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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02. 2023

포도나무가 되렴

엄마의 유산 14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꿈꾸며 엄마는 원하는 것을 하나씩 적고 상상하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단다. 텃밭엔 엄마가 좋아하는 깻잎과 아욱, 무, 오이를 심고 꽃밭에서 현관까지 계단은 온통 수국으로 넘쳐나게 해야지. 그리고 마당엔 잔디를 깔고 본채와 연구소는 디딤돌로 이어놔야지. 디딤돌이 끝나는 지점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엄마가 좋아하는 물고기들을 키우고 대문열고 들어온 오른쪽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의 나무를 심고 엄마나무도 심어야지...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자연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결이 고운 이들과 소소한 지혜를 나누며 살고 싶은 꿈이 있잖아. 자연은... 참으로 무한한 지혜를 엄마에게 선물하거든. 엄마는 자연이 참 좋아. 생각해보니 지금껏 자연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일관성'과 '묵묵히'야. 오늘은 이 얘기를 해볼께.


작은 씨앗에는 그 생명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한 알고리즘이 모두 담겨있다고 생각되지 않니? 가벼운 입김으로도 날아갈 정도의 작은 채송화씨앗 하나만 봐도 어떻게 그 똑같이 생긴 작은 것에서 그렇게 다양한 컬러와 모양의 채송화가 피어나는지 너무 신기해.


잣나무솔방울속에 쏙쏙 감춰진 하나의 씨앗은 어떻게 하늘높은 줄 모르고 죽죽 뻗어 셀 수 없이 많은 잣을 만들어낼까? 너무 신기해.


키자랑하듯 위로 쑥~ 자란 설악초는 어쩜 그렇게 다채로운 '하양'을 만들어 내는지, 그리고 무심하게 자기 씨를 툭툭 던져버려서 테라스 여기저기에서 씨를 줍느라 애먹었었지. 너무 신기해.


도대체 이 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작디 작은 좁쌀만한 씨앗들이 온갖 과일로, 꽃으로, 나무로 그렇게 모양도 크기도 쓰임도 다르게, 아름답게 자라나는지 너무너무 신기해. 이런 신기함은 비단 엄마만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작은 감정들이 엄마를 너무나 행복하게 해준다면 이 자체가 엄마에겐 특별한 선물이지. 식물만이 아니겠지. 결코 마르지 않고 유유히 자기 갈 길 가면서 수많은 생명을 품은 물길이나 너무 정직하게 한결같아서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 잡게 만들어주는 해와 달, 그리고 구름. 하늘과 땅과 물이 엄마의 시선에 항상 머무르는 그런 곳에서 산다면 매일이 아름다울거야.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그 작은 씨앗같은 아가들이 세상에 나와 자신의 길을 걷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지키며 묵묵히 자신의 모양새를 만들어가는 여정은 온만물의 씨앗과 다르지 않겠지.... 이 길은.... 꾸준히 자신을 믿으며 탐구하며 극복하며 장엄한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할 수 있어.


자연을 바라보면....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을까... 

어떻게 이리도 영원할까... 

어떻게 저리도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까... 

그 지속과 영원의 숭고함이 너무나 신성해서 이들 앞에서는 어떤 가식도 거짓도 혼탁도 용납이 안되거든. 

그 일관된 묵묵함... 

우리가 지닌 삶의 태도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덩쿨을 무심코 바라본 적이 있어. 벽에 강력접착제를 발라놓은 것도 아닌데, 저 가는 줄기는 어찌 이 비바람에도 저리 서로를 의지하며 벽을 타고 위로만 오를 수 있을까. 키케로의 말, '포도나무는 원래 가지가 늘어지는 성질이 있어서 받쳐주지 않으면 땅에 닿게 되는데, 그래도 똑바로 서 있으려고 덩쿨손으로 뭐든지 닿기만 하면 껴안고 올라간다네.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기어 올라가는'. 


포도나무덩쿨뿐만 아니라 모든 덩쿨이 이리 애쓰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단다. 이는 가는 가지의 물리적 힘만으로는 불가능할거야. 그 작은 가지는 툭!하면 끊어지고 후!불면 날아가. 자연의 거대한 힘이 준 본성에 자신의 작은 힘을 내맡긴 것이지. 그렇게 본능적으로 타고난 힘을 끌어낸거지. 우리도 그래야 해.


덩쿨은 자연과 거래하면서, 자연은 더 큰 세계와 거래하면서, 농부는 대지와 거래하면서, 인간은 세상과 거래하면서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 애먹고 애쓰고 애닮아하며 자리를 지켜가지. 그렇게 자기 생을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며 미끄러지지 않게, 떨어지지 않게, 과하지도 않게 그렇게 지.속.을 영.원.으로 이어가지. 결국, 거대한 자연 자체의 힘과 본성에 의지해서 우린 모두 생긴 모양대로 애쓰고 있는 것이야. 먹기 위한 포도를 수확한 즐거움도 크겠지만 그 양적인 선물보다 그것들이 자라는 시간속에서 우리는 더 큰 어떤 진리의 선물을, 힘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꾸준히... 묵묵히... 한결같이... 일관되게... 자기 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가장 자연스럽게 본성에 따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어. 가장 자연의 힘을 잘 이용하는 지혜로운 자이자 자연에게 선택받은 행운아라고 부를 수 있지. 우리는 이를 간단하게 '끈기'라고도, '인내'라고도 하지. 


제발 간절히 바라건데, 

이 두 글자에 담겨진 자연의 본성, 자연의 영원성, 자연의 강력한 힘을 감지하는 네가 되길 바란다. 

인간도 자연이기에 이 글자를 삶에서 실천한다면 

그 어떤 것에도 자연은 너와의 거래에 냉정하지 않을거야. 

오히려 후하게 너의 길에 선물을 내놓을거야.


엄마는 끈기를 두가지로 네게 알려주려 한단다. 

포도나무에게서 배운 것이지.

대개 끈기는 根氣(뿌리근, 기운기)를 말하지. 

뿌리깊게 기본에 충실한 기운이야.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에 대한 엄마의 첫번째 해석은, 끈기는 끈기(粘力,점력)야. 끈적거리는 성질이지. 덩굴이 벽을 타고 오를 때 마치 강력접착제를 붙여놓은 것과 같아. 자신의 길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근성이야. 네가 가야할 길이라면 포도나무처럼 미끄러지고 쓰러지더라도 그 길에서 떨어지지 마라. 어떤 길에도 돌부리가 있으며 어떤 길에도 위험은 도사린단다. 그것들을 대할 때마다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은 포도나무가 사과나무가 되겠다고 설치는 꼴과 진배없어. 너는 너의 길에서 강력한 점력, 끈기로 붙어 있어야 해. 그것이 자연이 네게 허락한 것이며 자연이 가진 무한의 힘을 네가 이용하는 것의 대가야.


두번째 해석은, 끈기는 끊기란다. 네 길이 명확하다면, 그 길이 네 길이라면 너는 다른 곳을 보면 안된다. 아주 어릴 적에 돋보기로 종이를 태워본 적이 있지? 바닥에 종이를 깔고 해의 뜨거운 열을 돋보기에 모아서 한참을 버티면 종이가 타기 시작하지. 운동장, 해, 돋보기, 종이. 자, 이렇게 같은 조건으로 시작하지만 1~2명의 아이만 종이를 태울 수 있어. 왜인지 아니? 


'어? 이 자리가 불리해!', '어? 내 종이는 두껍나봐.', '어? 저 아이는 벌써 불이 붙었네!, 어?어?어? 하면서 본연의 자세를 흐트러뜨리기 때문이야. 태양의 열이 한 곳에 모여 임계점에 도달해 종이를 태울 때까지는 무조건 집중해야 하거든. 집중을 위해서는 자기가 들고 있는 돋보기 외에는 모든 신경을 끊어줘야 해. 옆에서 뭔 소리가 나더라도 그냥 한 곳만을 집중해야 해. 결국, 저어기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꼼짝도 안한 녀석이 가장 먼저 종이를 태우지.


끈기란 주변에서 널 유혹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내는 것에서 시작된단다. 묵묵히... 일관되게... 한결같이... 끈기있게... 인내하며... 자, 이 말들은 모두 같은 말이야. 이 단어가 자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을 차단해주는 '포기'가 먼저 선행되어야 해. 결국, 집중한다는 것은 포기부터 한다는 것이지. 집중한 시간을 버티게 하는 힘이 끈기이며 인내거든. 


끈기는 어쩌면 노력과는 무관해. 노력을 한다면 유혹을 떨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명심해주길 바래. 능력이 뛰어나서, 재주가 좋아서, 재능을 타고 나서, 돈이 많아서, 물론, 상당히 부럽지.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가치있는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지속'과 '영원'한 자기자신만의 본성이 기본이 되어야 한단다. 일시적인 것보다는 조금 더디더라도 지속가능한 것에 너의 힘을 쏟길 바란다. 대나무는 7년씩이나 뿌리를 내리는데 시간을 쏟지. 그리고 싹을 낸 후부터는 어떤 나무들보다 빠른 속도로 하늘을 향해 자신을 뻗어올려. 대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7년간 가장 필요한 근성이 바로 끈기야. 


돋보기에 태양의 열이 모이는 시간

대나무가 7년씩 뿌리를 내리고 뻗치는 시간

나비가 애벌레와 번데기 시절을 견뎌내는 시간

매미가 땅속에서 10여년을 유충으로 버텨내는 시간

포도나무가 그 가는 가지로 울타리끝까지 오르고야마는 시간

네가 원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포기하고 인내하며 극복해야 할 그 긴 시간.

모두...

다르지 않아.

자연이 네게 보여주잖니.

나무도, 나비도, 매미도, 모든 생명체는 이 질기고 당찬 인내를 지니고 태어났단다.


너의 본성에 맞는 길을 찾았다면 포도나무와 같아라. 

끈기(끊기)를 먼저 하고 끈기(점력)있게 끈기(인내)로 네 길을 가렴. 

이런 너라면 자연은 넘치는 화답을 네게 보내줄거야. 


옆으로 시선을 돌리지 마라. 

누구에게도 방법을 구하지 마라. 

남들이 가는 길로 들어서지 마라. 

늘 코를 킁킁거리거나 입맛을 쩍쩍 다시거나 귀를 쫑긋거리는 사람은 절대 본연이 지닌, 무취무미무음의 가치를 알 수 없는 법이지. 


누군가가 해왔던 실험들, 걸었던 길이 안전하다 착각하지 마라. 인생의 가치는 자신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드는 것에 있단다. 네가 나무에 붙은 이끼만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이끼 외에 그 어떤 것을 보지 못한다 한들 네게 이끼는 온우주인 것이다. 네가 꿀벌들의 수려한 벌집만을 쳐다보며 꿀벌외에 수만종의 곤충을 모른다 한들 꿀벌은 네게 대자연인 것이다. 그렇게 네 길을 가렴. 오히려 길도 방법도 없으니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네 본성에만 의지하면 된단다. 그것이 네 길이란다. 그리고 그 값어치가 네 몸값이란다. 


그러니 포도나무와 같아라. 아무런 접착제도 없을 것이야. 너를 붙잡아줄 것은 오로지 너 자신, 너의 끈기뿐이야. 네 길은 너만이 알 수 있지. 애쓰고 자연에 의지하고 본성을 믿고 그렇게 오르렴. 그렇게 너와 네 길이 온우주의 조화를 위한 길임을 가슴속에 품고 믿으렴. 그 지독하게 애쓴 끈기가 마지막에 보랏빛 동그란 모양새로 달콤한 포도로 자신의 창조를 세상에 알리듯 너의 길에서 네가 애쓴 끈기도 너 자체를 세상의 창조물로서 드러나게 할거야. 이 보상은 너와 네가 지켜야 할 모든 이들을 위한 값진 가치가 되는거지.


묵묵히..일관되게..한결같이..

그렇게.. 네 길을 걸으렴.   

끈기있게 말이야.


* 키케로, 키케로인생론, 2009, 김성숙역, 동서문화사


본 글 발행 후 내내 찜찜함을 참지 못하여 살짝 덧붙입니다. 저는 포도나무를 키워본 적이 없는데 포도나무처럼 되라는 표현을 하다니. 발행하고 나서야, 과연 내가 위선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찜찜함을 너머 마음이 아주 불편합니다. 하지만, 애써 쓴 글을 삭제할 용기는 없고 본 글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살리고 싶기에 지금 포도나무를 키워본 적이 없는, 그저 덩쿨을 보면서 한참을 들여다본 기억과 키케로의 글이 준 강력한 힘에 의지해 썼음을 밝히는 것으로 저의 위선을 감추며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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