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벽을 좋아한다. 아니, 새벽독서를 좋아한다. '새벽독서'는 나에게 하나의 고유명사다. '태양이 뜨기 전, 모두가 깨기 전,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읽어내야 할 책을 읽는 행위의 시간'정도로 풀이하면 되려나.
새벽이 좋아 독서가 좋아진건지, 독서를 하기 위해 새벽을 택한 것인지. '새벽'과 '독서'를 따로 떼어내면 그닥 별로인데 '새벽독서'라고 붙여버리면 그 가치는 차원이 달라진다. 그래서 새벽독서는 내게 고유명사다.
좋아하니 더 많이 오래 누리고 싶어 이미 가진 것을 빼고 새벽을 늘였다. 21시면 자고 02시면 일어나는, 그래서 비효율적인 늦은 저녁을 잠에게 주고 집중이 넘쳐 효율이 높은 새벽을 더 많이 가지게 됐다. 이런 패턴을 가진 것은 지난달부터다. 4시기상은 4년째 지속되는지라 흐트러짐이 없는데 2시 기상은 아직 완전히 자리잡지 못해 아직은 들쑥날쑥이지만 그 이유는 무조건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중은 포기를 전제한다. 또한,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을 거쳐야 얻을 수 있다. 여하튼, 내 하루의 모든 에너지는 이 새벽시간에 집중적으로 얻는다.
일어나면 곧바로 이부자리부터 정돈, 양치와 물세수 후 7분뒤 씻어내는 얼굴팩을 한다. 수분, 광택, 주름개선, 미백. 이 4가지를 하루 하나씩 순서대로 한다. 피부샵이나 기타 관리는 해본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매일 7분씩만 투자한다. 나이에 비해 주름많은 건, 얼굴에 뭐가 나는 건, 울긋불긋한 건, 화장으로 가리려 애쓰는 건 모두 싫다. 나는 맑은 피부를 원한다. 그래서, 오장육부가 건강해야 피부가 좋다는, 매일매일 작은 습관이면 따로 시간내지 않아도 된다는 나의 2가지 원칙을 매일 지킨다. 화장도 잘 안하고 이것저것 자기전 바르는 것도 귀찮으니 나에게 하루 7분투자는 최선이다. 그런데 이 최선이 최고인 듯하다. 비용면에서, 시간면에서 별 소모가 없고 효과는 탁월하다. 지금껏 피부트러블, 뾰류지, 과한 주름, 건조하거나 기름지는 것으로 내 기분이 상한 경우가 없으니 매일 7분의 집중투자가 앞으로 있을 한 부분의 걱정을 덜어줬다. 집중은 무조건 효과를 낸다. 단, 한순간 집중해 끝낼 것이 있고 매일매일 작은 집중이 쌓여야 하는 것도 있고.
팩을 한 채 고양이 밥, 물, X 챙긴 후 테라스에 나가 별을 본다. 매일 본다. 꼭 본다. 가끔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그 자리에 있으니 내가 보면 된다. 별과 나누는 대화는 주로 '내가 잘하고 있는지, 네가 보기엔 어떤지,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한다.'는 나의 일방적인 질문과 당부지만 상대가 월등한 존재라 맘놓고 말한다. 보고 듣는 이 없어 우습기도 난처하기도 이해하기도 이상하기도 한 대화지만 맘놓고 맘껏 한다. 그리고 커피물 끓이며 팩을 씻어내고 하얀 피부인데 더 뽀얘진 나를 만난다. 이 만남은 진짜 황홀하다. 스스로 자뻑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이런 나에게 살짝, 어떤 때엔 크게 한 번 웃어주고 스킨 살짝 바르면 그 다음 오래 지켜야 할 시간을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다.
02시 30여분. 책상을 한 번 휘 둘러본다. 내 책상은 10년도 더 된 책상인데 꽤 넓은 편이다. 이사하며 유리가 깨져 유리없이 그냥 사용중인데 곳곳에 고양이 발톱자국이 선명하다. 몇 번 '이놈!' 호통쳤더니 이제는 안한다고 믿지만 영험한 고양이들이 내 눈을 피해 여러번 책상에 발톱자국을 낸, 몰라도 되는 걸 알게 되있다. 뭐, 어쩔 수 없다. 이미 지난 것이라. 나는 지난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지금에만 집중한다. 모든 것에 그리 한다. 집중은 현재에만 가능하다. 시간과 있는 힘껏 손잡고 지금만 보는 것이 집중이다.
이 녀석들 발톱때문에 책상먼지는 유독 돋보인다. 그래서 앉기 전 꼭 물티슈로 책상 위를 닦는 것도 습관이 되었다. 나는 정리정돈이 나름 습관이 되어 있는지라 매일 자기 전에 다음 날을 위한 책상세팅이 딱! 되어 있지만 그래도 닦는다. 귀찮아도 한번 해놓으면 내 정신이 어느쪽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는 정리이며 정리는 귀찮다. 하지만, 귀찮은 그것을 해치우면 집중이 제 기능껏 힘을 낸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오늘', 그리고 '현실', 그리고 '지금'의 시작이다. 여유있게 자뻑한 상태로, 깨끗해진 책상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년째 매일 쓰는 단기목표를 적고 우주와의 약속을 쓰는 것이다. 각각 3번씩 적는데 겨우 5분. 짧은 문장들이라 5분이면 충분하다. 나는 필기속도가 좀 빠른 편이라. 매일 5분으로 내가 어느 과녁으로 활을 쏴야 하는지 확고히 한다. 항해를 할지 표류를 할지는 목적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다. 나는 내 인생이 표류하길 원치 않는다. 매일 5분, 그것도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첫 5분의 집중은 여차하면 어디론가 흘러가버릴 지, 떠돌지 모를 내 인생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항해하게 해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해준다. 집중은 결과로 가는 길에 있어 낭비를 없애준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30여분. 나는 감정과 이성을, 현실과 이상을, 나의 내면과 외면을, 땅과 하늘을 모두 내 것으로 흡수한 후 뱉어낸다.
나의 책상 왼쪽에는 커다란 독서대가, 가운데는 노트북이, 오른쪽에는 읽던 책들이, 이 모든 것 뒤로는 평소 자주 들춰야 하는 책들이 놓여 있다. 독서대 옆엔 연필꽂이 대용으로 사용하는, 딸이 사준 세워지는 필통이, 필통에는 매일 사용하는 빨강,파랑,검정 0.28펜과 다양한 컬러와 크기의 인텍스, 인덱스에 쓸 2가지 굵기의 싸인펜이 담겨 있고 그 옆에는 커피받침이 있다. 커피중독인 나이지만 뜨거운 커피를 책상에 놓았을 때 아래에 동그라미 자국이 남는 것을 싫어해 커피받침은 나의 기분에 아주 유용하다. 불필요한 것들을 거둬내고 필요한 것들만 채운 것. 집중은 그런 것이다.
사실, 독서대없이 책을 오랜 기간 읽었었는데 몇달 전부터 한쪽에 치워둔 독서대를 다시 꺼내 사용한다.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는 시간이 길었는지 목에 선명한 하나의 주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그렇다. 내 행동패턴상 목을 깊이 숙이는 경우가 책볼 때 외에는 별로 없고 주름의 깊이나 위치가 딱 그런지라 심증이 맞을 듯하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목디스크때문이다. 내 목은 '거꾸로 C자다'. 10여년전 알게 된 사실이다. X-레이 사진을 본 얘들아빠가 '여러 사진을 봤지만 이런 목사진은 처음'이라 했다. 1자목을 너머 거꾸로 C자가 된 지 오래지만 워낙 병원가기 싫어하고 아파도 아프다 내색않는 내 성격탓에 그 지경이 된 것이다. 극심한 오른쪽 어깨와 팔 통증이 서서히 손끝까지 내려와 오른쪽 팔 전체를 못쓰게 되었었다. 그 때까지 병원 한 번 안가고 그냥 파스로 견딜 정도였으니 나는 미련곰탱이 소리를 백만번 들어도 싸다.
그런 내가 병원을 내 발로 스스로 간 이유 역시 단순했다. 글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목에서 내려오는 신경이 손끝까지 떨게하고 노트북사용은 물론, 오른손잡이인 내가 치솔을 손에 쥐지 못해 양치질도 버거울 정도였으니 불편한 감정이 아픈 통증을 이겨버린 것이다. 역시 사람은 불편이 극에 달하면 절대 하지 않겠다던 그 어떤 것도 한다. 불편이 도를 넘으면 무조건 집중할 수밖에 없다. 닥치거나 다급한 경우도 무조건 집중이 된다. 하지만 바람직한 집중은 아니다. 당시 나는 오른팔을 쓸 수 있게 하는 데만 온통 집중했었다.
결국, MRI까지 찍고 수술을 며칠 앞두고 나는 '나 안해!' 해버렸다.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다지만 목수술은 리스크가 크다. 자칫 불행의 신이 내 손을 덜컥 잡으면 나는 영원히 목 밑으로 못쓰게 될 확률도 있고 해서 일단 생각할 시간을 벌기로 했다. 그 동안 통증마취주사를 1주일에 1번씩 맞아야 했는데 이 때 난 알았다. 나라는 사람 참 간사하다는 것을. 너무 아플 땐 뭐라도 하겠더니 통증이 마취되니 그렇게 계속 살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바쁘다는 사람이 주사 맞으러 1주일에 1번 꼬박꼬박 병원에 가게 되는, 시간없다는 것은 다 핑계다. 통증주사는 너무 많이 아팠다. 피할 수 없으니 일단 정신집중! 참는 방법말고는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힘을 주고 참는다. 내 몸의 모든 힘을 그리 한 곳을 위해 집중해본 적이 있던가. 궁사가 활시위를 당길 때 온 몸과 영혼을 과녁에 집중하듯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선 모든 것이 다 그 곳을 위해 존재하게 해야 한다. 많이 아프면 집중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된다. 당하고 나서 알게 되다니..
시간을 돌려도 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 때 수술대신 선택한 방법을 해낸 내가 너무나너무나 기특하기 때문이다. 몸은 들어간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행동이 잘못되어 얻은 증상은 잘못된 행동을 거둬내면 다시 원점으로 갈 수 있다. 원인을 알았으니 원인만 제거하면 증상은 없어진다. 이 단순한 원리에 의해 내가 오른팔을 못쓰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책상에 앉는 자세때문이다. 이 자세를 바꾸면 된다. 물론, 잘못된 자세로 인해 굳어진 이 육체를 바꾸려면 아프더라도 증상이 시작되기 전 자세를 훈련하듯 반복해야 한다. 재활과 마찬가지다. 집중한다는 것은 내가 선택한 그것을 믿고 반복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했다. 수술 대신 하루300번 좌우로 목돌리기. 허리부터 머리까지 꼿꼿이 펴고 앉기, 파워워킹으로 3키로걷기를 통증마취주사를 맞는 것과 병행하기로 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파워워킹을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목을 돌렸다. 목을 돌릴 때는 너무 아파서 울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때인데 옆에서 하나, 둘, 셋하며 숫자를 세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너무 아파서 아이들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었다. 지금 아이들은 울면서 목돌린, 목돌리며 운 엄마를 기억하며 가끔 웃는단다. 그 때는 울었지만 지금은 웃는다. 집중은 집중된 그 것때문에 부끄러움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집중은 날 울게 할지라도 반드시 웃는 결과를 내게 선물한다.
결과는? 수술없이, 물론 지금까지! 통증마취주사는 그 당시 3달정도에 끝. 목도 자유롭게 돌아가고 팔도 안아프다. 단, 거꾸로C자인 목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계속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 단,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진 상태로 며칠을 가면 아파진다. 이런 내가 다시 고개를 숙여 책을 보다니... 한대 쥐어박고 독서대를 꺼낸 것이다. 독서대꺼낸 이유가 이리 장황할수가...
2023.01.05. 04:54a.m. 내 책상 02:30분. 사물 하나하나에 나의 삶이 배인 이 책상이라는 공간에서 나의 새벽책읽기는 시작된다. 주로 2~3권을 돌려 읽는데 지금은 데카르트와 1417근대의 탄생, 그리고 야콥센의 책을 읽는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질서를, 1417근대의 탄생은 책의 역사를, 야콥센은 감성을, 그래서 집중이 가장 필요한 이 시간에 나의 여기저기를 이때는 이거 저때는 저거하면서 읽어 내려간다. 필서까지는 아니지만 필요한 부분을 노트에 적는 것을 즐기는지라 내 볼펜은 2주 정도면 수명을 다한다. 볼펜은 참 신기하다. 새것은 으슥으슥 자연스러운 쓰기에 방해되지만 계속 그 볼펜만 쓰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글씨체도 이쁘게 바꿔주어 계속 그 볼펜만 사용한다. 반복은 집중을, 집중은 편안함, 편안함은 소중함으로 진화된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영감이나 새롭게 이해된 것들은 곧바로 글의 소재가 되어 메모로 남기거나 죽~써내려가기도 하는, 오로지 나의 정신이 책과 글 속에 빠져 있는 2시간이다. 이 시간, 나의 집중도는 놀랍다. 측정기로 정량화할 수는 없지만 오후쯤 되면 내가 왜 놀랐는지 알게 된다. 새벽에 밑줄 그은 부분이나 노트한 것, 떠오른 영감에 대한 메모, 새벽에 쓴 글들을 오후에 작정하고 앉아서 하라 했으면 못해냈을 것이다. 집중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멘탈과 마음가짐이 미약한 나는 환경의 도움으로 내 능력이상을 경험한다. 그 환경을 내가 알아내기까지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시도 끝에는 결론이 있고 결론나면 그걸 지켜내면 된다.
물론, 이 2시간을 온전히 책과 정신이 계속 손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날 술이라도 마셨다면 뱃속이 요란하여, 커피중독이라 커피타러, 책이 이해가 안되거나 내 가슴을 심하게 때리면 테라스에 나가 찬바람도 맞아야 해 손을 놔야 한다. 하지만 괜찮다. 세네카의 말대로 인생은 자수와 같다. 아이들 어렸을 때 뜨개질해 옷을 여럿 만들어 입혔었는데 옷에 이쁘게 무늬를 만든 후 완성된 옷에는 안감을 한다. 뒷면은 실들이 어지럽고 지저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뒷면에 매듭이 하나 성기게 매여 풀리기라도 하면 아뿔싸, 앞면의 무늬가 망가진다. 어지러운 혼란도 다 제 몫이 있는 것이다. 일관된다는 것은 항상 그 이면에 어지러진 것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새벽의 강도높은 2시간의 집중도 그렇다. 가끔 또는 자주 날 방해하는 요소들이 안밖에 있어도 그것 역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라 집중을 위한 것이며 이 정리와 혼란이 함께 병행되는 것이 일관이다. 방해를 당해도 계속 하는 것이 일관이다. 집중은 집중하지 못하는 그 시간들의 반복을 통해 길러진다.
집중력. 집중하는 힘이다. 힘은 연마하면 키워지는 것이 원리다.
방해하는 그 것과 함께 일관을 지킨 시간이 집중의 힘을 키운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집중은 재미없고 잘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집중에는 일정시간 엄청난 곤혹이 따르지만 이 곤혹이 쾌락으로 가는 길이기에
집중은 재미없던 그것을 재미있게, 싫던 그것을 좋아하게, 몰라서 못했던 그것을 잘하게 만든다.
결국, 집중은 나에게 영원한 놀이 하나를 선물한다.
이러한 집중은 몰입으로 진화되고 몰입은 초월된 무언가로 나를 이끈다.
즉, 집중은 집중하는 시간으로만 키워낼 수 있으니 다른 어떤 방법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
그리고 4시 30분경, 미리 써놓은 글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다듬어 4시 50분경 브런치글을 발행한 후 5시부터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장 의미와 가치를 두는, 가장 오래 지속하고 싶은, 나를 살아있게 하는, 나를 배우게 하고 나를 흥분시키는 독서모임을 시작한다. 독서모임은 5~6시까지는 줌을 켠 채 각자 책을 읽고 6~7시에는 1사람이 읽은 내용 발표, 나의 피드백 내지 강의로 진행되는데 항상 마지막이 버리이어티하다. 모두가 아쉬워한다. 손하트에 빠이빠이까지, 내일 새벽에 또 만날 것인데도 뭐가 그리 아쉬운지, 단지 책읽고 대화나눈 것인데 뭐가 그리 행복한지, 우리는 그렇게 소소한 공간에서 거창하고 찐한 행복으로 가슴을 한껏 부풀린 채 새벽을 보내고 아침을 맞는다. 이제 남들과 같은 일상의 하루로 들어가는 것이다. 독서모임의 집중은 일상을 여유있게 해준다.
주위가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하루를 5시간이나 먼저 산다는 환희와 경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 이 심정을 표현해 줄 모국어가 없다. 세종대왕도 어떤 선조들도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는지 내가 어휘력이 부족한 것인지... 대다수가 하루를 시작하지 않은 5시간을 나는 1분도 허투로 버리지 않고 내 몸과 정신과 마음과 영혼에 온전히, 그것도 매일 집중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은 어마무시한 일이다. 내가 살면서 가장 잘 한것은 나의 아들딸을 만든 것이고 두번째 잘 한 것은 이렇게 새벽을 보내는 것이다.
집중은 순간을 100으로 사는 것이다. 한순간 집중하고 나머지는 나몰라라가 아니다. 독서도, 글쓰기도, 공부도, 노는 것도,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하나하나에 100의 진심을 담아 사는 것이다. 대충 적당한 1들이 모여 100의 하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 나로써, 나를, 나답게, 순간의 100이 전체인 하루의 100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의 가장 중요하게 치러야 할 의식을 새벽에 치르고 나의 평범한 일상은 7시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저녁시간은 포기한다. 새벽을 위해.
집중은 한손에 든 놓기 싫은 것을 놓아야 얻어낼 수 있다.
포기가 곧 집중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