 이 우주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지 상상해본 적은 있니? 


자, 이제 스스로를 점검해 봐. 나는 과연 멀쩡한가? 나는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 나는 과연 나를 온전히 세우고 더 큰일을 도모할만큼 나를 키우고 있는가? 나에게 그럴 자격을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가? 


말로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하면서 쉽게 소신을 핑계뒤에 숨기고

말로만 사명어쩌구하면서 조직에 굴복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 세상이 힘들어 해. 그저 네 가슴에 품은 꿈,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소신. 그것에는 부모와도 타협하면 안된다. 하긴 자식이 자신의 뜻을 지키겠다는 데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부모는 부모자격이 없을 수도 있겠지. 여하튼, 네가 스스로 부여한 그 소신에만큼은 그 어떤 것 앞에서도 굴복하지 마라. 그것이 네가 태어나서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이고 유일하게 끝까지 걸어야 할 길이야. 이사람저사람 인생에 끼어들어 이런말저런말에 흔들리며 이러저러한 곳들을 전전하며 말같지도 않은 조언과 위로에 소신을 파묻은 채 감정에 흘러가는 사람이 되서는 안된다. 


항상 우리가 치부해버리는 진리안에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단다.

소신이 있으면, 즉, 네가 뜻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길을 만들어줄 것이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 알지? 뜻이 길을 만들지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여러번 강조해서 네게 말했듯이 미래는 현재 너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 즉, 현재까지의 경험으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것이야. 지금까지의 경험이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은 양념에 불과해. 미래에 일어나지 않을, 탄생될 그것은 그것만의 새로운 길이 개척될터인데 과거의 경험으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야 하고. 계획하며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단다. 경험이라는 손에 잡힌 것으로 미래를 잡을 수 있다고 속단하지 마라. 미래에 탄생할 것은 아직 네 손에 없단다. 네가 가고자 하는 길 위에서 소신을 지킨다면 반드시 너의 뜻은 너에게 길을 내어줄거야.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소로우가 전선주밑에 앉자 들었다는 그 소리를

너와 엄마 둘 다 '아이'가 되어 함께 손잡고 들어보고 싶구나.

'아이야, 마음에 깊이 새겨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네가 걷고 있는 삶보다 더 높은 단계의 삶, 무한히 더 높은 단계의 삶이 있다. 

그 길은 멀고 험하지만 네 인생을 모두 바쳐서라도 꼭 도달해야 할 소중한 길임을 결코 잊지 말아라.'


사랑한다...


* 세네카, 세네카인생철학이야기, 2016, 김현창역, 동서문화사.

* 랄프왈도에머슨, 자기신뢰철학, 2010, 정광섭역, 동서문화사. 

* 헨리데이빗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1996, 윤규상역, 도솔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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