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Feb 02. 2023

1000일의 새벽독서로 배운
삶의 '관점' 4

나는 항상 수혜자다

나에게 코칭을 받는 분들이 나를 조금 특이하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다소 격앙되는 것은 아마도 내게서 전해지는 남과 다른 관점때문일 것이다. 분명 나에게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괴로움과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들에게서 비교적 자유롭다. 이유는 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또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작든 크든 길든 짧든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나를 거쳐갔지만 나는 내게 터진 일, 내게 닥친 일인데도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지금은 거의 모든 '일'에 있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일'이라면 '나를 중심으로 또는 내가 관여된 모든 사태'를 말한다. 가령, 작게는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소소한 것부터 크게는 지금과 같은 경제불황까지 내가 연관되어 있다면 나에게 닥친 사태에 해당된다. 아무튼 내 인생에 진입된 모든 사태는 다 이유가 있어서 내게 찾아왔다는 수동적인 관점으로 살기에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하필이면 지금? 난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은 거의 없다. 대신, '세상이(자연이) 또 무슨 일을 꾸미시려나 보네.' 궁금할 뿐이다. 나에게로 온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러한 관점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시 말해, 나는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라 '선택되어지는‘ 객체라는 나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이 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선택한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는 것을 어떤 시기에 알아버렸다. 나는 무엇이 되려 했는데 다른 무엇이 되어 있고 나는 어느 누구와 이것을 하려 했으나 다른 누구와 저것을 하고 있고 나는 그 시기에 그 자리에 있으려 했으나 이 시기에 이 자리에 있다. 이 총체적인 결과로서 나는 나의 계획이나 판단이 아닌, 더 큰 어떤 움직임이 나를 이동시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도 나는 '선택하는'이 아니라 '선택되어지는' 관점으로 살려 한다.


신은, 자연은, 세상은 늘 나를 통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 

또는 늘 자신들의 일을 하며 나를 거쳐 또는 데려가려 한다. 

또는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정리하기 위해 나를 늘 혼내고 다그친다.

또는 나에게 일어날 사태에 대해 항상 미리 내게 언질을 준다. 

일거수일투족 모두 다 그렇다.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다리가 삐더라도, 잘 지내던 사람과 순간의 갈등으로 소원해지더라도, 이리 될 줄 알고 밀어붙였던 일이 저리로 방향을 틀더라도, 오늘 약속이 취소되거나 기약없이 미뤄지더라도, 이 모든 것은 자연이 그저 내게 주는 언질이자 나의 인생을 당신들의 뜻에 맞춰 정리하기 위함이기에 나는 순순히, 거부감없이 그저 순응하고 만다. '어떤 의도가 있으시겠지'라며.     


물론, 운명론자는 아니다. 내가 운명론자였다면 지금 나는 아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테고 노력이 없으니 기대도, 희망도 품지 않겠지. 왜? 운명대로 다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세네카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나는 나를 '운명도 어쩌지 못하는 인간'으로 규정하고 산다. 수동적으로 내가 태어나며 부여받은 명(命)을 찾아 그 명이 가는 길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알려 주는대로 따르는, 그래서 신이 행운을 준다면 '참 잘 따르는 나'에게 주길 바라며 이런 이유로 운명조차 나를 어쩌지 못하는, 그런 인간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나는 늘 선택되어지는 존재다. 

나는 살면서 나의 의지보다 분명 한 차원 더 높은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내 이성의 판단을 내려놓았던 경험이 많다. 이는 분명 내가 아닌, 무언가로부터 이끌리고 있는, 이끄는 강인한 힘을 거부할 수 없는, 그래서도 안되겠다 여겨지는, 희미하지만 강렬한 나의 의지를 내 안에서 느껴왔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드넓은 바다 앞에 맨발로 서서 '아, 내가 바다를 보러온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데려왔구나', '나는 그저 방관자로 여기 서 있을 뿐 내 의지가 아니었구나.', '나를 굳이 바다에 맨발로 서게 하며 이 느낌을 알게 하려고, 이 문제를 풀어주시려고, 이렇게 엄청난 선물을 주시려고 나를 불러세웠구나'라는 감사함을 느낀 경험이 있다. 그저 수혜자로서 감사를 느꼈던 그 놀라웠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이성이 선택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성대로라면 바다에 가서는 안되는 상황이었고 문제가 그리 쉽게 풀릴 것이라는 상상조차 안되었던 때였다. 문득 떠오른 바다의 강렬한 이낌에 그저 순응했을 뿐인데, 그렇게 자석처럼 이끌렸을 뿐인데 나는 엄청난 수혜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새벽독서에서 '죽은 성인'들의 가르침을 통해 조금씩 검증되어졌다. 

모든 자연은 원자로부터 근원되어지는 것이지만 유일하게 우연으로 불리는 일탈도 존재한다는 루크레티우스의 '일탈'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면서 나의 길에서의 일탈 역시 자연의 뜻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활동 및 신성한 실재의 존재에 관련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우리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올더스헉슬리의 영적인 울림과 '제비 한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이라는 햄릿의 대사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해지면서 톨스토이가 내게 십수년전부터 알려준 '영혼이 이끄는 길'이 어떤 길인지 살짝 감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삶이란, 결국 수동의, 선택되어지는 것이구나를 안지 꽤 지난 지금, 

언제적... 어느 순간... 

비로소 '본래의 유수의 원인이 아니라 다만 놀라서 바라보는 방관자라서 나는 다만 갈망하고 쳐다보고, 수동의 자세에 몸을 놓을 뿐이고, 눈에 보이는 이 광경이 나 이외의 어떤 아득한 원동력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게 된다.'라는 에머슨의 글을 읽으며 진하게 공감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저 나는 바람에도 울리는 저 악기처럼 세상과 자연의 움직임에 진동하는 하나의 악기여야지.

그렇게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나는 진동해야지.

그저 나는 나로 무언가를 만들려는 목수가 이끄는 대로 하늘향해 자라는 나무여야지.

그렇게 나는 나를 키우다가 목수들이 어딘가로 나를 데려갈 때 또 거기서 잘 쓰여야지.

그저 나는 집주인이 잘 만들어 놓은 이 곳에 잠깐 임대하여 머물러야지.

그렇게 잠깐의 주인일 뿐, 영원한 객일 수밖에 없는 존재여야지.

그저 나는 소경이어야지.

그렇게 지팡이에 의지해 다정하게 때로는 강하게 나를 이끄는 그 곳으로 계속 걸어가야지.


순응하고 복종하는 자세로서

악기가, 나무가, 객이, 소경이 되어

지휘자가, 목수가, 집주인이, 지팡이가 가는 길에 날 선택하여 데려갈 수 있게 

나의 의미와 처지를 제대로 인지하고 연마하는 능동의 자세로 살아가야지.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나는 어떤 계획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유일한 판단이라 하면 '잘 따라가자.', '무조건 따르자' 뿐이다. 새벽독서에 열을 올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따른다는 것,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일텐데 이는 공부와 비슷하다. 공부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데 잘 못하는 것이다. 내가 따르려는 자세로 따라가려 하지만 다소 더디거나 못 미치거나 실수를 한다는 말이다. 게으르거나 꾀를 부리지 않기에 능력의 부족은 의지로 충분히 채워질 수 있을테니 그저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나의 삶은 분명 나의 삶이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 사물, 대상 모든 것이 내 선택이 아니라 날 선택해준 것이다.

자연의 선택에 의해 나와 인연이 닿은 것들이다.

그러니, 내가 잘할 수밖에. 

그러니, 고마워할 수밖에.

그러니, 겸손해질 수밖에.


나는 나를 선택해준 모든 이, 모든 것, 모든 사태들을 통해

나의 삶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삶이어야만 하고

나의 삶은 자연의 조화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삶이어야만 하고

나의 삶은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걸어가야 하는 삶이어야만 한다.

나의 삶에 주어진 시간동안 나는 항상 수동의 존재여야 한다.    

이렇게 세상은, 자연은, 우주는 자신들의 조화로운 작품에 나를 만들어 데려가기에 

이에 수동으로 따르는 능동의 자세여야 한다.


그러니, 나를 선택하여 세상에 내놓은 이를 순종하고 따르는 수밖에

그러니, 나를 선택하여 굳이 고난과 역경으로 키워주는 이의 야단을 들을 수밖에

그러니, 나를 선택하여 기꺼이 운을 주심에 깊은 감사로 더 크게 운을 불려 세상으로 내놓을 수밖에


'나는 선택되어졌다'는 관점이야말로 

나의 영혼이, 세상이 이끄는 진리를 잘 따르는, 

그래서 가장 나다운 삶이 만들어지는 길임을 이제 나의 모든 세포는 느낀다.  


오늘도 내게 관심많은 세상은 나에게 무엇이든 명령할 것이다. 크게 모나지 않으면 따로 명령이 없어 오늘 내게 주어진 과업을 나는 성실히 하면 될 것이고 느닷없이, 갑자기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는 그저 나를 거쳐 가야 하는 이유가 있구나.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나에게 무엇을 부탁하거나 요구, 제안하겠지. 그럴 때 나는 또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하겠지. '세상이 저 분과 나를 통해 뭘 하시려나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요?'라고. 이렇게 물어봤자 물론 대답은 없다. 없는 것인지 못듣는 것인지... 그 대답을 듣는 내 가슴의 감각이 다소 둔해진 것은 아닐까 싶은 맘에 최근 관심가지며 키우고 있는 것은 가슴으로 듣는 소리다. 이것을 자라게 하는 데는 영양제도, 촉진제도 없어서 그저 다른 감각들의 기능을 약하게 만들어 상대적으로 원하는 감각을 키우기로 했다. 내가 살기 위해 느끼는 감각도 총체와 총량이 있을테니 가슴의 감각을 키우려면 나머지를 감각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활동량을 줄이고 되도록 혼자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하며 가슴이 들어야 할 소리에 더 민감해지기 위해 영적진화를 돕는 새벽독서에 최대한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우주의 장엄한 질서에 순응하며 '선택받는' 삶을 살 것이다. '선택되어'지기 위해 나는 나를 매일 키워내야 한다. 아무 대가없이 세상에 나와 이리 많은 것들에게 선택되어져 여기까지 쓰였으니 내 기능은 더 숙련되어 있을테다. 숙련공은 더 숙련을 요구하는 현장으로 보내질테고 그렇게 점점 나는 귀한 사람으로 세상의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잘 쓰이다가 죽음의 세계로 잘 진입할 것이며 과거에 그랬듯이 다시 죽음에서 태어남으로 올 때 아무런 두려움도 감정도 없이 다시 순환되는 것.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장엄한 질서를 위해 나를 움직이는 것'임을 이제 안다.     

          


1.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2012, 강대진역, 아카넷

2. 올더스헉슬리, 영원의 철학, 2014, 조옥경역, 김영사

3.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2007, 이상원역, 위즈덤하우스

4. 랄프왈도에머슨, 에머슨수상록, 1984, 이창배역, 서문당 

작가의 이전글 네가 결코 훼손해선 안되는 최고의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